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봉평신라비
2022. 11. 10. 07:53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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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가 남겨놓은 유물은 발굴단에 의해 찾아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연한 기회에 일반인들에 의해 발견되기도 합니다. 울진 봉평 신라비도 그러한데 이 비는 1988년 1월 20일 울진 봉평리에 있는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발견한 농부는 자신의 논에 박혀 있던 이 비를 농사에 방해하는 것쯤으로 여겨 빼내어 하천에 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던 두 달 뒤인 3월 20일 이 지역의 이장이 버려진 이 비를 발견하고는 이 돌을 정원석으로 쓰기 위하여 포클레인으로 마을 옆 빈터로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런데 비가 내리면서 돌에 묻은 흙을 씻어내리게 되었고 그러면서 희미한 글씨가 보였기 때문에 평범한 돌이 아니라고 여긴 이장은 울진 군청에 알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비는 신라시대의 비석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발견된 시라 봉평비는 높이 204cm인 금이 간 비석으로 자연석 한 면에 400여자에 달하는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글자가 희미하므로 완벽한 해석을 못하고 있는 데다가 신라에서 사용된 오래된 문자이다 보니 해석하기가 까다로웠다고 합니다.
그럼 발견당시에는 이 비에 새겨진 글씨를 바탕으로 어떤 해석을 내놓았을까. 종래의 학설은 법흥왕 때 왕권이 강화됐다고 해왔으므로 당시 한 교수는 이 비문의 내용으로 통해 당시까지도 국왕은 신라 6부의 1인자에 불과한 것으로 해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비문에는 6부 중의 2부를 국왕이 직접 관장하는 것을 그 근거로 들었습니다. 이 말은 즉슨, 아직 4부에 대해서는 직접 통치가 불가능했다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교수는 이 비문에 대해 문장이 체계가 없는 것으로 보아 초기 한문 수입과정 시에 나타난 비문으로 추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비를 율령비의 성격으로 보는 학자도 있으니 영토확장에 따라 법흥왕이 새로 편입된 고구려주민들에게 신라의 법령을 따르도록 주지시키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럼 이 비석이 법흥왕 대에 세워졌다고 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봉평신라비에 새겨진 글 중에 ‘갑진년 정월 15일 탁부 모즉지 매금왕’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 문장을 통해 이 비석이 법흥왕대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해당 왕의 재위하는 동안에 갑진년을 포함해야 하고 ‘매금’과 관련된 왕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사서에는 ‘매금’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광개토대왕비에서는 이 표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고구려에서 신라의 왕을 ‘매금’이라 낮춰불렀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신라가 세운 이 비석에서도 ‘매금’이라는 단어를 확인할 수 있으니 적어도 신라가 스스로를 ‘매금’이라 낮춰 부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매금’이란 단어는 신라왕을 달리 부르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사서 『양서』에서 신라왕 ‘모진’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했다고 하니 ‘모진’은 ‘모즉지’의 중국식 이름으로 봅니다. 또한 『남사』에서는 법흥왕을 모진이라고 했으므로 모진은 모즉과 발음이 비슷합니다. 따라서 모즉지를 법흥왕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럼 이 비문에는 어떠한 내용이 있는 것일까. 법흥왕(法興王) 모즉지(牟卽智) 매금왕(寐金王)이 13명의 신하를 거느리고 종묘에서 선왕으로부터 교지를 받았다는 내용부터 왕이 신하를 거느리고 순행, 거벌모라남며지(居伐牟羅男㢱只) 지역에 별교령(別敎令)을 내렸으며 신라육부가 얼룩소를 잡아 제천의식을 지낸 후 율에 의해 지방관의 책임을 물어 장형 60대를 집행했다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마지막으로는 실직국의 군주의 지휘 아래 글쓰는 사람, 돌을 새기는 사람, 비를 세운 사람 등 이 비를 건립하는 데에 동원된 사람들의 인적사항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비문의 내용은 훼부(喙部)와 사훼부(沙喙部)를 국왕이 관장한다고 되어있으니 법흥왕 대에 전통적으로 6부가 아직 유지되고 있었음을 말합니다. 또한 비문의 내용에는 노인법(奴人法)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이는 6부민의 예속된 노비적 성격의 사람의 대해 그 지위를 보장해주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좀 독특한 단어가 보이는데 그것은 바로 모라(牟羅)라는 단어입니다. 