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과학의 선진국 조선의 측우기

2022. 10. 12. 20:4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728x90

조선 세종 대에는 많은 과학발명이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과학은 역대 우리나라 왕조 중 가장 빛나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 중에서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가 달리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측우기입니다. 측우기는 말 그대로 비의 양을 재는 기구로 당시 농업이 사회의 근본이던 조선사회에서 날씨는 무척 중요했습니다. 따라서 비가 언제 오는지도 중요했을 것입니다. 비가 너무 많이 오거나 가뭄이 들면 농업에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었기에 비의 양을 예측하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입니다. 
그럼 측우기 전에도 비의 양을 재긴 했을까. 비가 오는 양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은 기록에서는 세종의 아들 문종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땅을 파서 물기가 있는 곳까지 재어보았습니다. 이는 측우기가 발명되기 전까지 쓰던 방법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토양의 성질에 따라 기록이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더욱 정확하게 잴 수 있는 관측기구인 측우기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근년 이래로 세자가 가뭄을 근심해 비가 올 때마다 젖어 들어간 푼수(分數)를 땅을 파고 보았다. 그러나 정확하게 비가 온 푼수를 알지 못하였으므로 구리를 부어 그릇을 만들고는 궁중에 두어 빗물이 그릇에 고인 푼수를 실험했는데…… ’-세종실록-
  조선실록에서는 세종의 아들 문종이 그릇을 만들어 비의 양을 재자는 아이디어를 제공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문종의 이러한 생각을 실천에 옮긴 것은 당대 최고의 과학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마 그것은 장영실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기록에는 측우기와 관련된 장영실의 내용은 찾을 수 없으며 확실한 것은 문종이 측우기에 대한 제안을 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조선은 농업사회였고 그 이전에도 농업은 중요한 산업이었습니다. 따라서 왕조의 통치자인 왕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특히 농업과 관련한 기상현상에 대해 왕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 신경을 썼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옛 선조들은 가뭄을 귀신의 조화로 여겼으며 가뭄을 맡고 있는 귀신을 달래기 위해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임금이 주재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을 정도면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기우제를 왕이 직접 나서서 지내야 했던 것은 천지지변을 초래한 장본인으로 왕으로 간주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조선보다 훨씬 이전 국가인 부여에서는 가뭄의 책임을 물어 왕을 죽이기까지 했으니 측우기의 발명은 비의 양을 재보자는 호기심 아닌 나라를 제대로 운영하기 위한 절박한 움직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조선 세종의 시기에는 땅의 비옥도에 따라 6등급, 그리고 수확량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고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호조에서 했습니다. 다른 관측기구들은 관상감이라는 조선의 천문학기구에서 만들었는데 측우기는 호조에서 만든 이유는 아마 세금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농업의 생산량 그리고 땅의 비옥도는 비의 양과 밀접한 관련을 맺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정확한 비의 양을 아는 것은 세금은 거두는 호조에서 중요한 자료였을 것입니다. 호조는 측우기를 바탕으로 한 비의 양을 가지고 가뭄이 들었거나 홍수가 들었을 때 그리고 그 정도를 파악하여 세금을 거두는 데 데이터로 활용하고 때로는 세금을 감면하는데 활용했을 것입니다. 아마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다른 과학기구와는 달리 축우기만은 호조에서 제작한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문종이 제안한 측우기는 너비가 16.8cm, 높이가 42cm 정도 되었고 이를 개량하여 1년 후에 만든 측우기는 너비 15cm, 높이 32cm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측우기의 크기를 정할 필요가 있었을까. 만약에 크다고 하면 증발하는 부분이 많아질 수 있고 용기자체 만드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리고 비의 양이 적으며 입구가 이에 비해 넓으면 측정오차가 커지고 좁을 경우 바람이 불 때 빗물을 받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그리고 원통형인 모양도 당시 실험을 거듭하여 고안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항아리처럼 생기거나 네모모양이라면 비가 오는 방향에 따라 빗물이 담기는 물의 양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통의 모양은 어느 방향에서든지 일정한 양을 담을 수가 있습니다. 현재 세계기상기구에서 표준으로 정한 우량계입구의 너비가 13~20cm라고 합니다. 이렇게 규격을 정한 이유는 정확한 강우량 측정을 위한 것인데 당시 측우기의 너비는 현대의 표준규격에 맞는 사이즈였습니다. 그러니까 조선시대의 측우기는 단순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실험을 거듭한 끝에 내린 고안한 기구입니다. 

