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뜻을 알리기 위한 천상열차분야지도

2022. 10. 10. 20:38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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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열차분야지도

조선왕조는 1392년 세워진 나라였습니다. 고려말 장수였던 이성계는 왕명을 거역하고 위화도부근에서 회군을 감행합니다. 그 길로 개경으로 향한 이성계는 무력으로 권력을 탈취하고 1392년 7월 17일 이성계는 개경의 수창궁에서 공양왕으로부터 선위를 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오릅니다. 바로 조선의 개국을 알린 것입니다. 고려의 반역자가 한 나라의 국왕으로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성계는 조선보다 대국인 명나라로부터 ‘조선’이라는 국호를 받았고 ‘조선국왕’이라는 작위를 얻어내었습니다. 신진사대부의 지지가 있었지만 이들에 반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태조 이성계는 조선의 개국이 하늘이 뜻임을 백성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한 사람이 이성계에게 고구려의 천문도를 받칩니다. 고구려의 천문도는 멸망당시 대동강에 빠진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다행히 탁본이 남아 있던 것입니다. 하지만 고구려가 망한 뒤, 600여 년이 지난 뒤였으니 고구려 때 바라본 밤하늘과 조선 때 바라본 밤하늘은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천문, 역수, 측후, 각루 등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으로 서운관이 있었는데 이 곳의 천문학자인 류방택, 권근 등에게 고구려 천문도를 주어 이를 기초로 별들의 위치를 다시 추적, 돌에 별을 새기게 하니 개수는 147개로 그 이름은 천상열차분야지도였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만들어 조선왕조의 당위성과 그 위엄을 알리려 했던 것입니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조선태조 4년에 만들어졌으며 높이 2.01m, 폭 1.23m, 두께 10cm의 돌에 새긴 천문도입니다. 그러니까 별자리를 그린 지도라 생각해서 종이에 그렸겠거니 생각할 수 있지만 돌에 새긴 것이었습니다. 검은 대리석에 거대한 원을 그리고 그 안에 별자리를 새겨 넣었습니다. 원의 중심에는 북극이 있고 바깥쪽 작은 원이 있으며 큰 원과 작은 원 사이에는 적도와 황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해와 달, 그리고 24절기 별자리에 대한 기록들이 들어 있습니다. 특히 북반구에서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별자리가 그려져 있어 놀라움을 주고 있습니다. 
태조 때 만든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시간이 지남이 따라 마모될 수밖에 없었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그 훼손이 심각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숙종 때 원본을 보존하기 위해 똑같은 모양의 천문도를 다시 새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1687년에 제작된 숙종 복각본이며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영조 때에는 관상감 내에 흠경각을 지어 두 각석을 함께 보관하였습니다. 
그런 천상열차분야지도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천상’은 하늘에 있는 모든 별과 천문현상을, ’열차‘는 하늘을 12개 구역으로 나누어 차례로 배열해 놓은 것을 의미합니다. ’분야‘는 하늘의 별자리를 땅의 각 영역과 대응해서 놓았다는 것이고 ’지도‘는 평면적으로 그린 지도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는 현재 남아있는 것 중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석각천문도로 중국의 석각 천문도에는 없는 종대부라는 별자리가 있으며 천상열차분야지도에는 밝은 별은 크게, 희미한 별은 작게 그려 중국의 천문도와는 다른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천상열차분야지도가 중국의 것을 모방하지 않고 독자적인 관측과 기술에 의해 제작되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천문도에 비해 정확하니 당시 선조들의 수준 높은 과학기술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으며 2900여 한자의 글자체도 매우 정교해 예술적인 측면에서도 인정받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상열차 분야지도는 만워권 지폐 뒷면에서 그려져 있다.

