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고려로 쳐들어오다 여몽전쟁

2022. 9. 17. 18:5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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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 등장기의 대외 주변 정세

고려 최씨 무인정권기의 2대 집권자는 최우였습니다. 하지만 이 때 세계를 뒤흔드는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몽골이었습니다. 몽골은 드넓은 초원을 무대로 살던 유목민족으로 이곳저곳에 흩어져 살고 있었는데 테무친이라는 사람이 부족을 합치면서 그 세력이 커졌습니다. 1189년 몽골 초원에서 열린 부족회의에서 테무친이 27살의 나이에 칸의 자리에 올랐고 그는 ‘황제 중의 황제’라는 의미로 칭기츠 칸이 되었습니다. 그는 신분이 낮은 사람이라도 공을 세우면 지위를 높여주었고 어렸을 때부터 말과 함께 한 몽고족은 막강한 기병을 보유할 수 있었습니다. 빠른 기동력을 이용한 포위전술과 유인한 다음 공격하는 매복전술, 그리고 잔혹한 공격으로 무장한 이들은 당시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의 기마부대가 정복하고 나면 해당 정복지는 그 종족에게 맡기면서 한편으로는 이들 지역을 군사거점으로 삼아 세력을 확장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몽골은 대제국을 이루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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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몽골세력은 중국북쪽의 금나라를 남쪽으로 밀어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금나라에 눌려 살던 거란족들이 고려 쪽으로 침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몽골군도 거란군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고려 땅으로 넘어오곤 했는데 날씨가 추워지고 식량이 떨어지자 몽골은 고려에게 함께 거란을 토벌하자고 하였고 이에 응한 고려는 거란을 토벌하고 몽골과 형제관계를 맺었습니다. 하지만 몽골사신이 고려조정에 와서 행패를 부리거나 많은 공물을 요구하는 바람에 두 나라간의 사이는 나빠졌으며 몽골 사신이 돌아가는 길에 피살당하는 일이 벌어지자 몽골은 이를 빌미삼아 1231년 8월에 고려로 쳐들어왔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칭키츠 칸에 이어 정복사업을 이어 받은 2대 오고타이가 금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방해가 될 수 있는 세력인 고려로 침공한 것으로도 이해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고려와 몽골간의 전쟁은 30여 년간 이어졌습니다. 살리타가 이끄는 몽골군은 압록강을 건너 함신진을 별다른 저항 없이 손에 넣었으며 선덕진까지 손에 넣었습니다. 이후 구주성에 이른 몽골군은 이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공격했지만 얻지 못했습니다. 몽골군이 구주성의 한달 간의 저항에 부딪힌 사이 고려는 정예군을 편성하여 북진하게 되었습니다. 고려군과 몽골군은 동선역이라는 곳에서 마주쳤습니다. 이 곳에서 고려군은 몽골군의 기습을 받았지만 저항을 하여 위기를 넘겼고 이 전투에서는 초적 출신으로 참여한 병사가 큰 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안북성까지 올라간 고려군은 몽골군과 일전을 벌이는데 성 밖으로 나간 고려군은 몽골군의 전형적인 전술, 치고 빠지는 공격에 당하고 말았습니다. 싸움에 패배한 고려군은 안북성으로 돌아갔습니다. 세계 최강의 군대를 상대로 야전을 벌인 일도 잘못이었지만 이들을 이끌어야 할 몇몇 지휘관들은 성안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것입니다. 몽골군은 그 기세를 몰아 남진하여 개경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동선역에서의 고려진영의 승리는 오히려 몽골군이 계략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몽골군은 기습과 유인작전을 병행하였는데 이러한 작전에 말려든 고려군이 섣불리 안북성 전투를 벌였다가 패퇴를 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1231년 12월에는 몽골군이 개경을 포위하고 흥왕사를 불태웠습니다. 고려조정에서는 화친을 전달하는 서신을 보냈고 몽골군은 이에 응하고는 강화 조건으로 말 2만 필과 처녀와 총각 수천 명, 옷감 1만필, 수달피 1만필을 비롯한 막대한 공물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을 고려가 하는지 감시하기 위해 몽골은 고려 땅에 다루가치 72명을 남겨두었습니다. 강화를 체결하였으나 몽골은 약탈과 학살이 계속 이어졌으며 그러는 사이 강화천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최우는 몽골의 요구조건을 들어주기로 하고 몽골군이 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후에는 이들의 요구를 모르쇠로 일관했습니다. 몽골군은 고려조정과 강화했으나 그러는 사이에도 박서가 지키는 구주성에서는 항전이 계속되었습니다. 박서는 이 요구를 거절하자 고려조정에서는 사람을 보내어 설득한 끝에 구주성의 저항이 끝이 났고 비슷한 시기에 구주성과 함께 저항을 하던 자주성도 저항을 멈추었습니다. 아니러니하게도 이들 성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은 노비들과 하층민들, 노군잡류 별초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싸움을 지켜본 고려조정에서는 용기 있게 저항한 자들이 처벌받을 위기에 처했고 오히려 그들에게 쉽게 항복한 이들만 살아남았으니 몽골의 침략은 고려사회를 더욱 분열시키게 하였습니다. 

