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농민의 난 그 원인과 영향

2022. 9. 16. 18:51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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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농민항쟁

고려시대에는 농민들의 난이 빈번하게 발생하였습니다. 흔히 무신집권기에 많이 일어난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그 전에도 농민문제가 심각하였으므로 농민의 난은 이전에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역을 피하거나 혹은 유망하거나 도적하는 과정에서 무력항쟁으로 이어졌고 12세기 중반 고려 의종시기에 여러 차례 농민의 난이 있었습니다. 
1172년에는 서북의 창주, 성주, 철주의 3주민의 항쟁이 있었고 또한 고려시대에는 향·부곡·소가 있어 이들 지역에서는 일반농민들에 비해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하는 현실에 처해 있었습니다. 특히 왕실과 관아에 필요한 물자를 바쳐야 했던 만큼 그 부담이 컸으므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불만은 컸습니다. 이러한 주민들의 불만이 실린 난이 있었으니 아른바 망이 망소이의 난이었습니다.
‘공주 명학소 사람 망이·망소이 등이 무리를 모아 산행병마사라 스스로 일컫고 공주를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갑술에 …정부는 지후 채원부와낭장 박강수 등을 보내어 나적을 달래었으나 적이 따르지 않았다. 『고려사』

망이 망소이의 난

 망이와 망소이는 형제로 이들은 스스로 산행병마사라 부르며 전투부대를 만들며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인근 농민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만들었으며 못된 관리를 처단하고 빼앗긴 곡식을 다시 찾아 농민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이들의 세력은 만만치 않아 한 때는 3000명의 정부군을 격파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무신집권자는 정중부였는데 이 난을 해결하기 위해 그는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키고 주민들을 설득하고 돌려보냈습니다. 하지만 이후 다시 일이 터졌습니다. 나라에서는 망이의 어머니와 그의 부인은 잡아 옥에 거둔 것입니다. 
‘망이 등이 홍경원을 불지르고 그 곳에 살고 있는 중 10여 명을 죽이고는, 주지승을 협박하여 그들의 편지를 가지고 서울에 가게 했다. 그 개략적인 내용을 보면, “이미 우리의 고향을 현으로 승격시키고 또 수령을 두어 안무케 하더니, 되돌려 다시 병사를 보내 토벌하고 우리의 어머니와 아내를 잡아가두니 그 뜻하는 바가 어디에 있느냐, 차라리 창·칼 아래에서 죽을지언정 끝까지 하옥한 포로는 되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서울에 이르고야 말겠다.”고 했다.’『고려사』
이에 망이와 망소이는 다시 난을 일으켰고 청주를 제외한 충청도 지역 대부분과 경기도 일부까지 세력을 뻗쳤습니다. 하지만 1년 7개월에 걸친 이들 명학소의 난을 정부의 탄압 아래 잠재워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 난의 영향을 실로 컸습니다. 비록 이들의 난은 실패했지만 지배자들의 수탈과 신분차별에 항거하여 일어난 피지배층의 운동이었으며 특히 고려사회의 최하층집단인 소에서 시작된 민란이었기 때문에 그 충격이 더욱 컸습니다. 이들은 다른 지역에 비해 더 많은 공물을 바쳐야 했으며 이 구역 내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였기 때문에 지역 차별에 허덕이는 곳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쌓인 불만은 망이 망소이의 난으로 이어졌고 봉기의 결과로 정부는 향·부곡·소를 일반 군과 현으로 승격시켰습니다. 이후 남부지역의 여러 봉기에 영향을 주었으니 전국으로 펴저 나간 봉기의 불씨는 훗날 만적의 난에까지 영향을 주었습니다. 

