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보다 권한이 컸던 고려의 향리

2022. 9. 5. 20:25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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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사회의 모습

고려의 초기는 숙청과 거란의 침입으로 상당히 어수선했습니다. 거란의 침입은 호족과 연합하여 만든 고려의 왕조가 중앙집권체제로 나아가는 데에 지체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고려초기의 향리의 위세를 보면 그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라는 나라가 건국되었을 때 수많은 호족세력이 도움을 주면서 이들 중 일부는 개국공신이나 중앙관료가 되면서 개경으로 이주했습니다. 하지만 지역에서만 힘쓰는 호족은 개경으로 이주하지 않고 그 지역에 머물면서 그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고려의 향리가 된 것입니다. 일례로 고려 8대 왕인 현종이 거란의 침략으로 개경을 버리고 피난길에 올랐을 때의 일입니다. 현종일행은 경기도 양주에 도착합니다. 이를 맞이한 이곳의 향리가 자신을 알아보겠느냐고 왕에게 묻습니다. 모르는 척하는 왕에게 향리는 화를 내며 하공진이란 신하가 군사를 데리고 온다고 소리쳤고 그 사람이 왜 오냐고 묻자 향리는 국왕의 측근 신하들을 잡으러 온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왕을 따라온 신하와 궁녀, 환관들을 그 자리를 벗어나 달아났습니다. 향리는 반란을 일으키려고 거짓말을 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향리는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그만큼 향리의 권한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현종은 강조의 변으로 왕위에 오른 인물로 양주의 향리는 이것이 마음에 안들었는지 아니면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당시는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곳이 많았고 따라서 지방 세력의 권한은 더욱 컸습니다.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만큼 이것은 고려에게는 커다란 숙제와도 같았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중앙에서 보낸 지방관을 원님이나 사또라 불렀습니다. 조선의 모든 고을에 사또나리가 있었고 신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럼 유독 고려만 모든 지방에 관리가 파견되지 않은 것은 의외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럼 고려시대에 지방관이 파견된 고을은 얼마나 될까요. 1018년을 기준으로 본다면 수령이 파견된 마을은 46개인데 반해 파견되지 않은 고을은 361개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파견되지 않은 마을은 향리라고 말하는 사람이 다스렸다고 합니다. 
고려에서는 지방관을 파견된 곳을 주현이라 하였으며 파견되지 않은 곳은 속현이라 불렀습니다.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이다 하더라도 이들은 독자적인 세력이 아닌 고려의 일부분입니다. 이들은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지만 수령이 있는 마을로부터 정령을 전달받아 세금을 거두거나 노역을 동원하였습니다. 향리하면 혹시 조선시대를 묘사한 TV시리즈를 보면 사또 옆에서 조언을 하는 이방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조선시대의 그들은 중인신분이고 고려시대의 향리는 엄연히 지배계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향리는 읍사를 구성하여 업무를 담당하였는데 고을 명칭에 따라 주사·군사·현사 등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를 운영하기 위해 나라에서 공해전이라는 것이 지급되었습니다. 공해전은 고려 이후 국가기관의 관청 및 왕실 ·궁원(宮院)의 경비조달을 위해 지급된 토지로 사실상 이들 향리들은 지금의 군청이나 시청소속 공무원이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구청이나 복지센터에서 서류를 띠면 직인이 찍혀있듯이 역시 이곳에서 공문서를 발행하였으며 그 효력을 나타내기 위해 관인을 찍었습니다. 지금처럼 예전에도 여러 문서들을 띠어주었던 것 같은데요. 예를 들면 재산에 대한 증명서라든가 아니면 호적 증명서 같은 거 말입니다. 이런 것을 발급하면서 도장을 찍어주었으니 현재의 국가기관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유력한 가문끼리 결혼하여 호장의 지위를 독점했다. 그리하여 한 고을에서 여러 명의 호장이 나오기도 했다.

