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1호의 마음고생을 덜어낸 숭례문의 역사
2022. 10. 11. 20:41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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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1년 들려온 소식입니다. 앞으로 문화재에 ‘국보 1호’ 혹은 ‘보물 1호’라는 명칭 대신 국보와 보물로 불리게 된다고 합니다. 문화재의 가치에 순위를 매기듯 한 번호를 없애기 위함도 있고 게다가 문화재에 번호를 매기는 것은 일제의 잔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국보 제 1호로 불린 것은 바로 숭례문이었습니다. 이것은 태조 이성계가 한양도성을 쌓으면서 정문으로 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숭례문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었습니다. 그러던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우리나라 문화재를 관리하기 위해 편의적으로 160여 개의 문화재마다 번호를 매겼고 숭례문을 1호로 정했습니다. 당시 일본에게는 조선이 식민지였으므로 보물로 지정하면서 번호를 매긴 것인데 해방되면서 우리 문화재가 국보와 보물로 나누어 관리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번호를 붙여 사용하였습니다. 사실 문화재마다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일인데 편의상 매긴 번호가 마치 우리나라 제일가는 것이라는 인상을 주기 쉬웠고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사실 90년대 중반에 국보에 관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바로 국보1호를 교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국보 1호라는 것은 그 나라를 상징하는 것인데 숭례문은 약하다라는 것입니다.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고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알릴 수 있는 문화재여야 한다며 교체를 주장한 것입니다. 당시 문화재청은 국보 앞에 부여된 번호는 관리번호일 뿐, 우열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며 설문조사 결과 반대의 목소리가 높아 숭례문을 국보 1호의 수식어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러던 2005년 이 문제가 다시 떠올랐고 그러면서 새로운 국보 1호로 훈민정음으로 해야 한다는 당시 문화재청장의 발언이 논란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바뀌지 않았습니다. 이 후 2021년 문화재 앞에 번호를 빼고 국보와 보물이라는 단어만을 사용하면서 국보 1호 교체에 대한 논란을 일단락되었습니다.
이러한 숭례문은 조선 태조 4년인 1395년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에 완성한 한양도성의 정문입니다. 한양도성이란 전체 길이가 18.627km로 현존하는 세계 수도의 성곽 유산 중 가장 규모가 큽니다. 그리고 현재는 12.845에 이르는 구간이 원형 또는 복원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한양도성은 북악산과 낙산, 남산과 내사산의 능선을 따라 성곽을 축조했으며 동시에 4대문인 흥인지문과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을 두었고 혜화문, 소의문, 과희문, 창의문이라는 4소문을 두었습니다. 자연을 허물지 않고 지형에 따라 지은 한양도성은 도심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며 현재는 사적으로 지정되어 서울이 품고 있는 문화재로 숭례문은 한양도성과 함께 수도 한양과 서울을 지켜온 것입니다.
