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역사와 아름다운 건축철학이 담긴 창덕궁

2022. 10. 9. 20:35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728x90

창덕궁

1392년 조선이 건국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나라에서나 그렇듯 건국 초기에는 혼란이 있었고 조선도 그러했습니다. 조선의 건국자는 이성계로 그에게는 총 8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조선은 이성계가 신진사대부의 도움을 받아 세운 왕조로서 유교적 이상 국가를 만들자는 뜻을 함께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추진의 원동력으로 정도전을 활용하였습니다. 정도전이 꿈꾸는 왕조는 유교적 가치인 仁을 싥현하고자 하였으며 그것은 능력이 뛰어난 재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른바 영국에서 후에 실현한 입헌군주제의 모습이라면 지나친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감찰(사헌부)의 탄핵권을 강조하고 간관(뒷날 사간원)의 권리를 국왕과 비슷하게 두어 이른바 재상 정치를 실현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태조 이성계는 둘째 부인에게서 나온 방석을 세자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방석을 교육한 것은 정도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정몽주를 제거하는 등 조선 건국에 공을 세운 이방원이 이에 불만을 느꼈고 그는 군사를 일으켜 세자 방석과 방번을 제거하니 이게 1차 왕자의 난이고 둘째 형 방과를 왕위에 오르게 하니 정종이었습니다. 
정종은 형제끼리 싸운 현장인  한양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도읍을 송도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 사이 방간이 왕이 되겠다고 난을 일으켰다가 방원에게 제압당합니다. 이른바 2차 왕자의 난입니다. 마음이 여린 정종은 왕권에 미련을 두지 않았고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습니다. 방원은 왕이 되었으니 바로 태종입니다. 그리고 태종이 한양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형제끼리 부딪혔던 경복궁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썩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새로울 궁궐은 짓게 되니 그것이 바로 1405년에 완성된 창덕궁입니다. 이렇게 지어진 창덕궁은 1997년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창덕궁이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된 내용은 이러합니다. 
‘일정한 시간에 걸쳐 혹은 한 문화권 내에서의 건축, 기념물 조각, 정원 및 조경 디자인, 관련 예술 또는 인간 정주 등의 결과로서 일어난 발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태종은 한양으로 돌아오면서 지은 창덕궁은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의지인 동시에 고려왕조를 뒤로 하고 조선의 왕조의 본격적 출발을 알리는 구심점이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지어진 창덕궁이기에 애초에 지어진 경복궁보다 비중 있는 궁궐로서 역할을 하였고 게다가 왕자의 난이 있던 경복궁은 이미지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태종은 거의 대부분은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에서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경복궁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면 궁궐을 없앴을 수도 있었지만 그대로 남겨둔 걸 보면 태종은 이미 궁궐을 더 만들 생각을 가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창덕궁 부용지

 이렇게 지어진 창덕궁은 역대 조선 왕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경복궁은 즉위식 같은 국가의 주요 행사를 치를 때 혹은 외국 사신을 접대하고 과거 시험을 치를 때, 혹은 전염병이 돌아 창덕궁을 벗어나야 할 때에만 이용되었고 대부분의 생활은 창덕궁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경복궁에 대한 불길한 기운 때문에 기거하는 것을 기피하기도 했지만 주변에 산자락에 가려져 있어 평지에 있는 경복궁에 비해 사생활 노출을 피할 수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창덕궁이 더 편안하게 느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1592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여러 궁궐이 소실되었습니다. 그리고 선조 말에 창덕궁은 재건되기 시작했습니다. 경복궁보다 창덕궁이 먼저 재건된 것인데요. 이에 대한 이유는 위에서언급했다시피 왕자의 난으로 인해 안좋은 곳이라는 인식이 있었고 창덕궁은 경복궁보다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피폐해진 나라의 살림과 어려웠던 백성들의 삶을 생각한다면 창덕궁의 재건이 더 쉬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경복궁은 재건은 후에 흥선대원군 대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사실상 창덕궁에서 조선왕조의 역사가 이루어져 온 것입니다. 
하지만 창덕궁은 1623년 인조반정 당시 크게 소실되었습니다. 인조반정군이 광해군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불을 냈다고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이괄의 난으로 인해 창덕궁과 창경궁이 다시 소실되는 수난을 겪었고 인조 25년인 1647년에 이르러 복구되었습니다. 그리고 연산군과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순조, 철종, 고종이 왕위에 오른 곳으로 그 역할이 컸던 곳이었습니다.