이러한 읍사를 구성하는 향리 중에 호장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최고의 직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호장 아래에는 이를 보좌하는 부호장과 문서행정을 담당하는 호정과 재정업무를 담담하는 창정, 그리고 병사업무를 하는 병정 등 여러 향리가 고을의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조선시대의 사또처럼 생각하면 고려시대에는 향리는 하나의 고을에 한 명씩 있었을 것 같지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경주는 고려 이전에 신라의 도읍지였던 만큼 큰 도시였습니다. 이처럼 큰 고을에는 호장 8명을 포함하여 총 84명의 향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작은 고을이라 하더라도 1명의 호장이 아닌 3~4명의 호장이 있었습니다. 당시 호장이란 향리의 파워는 강했습니다. 호장과 부호장은 그 밑에 향리들과는 공복이 달랐으며 이러한 호장이 되기 위해 뇌물을 쓰기도 했다고 하니 호장이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인만큼 되기만 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출세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고려의 왕실이나 그를 둘러싼 권력층들을 보면 서로 혼인하여 가문의 힘을 더하는 데에 노력하잖아요. 결국 호장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유력한 집안끼리 결혼하여 호장을 독점하였으니 앞서 이야기했듯이 작은 고을이라 하더라도 1명의 호장이 아닌 여러 명의 호장이 나오는 것은 이러한 이유였습니다. 
그리하여 호장을 포함한 향리들은 세습직으로 지방의 행정을 맡았습니다. 따라서 세금을 걷고 때로는 감면해 주는 역할도 했습니다. 그리고 중앙정부에 세금을 바칠 때에도 이를 책임졌으며 전쟁이 나면 이를 지휘하는 역할, 그리고 기본적으로 지방의 관리인만큼 지방민들의 화합을 다지는 데에 앞장섰을 것입니다. 농업이 기반이었던 사회였던 만큼 농업을 권장하고 국가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재난을 당한 사람에게 구제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고려는 불교국가였으니 고을에서 절을 짓는 일을 할 수 있는데 이런 일에 사람들을 참여시키는 것도 향리가 주도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향리의 권한이 많고 중앙정부에서도 이들에게 일을 맡긴 만큼 이들의 모습을 면밀히 보아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려시대의 제도가 생긴 것이 바로 사심관 제도와 기인제도로 이를 통해 견제하고자 했습니다. 사심관제도는 고려시대 지방에 연고가 있는 고관에게 자기의 고장을 다스리도록 임명한 특수관직으로 태조 시기에 신라 경순왕이 경주지역의 사심관이 된 것이 최초였으며 기인제도를 통해 지방 호족 및 토호의 자제를 중앙에 볼모로 데려와 그 출신 지방의 행정에 고문 구실을 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향리들 중에는 중앙으로 진출하는 경우도 꽤나 있었습니다. 특히 이들의 자제들이 과거제도를 통하여 중앙정치계로 진출하는 사례가 많았는데 그 중에는 고려의 대표적인 문벌귀족으로 자리 잡은 경우로 김부식이 있으며 그의 조상은 경주 지역의 호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경주는 당시로서는 대도시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중소 도시의 향리는 어땠을까요. 중앙관직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대도시의 향리층보다 현저하게 적었고 향·부곡·소의 향리층들은 무인집권기 이전까지는 거의 배출하지 못했다가 고려 후기에도 조금 진출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향리의 전성시대는 쭉 이어나갈 수는 없었습니다. 무인집권기에 접어들며 이들의 위치에도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무신정변으로 수많은 문신들이 죽임을 당하자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향리의 상층부들이 중앙정치계로 진출한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신진관료가 향리출신인 셈입니다. 이후 원나라의 간섭이 심하던 시기에도 향리의 진출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전쟁을 통해서도 공을 세워 중앙진출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고려시대에 지방관이 파견된 주현보다 파견되지 않은 속현이 많았던 데에는 이들의 권한을 인정해주는 면도 있었지만 이들을 이용하여 향리의 주도 아래 자율적인 지방지배를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도 잘 되면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다시 고쳐야 합니다. 12세기 들어 농민의 반란이 줄지어 일어나고 농민의 유망이 늘어나자 정부에서는 ‘감무’라는 수령을 파견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효과를 거두자 확대해나갔으니 무신집권초기에는 절반이 넘는 속현에 감무가 파견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속현에 대한 인식도 바뀌어갔습니다. 독자적인 행정단위인 속현에서 주현의 일부로서의 속현으로 의미가 약해졌습니다. 이에 속현이 주현과 종속적인 관계에 놓이게 되자 주현은 세금은 속현에게 부담시키는 폐단도 일어났습니다. 이에 정부에서는 모든 고을에 관리를 파견하도록 노력한 것입니다. 결국 수령이 오면 그 역할이 겹치던 향리는 그 역할이 더욱 좁아지게 되고 고려말에는 행정직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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