한 때는 숭례문은 남대문으로 사람들에게 더 많이 알려졌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각각 보물1호와 보물 2호로 삼았는데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쳐들어왔을 때 가토는 숭례문으로 고니시는 흥인지문으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한 때 이러한 남대문과 동대문의 명칭에 대하여 왜색논란이 일었습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점령하면서 세운 조선총독부가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의 이름을 마음대로 바꾸었고 따라서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방위에 따라 각각 남대문과 동대문으로 명명했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일제강점기가 들어서기 전부터 세속에서는 남대문과 동대문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지정명칭은 숭례문과 흥인지문이지만 사람들은 편히 남대문과 동대문으로 부른 것입니다. 태조실록을 비롯한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남대문과 동대문이란 이름이 많이 나온 것으로 이미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명칭이 널리 통용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일제가 1934년 최초로 문화재를 지정하면서 보물 제1호를 경성남대문으로 지정하고 보물 제 2호는 경성동대문으로 지정하였고 이후 1962년 서울남대문을 국보 제1호로, 1963년 서울 동대문은 보물 제 1호로 재지정되면서 그 명칭을 가지고 90년대 중반까지 끌고 왔습니다. 그러니까 일제가 우리 문화재를 지정하면서 남대문과 동대문을 지정명칭으로 사용했고 90년대 중반에는 이를 바로 잡아 원래의 명칭으로 되찾은 것이며 90년대 중반 당시 문화재위원회에서도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표기할 때 지정 명칭 뒤에 ()속에 남대문과 동대문을 표기해도 무관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면 숭례문은 어찌하여 그런 이름을 얻었을까. 조선 때 태조는 도성과 8개의 문이 완성될 즈음에 문의 이름을 지어야 했습니다. 사실 조선은 고려의 개경에서부터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풍수적인 요건을 따졌습니다. 4대문에도 그러한 것이 적용되었습니다. 당시 이 문의 앞을 막고 있는 것이 관악산이었는데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인왕산, 낙산, 남산에 비해 산세가 높고 험해 불의 기운이 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인 숭(崇)자와 오행에서 불을 상징하는 례(禮)를 붙여 숭례문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두 글자를 수직으로 세워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관악산의 뜨거운 기운을 다스리기 위해 이른바 맞불을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숭례문의 현판을 쓴 것은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이 쓴 것으로 전해집니다. 한편 세종의 셋째 아들인 명필가 안평대군이 썼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 현판의 글씨는 추사 김정희도 감탄했다는 명필이라고 합니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그러면서 숭례문의 현판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숭례문이라는 글씨를 다시 써서 달았지만 현판을 걸기만 하면 떨어졌습니다. 그러는 사이 이상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밤이 되면 숭례문 밖에 있는 개울에서 빛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소문에 해당 웅덩이를 파보았는데 거기서 예전에 걸린 현판이 묻혀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현판을 다시 걸었더니 떨어지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숭례문이 임진왜란 때 살아남은 것은 안타까운 역사가 숨어 있었습니다. 앞에서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장수 가토가 이끄는 부대가 숭례문을 통과했고 이를 기념하여 헐지 않았다고 합니다.
1899년 서울시내에 전차노선공사를 통해 개통되면서 흥인지문과 돈의문 주변이 헐렸고 1907년에는 일본 황태자 요시히토가 서울을 방문했는데 비루한 문을 통과할 수 없다고 문의 좌우를 헐었습니다. 그리고 이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훼손이 더 심해져갔습니다. 1920년대에는 남산에 조선 신궁을 세우고는 이곳으로 지나는 길을 낸다며 숭례문의 동쪽 성벽을 허물었고 근대화를 거치면서 주변의 성곽은 무너져갔습니다. 그러다 2008년 설날의 마지막 연휴의 저녁에 발생했던 일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토지보상에 품은 불만을 품은 한 노인이 저지른 방화라 더욱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습니다.
숭례문은 1398년에 건립되어 그 자리를 지켜온 조선을 대표하는 건축물입니다. 당당하면서도 절제와 균형의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어 새로 들어선 왕조 조선의 위엄을 나타내는 역사적인 현장입니다. 그리고 이 숭례문이 국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동안 국보 1호 자격 논란이 있었습니다.국보 뒤에 번호를 없애면서 일단락되기는 했습니다만 숭례문과 다른 문화재를 비교하며 1호에 대한 자격을 논했던 것을 생각하면 숭례문 전소사건만큼 안타까운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화재는 국보이든 보물이든 사적이든 명승지든 간에 모두가 가치 있는 것이므로 우열을 가리는 게 어쩌면 의미없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만약 국보 1호인 숭례문보다 이 문화재가 더 국보1호로 적합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그 문화재가 숭례문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소리로 들릴 수 있습니다. 이제 1호를 떨궈낸 숭례문에게 그러한 논란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울을 상징하는 조선시대의 건축물로 우리 곁에 항상 있을 것입니다. 술먹고 방화를 마음먹은 사람이 숭례문을 접근하는 것을 방치하는 누를 범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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