최씨무신정권의 개막 최충헌

2022. 9. 15. 18:48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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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헌의 아버지는 상장군이었으므로 최충헌은 음서의 특혜를 입어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계기는 조위총의 난 때에 활약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를 계기로 더욱 승진하게 되었고 이윽고 장군자리에 이릅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동생 최충수가 있었는데 그가 이의민의 아들과 마찰을 일으킨 일이 있었습니다. 이지영이 최충수가 기르던 비둘기를 빼앗았고 이에 최충수는 비둘기를 돌려받기 위해 최충수의 집에 들렀는데 이 때 이지영이 하인을 시켜 최충수를 묶었습니다. 하지만 이 때 최충수는 이지영이 묶지 않으면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자 이지영은 그 기백을 보고 사나이답다고 생각하고 풀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최충수는 이를 빌미로 형 최충헌에게 이의민부자를 없애자고 제안합니다. 이 그리하여 최충헌은 동생 최충수와 함께 이의민일당을 없애는 데에 성공합니다. 그러면서 강력한 무인세력이던 두경승마저 제거했습니다. 두경승은 이에 분하여 피를 토하고 죽고 말았고 47세의 최충헌은 고려 최고집권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최충헌은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이의민이 이전에 인종의 등뼈를 꺽어 숨을 끊게 한 바가 있으니 그가 왕을 죽인 인물이라는 점과 계림의 황제가 되려 반역을 꿈꾼 점을 이유로 든 것입니다. 
이후 권력을 잡은 것은 최충헌이었습니다. 그는 국왕에게 10개조에 이르는 건의사항을 올립니다. 그는 국왕이 음양설에 심취해 새 궁궐에 들어가지 않는 것을 지적하였고 빼앗긴 토지를 돌려줄 것, 그리고 관리의 수를 줄여 세수의 낭비를 막을 것’, ‘유능한 지방관을 임명해 토호의 횡포를 방지하고 공물 진상을 금지할 것’, ‘승려의 왕궁 출입을 금지하고 대규모 불사를 축소할 것’, ‘관리들은 검소한 생활을 할 것’, ‘군왕은 신하의 간언을 받아들일 것’을 포함한 사안에 대해 적어 올렸으니 이는 분명 이전까지의 무신집권자들과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안들이 제대로 시행되지는 않았으나 최충헌은 이를 통해 자신이 일으킨 쿠데타에 대해 합법성을 부여하고 한 것입니다. 이에 더해 최충헌은 문신들과 손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최충헌은 당시 왕이던 명종을 내립니다. 어쩌면 <봉사십조>는 명종을 폐위시키기 위한 구실이었는지 모릅니다. 최충헌은 명종이 <봉사십조>를 이행하지 않는다며 폐위하는가 한편 이에 반대할 것 같은 인물을 모아 숙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동생을 왕으로 삼으니 그가 바로 신종입니다. 그는 애초부터 무신정변에 참여하지 않았던 인물이라 명종에게 진 빚도 없을뿐더러 최충헌 자신이 정권을 시작함에 있어 이전 정권과 차별화를 두기 위해 왕을 교체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후의 과정에서 그의 동생인 최충수가 무리수를 두었습니다. 신종을 옹립하면서 다음 왕에 대해 염두에 두었으니 그건 바로 그의 아들이었고 그는 자연히 태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최충수는 이 태자 부부를 강제로 이혼시키고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들이려 한 것입니다. 최충헌은 최충수를 불러 이런 일을 벌여선 안된다고 야단쳤습니다. 만약 최충수가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들인다면 백성들의 난을 피할 수 없고 이의방도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들이다가 남의 손에 죽었다며 타이른 것입니다. 최충수는 이에 수긍하는 듯하였으나 돌아서서는 이에 굴하지 않고 태자비간택을 추진하였고 이 때문에 일어난 갈등으로 인해 최충수도 최충헌에 의해 제거당했습니다. 최충헌은 동생을 사로잡을 것이지 죽였다며 죽은 최충수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교정도감이 설치된 시기

