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표불상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2022. 9. 4. 20:22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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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석조미륵보살입상

지난 2018년의 일입니다. 문화재청은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을 국보로 지정한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은진미륵이라고도 알려져 있는 문화재인데요. 파격적이고 대범한 미적 감각을 담고 있는 이 불상은 우리나라 불교 신왕과 조각사에 있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있는 점이 인정되어 국보로 지정된 것입니다. 
이 불상은 고려 4대 임금인 광종 대인 서기 968년에 만들기 시작하여 목종 9년인 1006년에 완성된 불상으로 높이가 자그마치 18.12m에 이릅니다. 하반신의 중간부분은 자연암을 그대로 조각하였고 그 위에 큰 바위를 올린 관음보살상입니다. 이 거대한 불상은 옛 조상의 문헌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그 큰 규모가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거대한 크기와 더불어 면류관을 쓰고 있어 독특한 외향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갓도 이중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큰 갓의 한 쪽 길이는 4m이고 작은 갓의 한 쪽 길이도 2m에 달합니다. 머리에서 갓과 그 사이에는 원래 많은 청동연화가 붙어 있었고 큰 갓과 작은 갓 사이에는 작은 금불상이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제 시기 일본인들이 훔쳐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는데요. 불상 미간에는 햇살을 받아 번쩍이는 천연 수정 옥호가 박혀 있었으나 떨어져 깨졌으며 이 깨진 수정옥호는 관촉사에서 보관해오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졌습니다. 불상 앞에는 불공 드리는 석조상탁자가 있으며 그 앞에는 석조미륵보살상과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석등이 있다고 합니다. 
이 불상에 대해서는 그 예술성에 대해서 과소평가되는 면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고려 이전 시대 신라의 석굴암같은 비례가 잘 맞는 불상을 보다가 이 거대하지만 언밸런스한 불상을 보게 되면 무언가 아쉬움이 느껴질 수 있습니다. 얼굴은 거대한데 몸에 비해 크고 얼굴 안에 있는 눈코입도 아주 큼직합니다. 마치 만화속 캐릭터 같다고 생각될 정도입니다. 입술 부위에 엷은 붉은 색이 남아 있다고 하는데 이러한 것은 석조불상에서 종종 확인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길게 늘어뜨린 귀의 장식과 음각을 통해 표현한 이중턱으로 인해 전체적으로 후덕한 이미지가 풍깁니다. 그리고 몸체에 비해 큰 손이 인상적인데 오른손으로 청동제 연꽃이 쥐고 있으며 옷은 몇 가닥의 선으로 주름을 표현하였습니다. 전체적으로 투박해 보이지만 해학과 친근함이 느껴지는 불상입니다. 뭔가 예술성보다는 크기에 초점을 맞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이 불상은 대담한 표현력과 조형미 그리고 거대함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엄 덕분에 고려 시기의 불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중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이 불상에 대해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절 아래에 노파가 쑥을 캐러 갔는데 큰 바위가 솟아올랐다고 합니다. 이 모습은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는데 당시 임금인 광종은 해명대사를 책임자로 정하고 인부 100명을 보내 미륵불을 조성할 것을 명했습니다. 당시 미륵불은 머리와 신체 상부와 하부를 따로 조각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 만들고 나니 너무 무거워서 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해명대사의 눈에 들어온 것은 두 동자가 흙장난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동자들은 부처를 세우자며 큰 돌 하나를 세우고 그 주변에 흙을 쌓아올렸습니다. 그리고 몸뚱이 부분을 굴려서 위로 올린다음 흙을 퍼내었습니다. 해명대사가 이것을 보고 이거다 싶어서 손뼉을 치는 순간 탑쌓기를 했던 두 동자가 사라졌습니다. 해명대사는 두 동자의 흙쌓는 놀이에 착안하여 미륵불을 세웠습니다. 사람들은 당시 해명대사에게 지혜를 알려준 두 동자를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화신이라고 여겼습니다. 이후 거란이 고려를 침입한 적이 있었습니다. 거란족은 고려군에 패하여 달아나던 중에 압록강에 다다르게 되는데요. 그때 한 스님이 가볍게 강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거란군은 따라 건넜는데 사실 그 강은 깊은 강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거란군들이 몰살당합니다. 이에 화가 난 거란족의 장수는 그 스님을 잡아다가 칼로 내려쳤습니다. 그 순간 스님은 사라지고 스님이 썼던 한 쪽 갓만 떨어져 남게 되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충남 부여에 있는 은진 미륵의 갓 한 쪽도 떨어져 나갔다고 합니다. 은진미륵은 고려를 지키기 위해 잠시 스님으로 변하여 압록강변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떨어져 나간 부분은 조선 숙종 대에 다시 붙였다고 합니다. 