여몽전쟁

1232년, 최우는 도읍을 개경에서 강화로 옮겼습니다. 몽골과의 일전을 준비했다기보다는 승산이 없는 싸움을 하는 것보다 피하는 전략으로 말뿐인 결사항전으로 육지에 남아있는 백성들에게 그 고통을 고스란히 전가시키는 무책임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몽골군이 2차 침입을 해왔습니다. 이러한 그들이 처인부곡을 점령하기 위해 왔습니다. 이 곳에는 처인성이라는 둘레가 450미터도 되지 않는 토성이 있었습니다. 이 작은 처인성을 살리타이가 들른 이유는 식량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500기의 기병을 데리고 나선 몽골부대를 맞이한 것은 승려 김윤후가 이끄는 부곡민들이었습니다. 처인성 동문에 김윤후와 저격수들이 화살을 들고 대기하고 있다가 누군가 화살을 쏘아댔고 그 중 한 화살이 적장 살리타이를 사살합니다. 몽골군은 지휘관을 잃었기 때문에 유유히 시체를 메고 자리를 떠났으며 이에 몽골군은 고려조정과 강화를 맺고 김윤후는 환속하여 장군이 되었습니다. 
몽골군이 수차례 쳐들어왔으나 전쟁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습니다. 몽골군의 일방적인 침략전쟁 아래 백성들은 산속으로 숨어들거나 저항하였으며 고려조정에서는 몽골군이 돌아가면 고려왕이 입조할 것이라고 해놓고는 돌아가면 이를 무시하고는 고려의 관리들은 고려백성들에게 세금을 강요했습니다. 백성들은 이러한 관리들을 살해하는가 한편, 때로는 반란도 일어났으며 고려군은 몽골군이 아닌 고려백성들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는 이상한 전쟁이 지속되었습니다. 죽주성에서는 몽골군이 격퇴되었지만 경주까지 내려간 몽골군은 황룡사 목탑을 불태웠으며 고려의 국토를 유린해갔습니다. 
1253년 몽골의 다섯 번째 침략이 있었습니다. 당시 집권자 최항은 몽골과의 강화하자는 여론에 절대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국가적인 자존심보다는 최씨가문의 존립과 자신의 안위를 걱정한 극히 개인적인 처사 때문이었습니다. 몽골군은 8월 12일 양산성을 함락하고 9월 20일에는 춘추성을 함락하였습니다. 이 때 김윤후는 충주산성방호별감이 임명되어 충주성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당시 몽골군이 잔혹한 학살이 잘 알려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몽골군이 들어오기만 해도 항복하는 성이 있었습니다. 충주산성 근처에 있던 천룡산성도 그러했습니다. 고려조정에서는 어떤 식으로 몽골과의 화친을 맺을지 갈팡질팡하는 사이 몽골군이 충주성에 당도했습니다. 이 성은 삼국시대 백제가 충주지역을 방어하기 위한 쌓은 성으로 몽골군은 이를 함락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썼고 항복한 고려군을 동원하기까지 했습니다. 70여 일이나 진행된 항전에 충주성안의 사람들은 지쳐만 갔습니다. 김윤후는 이에 특단의 조치를 내립니다. 그것은 바로 성을 지키면 신분을 막론하고 상을 내리겠다라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이것만으로는 효과가 없어보였습니다. 그 때 김윤후는 성안에 있는 노비문서들을 불태우고는 몽골군에게 빼앗은 소와 말들을 성 안에 있는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며 사람들의 사기를 도왔습니다. 이에 사기가 오른 충주성 주민들은 성을 사수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몇몇 곳에서만 국지적인 승리만 있을 뿐, 전쟁은 몽골의 일방적인 수탈과 침략으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몽골군은 지나가는 곳마다 불을 지르고 망가뜨렸으며 6차 침략 때까지 잡혀간 고려인만 20만 명이 넘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지방 관리와 백성들의 이탈로 이어졌고 이는 무신정권의 기반을 흔들어놓았습니다. 그리고 1259년에는 태자를 몽골에 보내고 개경으로 돌아간다는 약속을 하며 화친이 이루어졌습니다. 1270년에는 임유무가 제거되며 무인집권기도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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