하지만 여타 다른 무신집권자처럼 최충헌도 혹시나 모를 암살의 위험에 대비해야 했고 따라서 도방을 설치하여 자신을 보호하였습니다. 도방은 본래 경대승이 설치한 것으로 자신의 신변보호를 하기 위한 사병집단으로 사병들의 숙소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경대승이 죽고 나서 도방도 자연스레 없어졌으나 최충헌이 다시 부활시킨 것입니다. 아니 그보다 더욱 강화되었으니 규모도 커졌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최충헌의 지위는 왕의 그것을 능가하였고 그 힘으로 다시 신종을 몰아내고 그의 아들을 왕위에 오르게 하니 그가 바로 희종입니다. 무신정변에 의해 세워진 왕 명종은 이후 몇몇의 무인이 권력을 차지하는 과정에서도 왕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최충헌은 달랐습니다. 그는 명종을 몰아내고 신종, 그리고 다시 희종으로 왕을 교체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최충헌은 교정도감을 설치하였습니다. 이것이 설치된 것은 최충헌의 신변을 보호하는 것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당시 최충헌에 대한 암살시도가 이어졌고 이러한 사건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와 관련된 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것이 교정도감이었는데 나중에는 계속 살아남아 최씨 정권을 보호하고 반대세력을 제거하는 데에 이용되었고 인사행정, 조세관리, 중앙과 지방 감사, 규찰, 법무, 국방업무까지 맡아보는 등 국정을 총괄하는 기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최충헌을 희종은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왕보다 위에 앉아서 마음대로 정부기구를 만드는 것은 유례없는 것이었고 선대왕들이 최충헌에 의해 교체당한 것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최충헌제거작전이 시작되었고 최충헌이 왕을 배알하러 수창궁에 들어오면 왕이 내린 음식이라며 그를 유인한 뒤 제거하기로 하였습니다. 작전은 순조롭게 흘러가는 듯 했으나 그의 호위무사들이 당하자 당황한 최충헌은 지주사로 숨어들었으며 그가 궁궐 안에 심어놓은 심복 부하 기약전이 최충헌을 구해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희종은 1211년 폐위당했습니다. 그러고는 자신의 폐위한 명종과 함께 강화도로 유배갔던 명종의 맏아들을 왕으로 세우니 그가 바로 강종입니다. 
최충헌은 자신의 정권이 안정화되자 문신들을 등용하기 시작했고 그 중에는 이규보도 있었습니다. 사실 최충헌은 포악한 정치를 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그가 최씨무신정권의 기반을 다질 수 있던 것은 특유의 유화정책도 한 몫했습니다. 문신을 등용한 것도 그랬지만 그의 개인적인 생활에서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가 이뻐한 계집종 동화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와 몇몇 남자들과 정을 통했고 이를 안 최충헌이 동화를 불러 그 중 누가 마음에 드느냐고 물었습니다. 동화는 최충헌이 말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최준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동화는 이로 인해 최준문이 화가 당하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오히려 최충헌은 최준문을 자신의 종으로 두고 이내 마음에 들어 신임하며 벼슬길에 오르게 하니 대장군의 자리까지 이른 것입니다. 이에 최준문은 충성으로 최충헌을 보좌하였으며 1217년 박달령 전투에서는 고려로 쳐들어온 거란을 물리치는 데에 큰 공을 세우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최충헌으로 시작된 최씨정권이 60년이나 지속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러한 리더쉽을 발휘한 최충헌은 어떤 인물로 평가될 수 있을까. 조선의 학자들 입자에서는 그를 반역자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국왕을 마음대로 몰아내고 자신이 국왕보다 더 위에 올라서 국정농단을 부린 것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현명한 정치를 펼쳤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몽골이 대륙에서 확장하자 이 때문에 거란이 고려의 국경을 침범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최충헌은 정예병들은 자신을 호위하도록 하여 국방에 구멍을 만들었으니 좋은 정치가는 아니었을뿐더러 그가 최고권력자로 있을 때엔 여전히 매관매직이 일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실질적인 1인자였지만 표면적인 2인자의 위치에서 권세를 누렸습니다. 왕을 죽이거나 그가 스스로 왕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최충헌은 왕을 죽인 이의민과 비교해서는 덜 나쁜 집권자로 후세에 남을 수 있었고 스스로 왕이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자겸과 비교되었고 적어도 이와 같은 행동으로 그의 비참하 말년은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문신을 등용한 것은 이전의 다른 무인집권자들과 차별화된 정치수완으로 그의 집권을 더욱 공공하게 해주었습니다. 결국 최충헌이 고려멸망에 영향을 준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의 권세로 문벌귀족세력이 무너지고 불교계가 약화되니 이로 인해 새로운 세력이 싹트게 되었고 이후 조선의 건국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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