논산석조미륵보살입상

그러면 이와 같이 거대한 석조불상이 생겨날 수 있던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요. 일단 이러한 거대석조불상의 제작은 고려 불상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도 그 중 하나로 앞에서 이야기했다시피 앞선 시대에 비해 표현력이나 수준에 있어 떨어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당대 유행하던 선종의 유행과 관련지어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참선으로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부처의 성질을 깨우고 깨달음을 얻는 선종 입장에서는 불상제작에 예술성을 가미하고 완벽을 추구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수행에 무게를 두었고 그에 따라 완벽한 모습의 불상 제작에는 소홀함을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하나 궁금한 것이 생깁니다. 전 시대에 비해 떨어진 표현력으로 불상을 만들었다면 만드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었을 텐데 왜 거대하게 만들었을까요. 확실한 건 알 길이 없지만 관촉사 미륵보살입상을 만들기 시작한 때는 고려 광종 시기로 아직 건국 초기에 해당한 때였습니다. 광종은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펼쳤는데 그러한 정책 중에 호족을 숙청하는 작업도 있었습니다. 한편 이러한 강압책과 더불어 민심을 수습하는 방법으로 불상을 세우고 민심을 하나로 모으려고 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유화정책에 동반하여 고려왕실의 위엄을 보여줄 만한 불상이 필요했습니다. 그러한 것은 바로 거대한 불상의 건립으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특히 이 불상이 세워진 충청남도 옛 후백제 지역입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거대한 불상인 충청남도 부여군에 있는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충청남도 당진군 안국사지 석불입상도 그런 의미에서 세워진 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훈요 10조를 보면 제 8조는 “차령 이남의 지방은 산세가 거꾸로 달려 역모의 기상을 품고있으니 결코 그 지역 사람을 중히 쓰지 말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것은 지역을 차별하려는 의도라기보다는 후백제의 잔존세력이라던가 청주일대의 세력에 대해 경계하라는 지침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거대불상 조성을 통해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잡게 하고 호족들에게는 고려왕실의 위엄을 보여 주려한 통치권자의 의도가 엿보이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러한 불상들이 면류관을 쓰고 있는데 이러한 모습의 불상의 등장은 고려광종 시기 이후라고 합니다. 면류관은 황제들이 쓰는 것인데 당시 고려왕은 자신을 황제라 칭하며 황제국 체제를 표방하고 있던 터였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왕의 위엄을 차리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광종의 아버지인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기 위해 수많은 호족을 장인으로 두었으며 3200여 명에 달하는 개국공신들은 건국 초기 왕권을 든든히 하는 데에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광종이 노비안검법을 발표하고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왕권에 반할 수 있는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관촉사 미륵보살입상에는 황즉불사상이 투영되어 보는 이들을 압도하며 고려왕의 위대함을 알리는 역할도 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이 거대한 불상을 완공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37년, 엄청난 크기의 화강암을 재료로 하여 조각하고 조립하여 세우는 과정은 1000여 년 전에 있었던 사업입니다. 이렇게 만든 불상의 시야에 멀리 백제의 마지막 격전지 황산벌이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만약에 민심을 수습하고 왕에게 복종을 요구하기 위해 이 불상을 세웠다면 그 의도는 통했을까요. 우리나라에 수많은 불상과 조각상이 있지만 그 모습으로 인해 한 번 보면 잊히지 않는 작품은 손에 꼽을 것이고 관촉사 미륵보살입상은 그 중 하나일 것입니다. 이 관촉사 미륵보살입상은 못생기고 투박한 조각상이 아니라 우리 역사 통틀어 가장 강렬한 인상을 가진 불상으로 그 예술성을 인정받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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