김사미 효심의 난

1182년(명종 12년) 전주사록 진대유(陳大有)와 상호장 이택민(李澤民) 등은 관선(官船)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사람을 괴롭혔습니다. 이에 보승·정용과 관노·승려가 합세하여 항쟁을 일으켰으며 이들은 하급장교들의 도움 아래 향리들의 집을 불태웠으며 이후 전라도 안찰사 박유보(朴惟甫)가 진대유를 처벌하고 봉기군을 설득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성문을 굳게 닫고 40일간 항쟁하였으며 그 뒤 정부의 이간책에 따라 내부의 분열이 일어나고 일품군(一品軍)의 대정(隊正)이 승려들과 함께 죽동 등 주동자 10여 명을 죽이면서 반란이 진압되었습니다. 정부는 잔당 30여 명을 수색해 죽이고 전주성을 허물며 이 민란은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명종 20년(1190)에는 경주에서 농민들이 난을 일으켰으며 3년 뒤에는 김사미가 이끄는 농민의 난은 효심과 연합하여 여러 고을을 공격했습니다. 이들이 정부군에게 대항하여 죽은 반란군이 7000명이라고 알려졌으니 실로 규모가 큰 항쟁이었습니다. 
최하층 노비계층들도 반란을 도모하였습니다. 만적은 고려시대의 노비였습니다. 그럼 고려시대 노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고려시대에는 복장으로 이들을 구별하려고 했는데 예를 들면 사노는 모자를 쓸 수 없다는 명령을 내렸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노(奴)는 요대를 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이도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12세기 초에 고려를 방문한 서긍은 신분 간에 복식의 구별이 없어 이를 이상하게 여길 정도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고려시대 노비는 여전히 차별받는 존재이긴 했으나 적어도 조선시대의 노비만큼 박탈당한 존재였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느 비부(婢夫)가 처의 주인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으나 유배형에 그쳤으며 주인의 범죄를 고발하는 노비도 있었으니 조선시대의 주종관계보다는 뭔가 풀린 느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같았으면 사형이었을 텐데 조선처럼 유교이념이 백성들의 일상도 철저하게 지배하지 않았던 탓에 저런 판결이 내려지게 아닌가 합니다.  
또한 고려는 이의민이 천한 신분에서 고려 최고의 집권자가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출생이 노비라 하더라도 바늘 구멍의 확률로라도 신분에서 벗어나 출세할 수 잇던 길은 열려있던 것입니다. 하지만 고려시대의 노비가 조선시대의 노비에 비해 덜 제약을 받았던 존재라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이들은 짐승보다 못한 대접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노비의 의한 반란이 총 10회 정도 기록되었으니 그들의 불만은 상당했다는 것입니다. 다만 조선시대 통틀어 단 1번의 노비들의 반란이 없었던 것은 당시 노비들의 반란을 모의할 수 없을 정도로 신분질서가 고착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인년(1170)과 계사년(1173) 이래로 높은 벼슬이 천한 노예에게서 많이 나왔으니 장수와 재상에 어찌 타고난 씨가 있겠는가?' - 고려사

만적의 난

이 말은 1198년 개경의 북산에 노비들이 모였을 때 외쳤을 노비들의 구호이자 봉기의 주요 목표였습니다. 이들의 목적은 바로 신분해방이었습니다. 이들은 궁궐로 쳐들어가 당시 최고 권력자인 최충헌을 죽이고 각자의 주인을 죽인 다음, 천민이라는 신분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만적과 이에 동의한 노비들은 ‘정(丁)’자가 적힌 누런 종이를 표식으로 삼았을 만큼 치밀한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하지만 막상 거사를 진행하기로 한 날에 모인 인원은 수백 명에 불과, 만적과 노비들은 이렇게 진행하면 실패할 것이라 여기고 후일을 기약합니다. 하지만 동료노비인 순정이 이 계획을 알리게 되었고 최충헌도 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만적 등 1백여 명이 체포되어 강물에 던져졌다.' - 고려사
만적의 난은 허망하게 끝나 버렸지만 그들이 노비라는 신분에서 해방하고자 했던 의미는 퇴색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우리나라 최초의 노비해방운동으로 기억되어 교과서에도 그 사건의 이름을 남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에는 신라부흥운동도 있었으니 “고려의 왕업이 거의 다 되었으니 신라가 반드시 부흥할 것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결국 이 항쟁도 수탈체제에 대한 불만이 주요원인이었으며 1217년에는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에서 고구려 부흥운동이 일어났으니 당시 고려사회의 모순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었으며 또한 백제 부흥운동도 일어났습니다. 최충헌정권은 이들을 강경진압하고 이 후 몽골의 침략이 이어지며 농민항쟁을 줄어들었으나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후 이들의 불만은 체제를 변화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으나 원간섭기의 개혁정책을 실시하면서 이들의 의견도 고려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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