  그럼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당시 선조들의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선조들은 하늘에도 왕이 사는 곳이 있고 관청과 백성들이 사는 곳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천상열차분야지도에는 가장 가운데 동그란 원이 있는데 이는 왕궁인 자미원, 그 바깥 부분은 관청지대인 태미원, 그 다음 원이 일반 백성들이 사는 천시원이라고 불렀습니다. 자미원에는 사계절 언제라도 볼 수 있는 북극성, 카시오페이아 같은 별들이 있고 태미원에는 비교적 자주 보이는 별들이, 그리고 천시원에는 1년 내내 보이지는 않지만 어느 때인가 볼 수 있는 별들을 그려넣었습니다. 잘 보이는 별들과 보이지 않는 별들을 당시 신분사회에 맞추어 해석한 것입니다. 이는 하늘의 질서가 곧 땅의 질서로 이어진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고 안에서 바깥으로 뻗어나가는 선이 있는데 이는 28수를 의미하는 것이며 간격이 일정하지 않은 것은 그 중 가장 빛나는 별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열차는 가장 바깥쪽 테두리에 있는 12개의 선을 말하며 하늘의 별자리를 목성의 위치에 따라 12차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대응하는 구획된 땅을 말하는 분야는 중국을 중심으로 천하의 땅덩어리를 12등분해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는 동방 7수의 마지막 두 별자리인 미수와 기수, 북방 7수의 첫 별자리의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황도와 적도, 견우별, 직녀별 그리고 은하수를 포함하여 290여 개의 별자리, 1460여개의 별이 새겨져 있는 천문도로 이 석각 천문도는 앞서이야기한 것처럼 중국의 '순우천문도'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됐으며, 별빛의 세기에 따라 별의 크기를 표현한 유일한 천문도라고 합니다. 또한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고구려 천문도를 바탕으로 했으므로 순우천문도보다 800여 년 앞선 하늘의 별자리를 그린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조선왕조가 몰락하고 일제식민통치가 시작되자 수난을 겪기 시작합니다. 제대로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시기에 창경궁은 창경원으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황제자리에서 물러난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식물원을 만들고 놀이기구를 배치시켰으나 실제로는 일본식 궁원으로 탈바꿈시켜 조선의 흔적을 없애고 궁궐로서 가지는 지위를 없애려고 하는 일본의 의도였습니다.  그리고 이 공원에 사람들의 발에 차이기도 하고 놀다가 쉬어가는 의자역할을 한 게 바로 ‘천상열차분야지도’였습니다. 이 석각천문도를 알아본 것은 1910년대에서 30년대 사이에 평양 숭실학교에서 근무한 WC 루퍼스란 사람으로 1936년 [한국천문학]이란 책을 통해 ‘동양의 천문관이 집약된 섬세하고 정확한 천문도’라고 극찬하였습니다. 이렇게 천문도는 다시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다가 1960년에 창경궁 풀밭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조선 초기에 천문도 제작에 열을 올렸던 이유는 새로운 왕조 개국의 정당성에 부여하기 위함만이었을까요. 당시 선조들은 별들의 움직임을 아는 것은 하늘의 뜻을 아는 것과 같다고 여겼습니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거라고 예언한 최지몽이란 사람은 객성(유성)이 자미성(북극)을 침범하였음을 관측, 당시고려 왕 정종에게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 숙위군을 강화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것을 당부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왕승이 반란을 일으켰고 정종은 이를 진압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라에서는 첨성대를 지어 별자리를 관측하였으며 고구려의 고분벽화에도 별자리가 그려져 옛 선조들은 별자리의 움직임과 그 의미에 큰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이러한 별자리는 우리나라에서 발견되는 고인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천상열차분야지도처럼 많은 별은 그릴 수 없지만 밝은 별을 위주로 그린 것이었습니다. 당시 선사시대 사람들은 왜 고인돌에 영원의 별자리를 새겼을까요. 이에 대해서 사람들은 죽은 이의 영혼이 영원히 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그리고 별의 움직임과 농업이 관련이 있으므로 풍요를 기원, 그리고 지배자의 권위를 나타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인돌을 쌓아올린 선사시대 사람들이나 조선 초기의 사람들이나 별의 운행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별자리를 새긴 고인돌이나 천상열차분야지도가 그 시대의 지배자와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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