창덕궁 관물헌

 그러던 1884년에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청나라군사들이 에워싸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 창덕궁의 관물헌에는 급진개화파와 고종이 있었습니다. 급진개화파는 일본의 세력을 빌려 조선의 개화를 시도하려 했던 김옥균과 서광범, 박영효, 홍영식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창덕궁은 급진개화파가 청나라에 의해 허무하게 끝난 3일 천하를 품은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09년 8월 22일 창덕궁 대조전 흥복헌에서 조선의 순종은 대신들에게 둘러싸였습니다. 그들은 순종에게 일본이 미리 만들어놓은 한일병합조약에 서명을 요구하며 협박한 것입니다. 순종이 동의하지 않자 이완용이 나섰고 하지만 순종의 옥새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를 듣고 있던 황후가 치마 속에 감추고 있었습니다. 결국 황후의 숙부 윤덕영이 빼앗았고 이것으로 조선이 막을 내리니 창덕궁은 조선의 마지막을 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일제시기에는 우리문화재에 대한 비상식적인 행위가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1917년 11월 11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큰 불이 났습니다. 삽시간에 번진 큰 불에 왕이 정사를 보던 희정당 역시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희정당은 1496년 연산군 때에 숭문당이라는 건물이 소실되자 이름을 바꾸면서 재건한 건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제는 경복궁에 있던 건물들을 해체하여 그 자재들로 희정당을 복원에 사용하였습니다. 본래 5칸이던 희정당이 11칸으로 느는 대신 희정당이란 말이 무색하게 서양식으로 바뀌고 자동차를 위한 현관까지 만들었습니다. 
창덕궁 자체가 아직까지 살아 숨쉬는 조선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지만 그 생김 또한 우리 민족과 닮아 있는 곳이라 생각이 듭니다. 경복궁은 평지에 지어져 좌우대칭을 맞춘 궁궐이라면 창덕궁은 산자락에 지어친 비대칭 궁궐입니다. 주변 자연환경과의 자연스러운 조화와 배치는 조선시대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조상들의 건축 세계관을 보여주는 궁궐이 바로 창덕궁입니다. 그리고 조선시대 모든 궁궐에는 임금만을 위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후원이 있었는데 창덕궁만이 그 흔적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경복궁 후원에는 청와대가 들어섰고 덕수궁은 후원 자리에는 서울광장이 자리한 것입다. 경복궁 후원과 덕수궁 후원을 볼 수 없어 아쉽지만 그 중 가장 아름다웠다는 창덕궁의 후원이라도 남아 있어 다행입니다. 이 아름다운 후원은 창덕궁이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될 때 공로가 컸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창덕궁 후원은 삼면으로 산으로 둘러싸인 인공 연못인 부용지가 있으며 근처에는 우주와 하나가 된다는 의미를 지닌 주합루가 있고 아래에는 정조가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만든 규장각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후원의 규장각은 정조의 즉위 첫 해인 1776년에 만든 곳으로 1781년에는 그 위치를 이전하여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 근처에 세워졌습니다. 이 규장각은 정조정치의 핵심적인 기관으로 처음에는 학술 및 정책연구기관으로 시작되었지만 곧 친위세력 집결지로 정조 정치의 지지기반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정조가 승하하면서 그 기능이 쇠퇴하였고 연구도서관리 기능으로 유지되었습니다. 
조선시대의 창덕궁은 지금보다 더한 위용을 자랑하는 궁궐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창덕궁은 조상의 건축철학이 고스란히 담긴 건축물입니다. 자연과의 조화를 생각하여 지은 창덕궁이라는 것입니다. 인위적인 것의 사용을 최소화하고 바위와 바람, 흙을 그대로 품은 궁궐로 규모가 작아보일지 몰라도 세계의 여느 궁전만큼이나 가치를 가질 수 있는 아름다운 궁궐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