이 표현은 일본어에서 마을을 의미하는 ‘무라’(村)과 발음이 비슷하므로 신라의 언어가 일본으로 건너간 것인지 아니면 동일한 어원에서 파생한 것인지는 당시로서는 해결해야 하는 숙제로 남겨놓았습니다. 그럼 당시 법흥왕은 이 봉평 신라비를 왜 세웠을까. 고구려 땅이었던 이 지역을 지배지로 삼으면서 법률의 내용을 알린 율령비였을까. 아니면 이것까지 포함한 이 지역의 사람들을 신라 육부 중 하나로 편입시키면서 규정된 의무를 준수하도록 명하는 포고문이었을까. 혹시 이 비문의 성격을 법흥왕의 왕권강화과정으로 본다면 이전까지의 국왕은 6부를 초월할만한 존재는 아니었지만 이 비를 세운 시점을 기하여 비로소 왕은 그 권한이 높아졌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어찌되었든 적어도 법흥왕 때에는 정육십대를 처했다는 내용을 통해 율령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노인법(奴人法)이란 대목을 통해 이 지역이 비신라계였다가 복속된 지역으로 이 지역에 대해 부담을 지우는 것은 명문화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지역은 당시 신라 땅이 아니었다가 신라에 복속된 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지역이 신라에 편입될 당시 이에 대한 지역민들의 반발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원인에 는 이 지역에 대한 차별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복속될 때 노인촌으로 편제되어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지역이 되었는데 그에 따라 반발이 있었고 그에 따라 신라는 군사 활동을 보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얼룩소를 잡아 제사를 지냈는데 이와 비슷한 것은 부여의 법률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 ‘전쟁을 할 때 소를 죽여서 길흉을 점쳤는데 소의 발굽이 벌어지면 흉하고 합쳐지면 길하다.’는 내용입니다. 이와 같은 의식은 6세기 초의 신라 비석인 포항 냉수리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전사 7명은 일을 마치고 소를 잡아 하늘의 뜻을 묻고 이 사실을 기록한다.’는 내용입니다. 정리하면 신라 법흥왕 대에 이 지역에서 모반사건이 있었고 이에 대해 정부군이 진압한 뒤 법흥왕과 신하 13인이 육부회의를 열어 소를 바치는 제사를 거행한 뒤 관련자들은 장 60대와 100대의 형을 부과시키며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권고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울진을 비롯한 이 지역이 신라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이었을까. 이 지역은 신라입장에서는 최전방으로 고구려와 대치가 항상 있던 지역입니다. 특히 이 봉평신라비는 그동안 발견된 신라의 비석과는 달리 고구려의 것과 닮아 있었으니 아마 이 지역이 고구려의 영향권 아래에 있다는 것이 신라에게는 부담이었을 것입니다. 특히 이곳을 통하는 길은 북진을 할 수 통로였기에 중요한 지역이었고 봉평 일대는 당시 ‘거벌모라(居伐牟羅)’라고 불렀으므로 이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입니다. 신라에게는 북진정책의 거점이자 풍부한 생산물을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지역이었고 당시 반신라적인 움직임을 진압하고서 이에 대해 확실하게 경고를 하고자 이러한 봉편 신라비를 세운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이 비문에 새겨진 두 글자가 일본 학계에도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 글자는 봉평 신라비 7행에 새겨진 파단(波旦)이란 글자로 이는 고구려식 지명으로 ‘골장 마을’을 일컫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파단이란 단어으로 일본식으로 읽으면 ‘하타’가 되는데 일본의 ‘진’씨의 발음도 ‘하타’라고 합니다. 실제로 골장 마을은 당시 진씨들의 집성촌이기도 했는데 일본의 하타씨는 울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신라인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는데 이전에도 ‘하타’씨가 신라계라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일본으로 건너간 한반도인들은 자신의 출신지를 성으로 삼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따라서 파단 지역에 살던 사람이 일본으로 건너가 ‘하타’를 성으로 삼았을 것이라 이야기입니다. 이 ‘하타’씨는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에 양잠기술을 전해주고 인근 가도노 제방을 세워주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타씨는 거대한 부를 축적하여 일본 황실과 혼인관계를 맺고 성장했다고 합니다. 우연하게 발견된 신라봉평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고대사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비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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