  그리고 비가 내리면 내린 시각, 비가 그친 시간, 그리고 비가 내린 양을 기록하였으며 측우기의 담긴 물의 깊이를 자, 차, 푼까지 기록하도록 하였습니다. 푼은 지금으로 따지면 2mm정도입니다. 이렇게 잰 비의 양을 기록한 것이 200여 년 동안의 관측 자료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서울 지역의 기록만 남아있기는 하지만 이게 엄청 대단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지 측우기를 만들었다가 아닌 활용하기에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비의 양을 재는 것이 무엇이 그리 대단할까 생각할 수 있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하면 생각보다 역사적인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단 비의 양을 정확히 잰다는 생각 자체가 과학으로서 한 단계 앞서가는 일입니다. 단순히 어느 달은 많이 오고 어느 달을 적게 오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바꿔 이야기한다면 야구에서 어떤 타자가 더 공을 잘 치고 홈런을 많이 치는지는 그 사람의 체형이나 타격폼 그리고 경기 모습만 가지고도 대략 알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타자들에 대한 정확한 데이터 즉, 그러니까 타자들의 홈런갯수라던가 타율, 장타율, 출루율을 따져 본다면 누가 더 좋은 기록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유형의 타자인지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측우기는 바로 후자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선시대 때 만든 측우기는 국제 규격에 적합한 사이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고 이것에 대한 관측기록도 있으니 우리는 이미 500여 년 전에 정확한 규격을 가진 우량계를 세계 최초로 만들어 지속적으로 관측기록을 남긴 것입니다. 측우기의 발명도 대단하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를 계속 활용했다는 것에 의의를 둘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은 이러한 측우기를 자신들이 처음 발명했다며 주장하며 현재 남아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측우기인 1770년에 제작된 우리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이유는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측우기에 ‘건륭 경인년 5월에 만들다’라는 문장 때문입니다. 여기에 ‘건륭’이라는 말에 집착하여 이러한 주장을 펼친 것으로 당시 조선에서는 별도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였으므로 중국의 이러한 주장은 말도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중국 측 어떤 기록에서도 ‘측우기’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으며 중국과학사에서 사용되는 ‘우량기’라는 장치도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중국의 연호를 사용했다고 해서 측우기를 중국이 발명했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주장이며 18세기에 들어서도 전세계에서 조선에서만 측우기를 제작, 사용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측우기를 통해 비의 양을 측정했는데 이와 더불어 강물의 높이를 재는 일도 측우기를 만든 시점인 세종 대에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수표를 통한 강물 높이 측정은 완벽한 강우량의 측정을 하기 위한 것으로 이도 세계최초의 일입니다. 그리고 기상관측에 대한 관심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바람의 세기와 방향 관측을 위해 설치한 풍기대로 창경궁과 경복궁에 남아 있습니다. 화강암을 다듬어 상을 조각한 대를 놓고 구름무늬를 새긴 8각기둥을 세운 모습으로 조선 궁궐 조감도인 동궐도를 보면 풍기대에 대나무 깃발이 꽂혀 있으며 깃발이 나부끼는 정도와 방향으로 풍속, 풍향을 측정했다고 합니다. 풍향은 24방향으로 표시하고 풍속은 그 강도에 따라 8단계 정도로 분류했습니다. 이는 조선시대에 바람을 측정했다는 실증적 자료로서 측우기, 수표, 풍기대는 당시 조선이 기상관측에 있어 선구자적인 위치에 있었음을 알려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