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흥왕은 왜 이차돈을 희생시켰을까.

2022. 11. 26. 07:55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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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돈 순교비

법흥왕 시절 그의 가까운 신하로 이차돈이 있었습니다. 법흥왕은 불교를 신봉하여 이를 일으키려 했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실현이 어려웠습니다. 이에 이차돈은 왕명을 가장하여 천경림이란 곳에 절을 짓겠다고 합니다. 이에 귀족들이 반발하면 자신에게 죄를 물어 목을 쳐 달라고 합니다. 불교를 흥하게 하더라도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일은 부처님의 뜻에 반하는 일이라며 이차돈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왕과의 밀약 하에 천경림에 이차돈은 절을 짓고자 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의 진실에는 이차돈이 법흥왕과 짜고 절을 지었다는 이야기와 더불어 이차돈이 단독으로 일을 진행하여 절을 지었다고 『삼국유사』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가 절을 짓고자 하는 천경림이란 곳은 어떤 곳인가. 바로 신라 지배자들의 고유의 신을 모시는 곳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신성한 곳에 왕명으로 외래종교의 사원을 짓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귀족들은 왕에게 따질 것입니다. 하지만 왕은 그런 적이 없다고 하며 이차돈에게 그 죄를 물어 처형을 지시합니다. 그리하여 그의 목을 치니 흰 피가 솟구치고 머리가 날아가 금강산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늘이 컴컴해지고 꽃비가 내리고 왕과 군신들은 이에 놀라 불교를 공인했다고 하니 그 때가 법흥왕 15년 혹은 16년이고 이차돈의 순교나이는 22세 혹은 26세였다고 전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는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아마 이러한 이야기가 나온 배경이 있을 것입니다. 
그럼 이차돈이란 어떤 인물일까. 그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길승, 할아버지는 공한, 증조부는 흘해왕으로 『삼국유사』에서는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해동고승전』에서는 ‘내사시인 박염촉은 이차돈 혹은 거차돈이라 불렸는데 나이가 26세였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차돈은 22살에 사인이라는 직책을 맡은 관리였습니다. 또한 『삼국유사』에서는 이차돈의 조부가 습보갈문왕이라고 했으며 습보갈문왕은 김씨족입니다. 그리고 이차돈은 걸해대왕의 후손이라는 기록도 있어 걸해대왕은 석탈해의 6세손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차돈은 왕족은 아니더라도 왕족과 관련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왜 20대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불교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사실 법흥왕의 왕권강화프로젝트의 희생양이라는 시각이 더 강합니다. 
“성품이 너그럽고 후덕해 백성을 크게 사랑했다” 『삼국사기』
법흥왕에 대한 김부식의 평가는 이러합니다. 그런 그가 불교를 포고하기 위해 거리낌 없이 한 사람을 제물로 삼아야 할 이유가 있던 것일까. 그럼 법흥왕은 어떤 사람일까. 

백률사 범종에 새겨진 이차돈의 순교 장면. 떨어진 머리가 연꽃 위에 올라있다.

그는 신라 23대 왕으로 지증왕의 아들인 그는 이름은 원종이라고 합니다. 그는 514년에 왕위에 올라 540년까지 있었습니다. 법흥왕은 지금의 국방부와 같은 병부를 설치하고, 대신들의 의복을 정리하며 최초로 상대등 제도를 실시하는 등 조직을 정비하였습니다. 그리고 율령을 제정하였으며 그와 더불어 불교를 공인한 것은 그의 큰 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업적들을 보면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바로 왕권강화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법흥왕은 이 불교에 관심을 두게 되었을까. 
불교는 이차돈의 순교 이전에 어느 정도 민간에 퍼져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고구려 승려들이 신라로 너머와 전도한 것으로 보이는데 신라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고구려의 승려로 묵호자가 있습니다. 묵호자는 신라 눌지 마립간 때 고구려에서 내려와 일선군(一善郡, 현 구미시 선산읍)의 모례(毛禮)라는 사람의 집 안에 굴을 파고 그 속에서 숨어 살며 불교를 포교하다가 중국 남조의 양나라 사신이 가져온 향(香)의 용법을 신라인에게 가르치고, 때마침 병을 앓고 있던 공주의 병을 고쳐주었다고 합니다. 눌지왕은 417년에서 458년간 재위했는데 법흥왕의 시기와는 약 100여 년간 차이가 납니다. 아마 이 기간 동안에 계속해서 고구려 혹은 백제에서 승려가 넘어와 간헐적으로 불교를 포교하였을 것입니다. 
그럼 민간에 불교가 퍼져있다는 것을 법흥왕이 알았을 것입니다. 고구려는 372년(소수림왕 2), 백제도 384년(침류왕 1)에 받아들였으니 이 때 불교사상에는 왕즉불 사상이 있었기에 고구려와 백제에서 적극 장려하여 불교가 퍼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현생의 삶이 다음 생을 결정한다는 불교의 업은 반대로 생각하면 지금의 왕은 이전 생애에서 그만큼 덕을 쌓았던 것으로 풀이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백성에게는 ‘왕이 곧 부처’라는 생각을 심어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왕즉불 사상은 신라에 처음 들어온 건 고구려 승려에 의한 것이었고 이 고구려의 불교는 북위에서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북위의 불교의 핵심이 바로 왕즉불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남조의 양나라 역시 강력한 불교장려 정책을 펼치고 있었고 양무제는 황제보살로 불렸습니다. 아마 이러한 점이 법흥왕의 매료시켰을 것입니다. 법흥왕이 이러한 불교를 받아들여야 했던 이유는 당시 신라의 왕권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대릉원이라 부르는 신라의 고분군에는 신라 김씨 왕족들의 무덤들이 있는데 여기서 김씨 왕의 무덤은 6기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수많은 무덤은 왕이 아닌 셈입니다. 또한 비슷한 크기의 무덤이 즐비한 금척리 고분군에는 대릉원에 있는 무덤들과 다름없는 규모와 더불어 부장품들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대릉원이 조성되던 시기에도 신라 6부의 세력은 강했던 것입니다. 

이차돈 순교

 503년에 기록된 영일 냉수리비에는 지역에서 일어난 재산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지증왕과 6부 귀족들이 모여 회의한 내용이 있는데 여기서 칠왕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는 지증왕을 비롯한 일곱 명의 귀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6부 대표들 모두들 스스로가 왕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왕은 최고의 지배자가 아닌 일정 세력이상의 지배자에게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었으니 실질적으로 우리가 알고 잇던 신라 왕의 위세는 낮았을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이유로 대릉원의 수많은 무덤들은 바로 그 지역을 다스리던 수장들의 무덤인 셈이고 신라 왕도 그 중 하나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울진봉평비에서도 그 표현을 볼 수 있습니다. 때는 법흥왕이 즉위한 지 11년째인 524년으로 법흥왕에 대해 모즉지매금왕이라고 표현하였으며 탁부에 소속되었습니다. 불과 불교공인이 일어나기 3년전까지 법흥왕은 6부 귀족들의 권한을 크게 앞지르지 못했던 것입니다. 법흥왕은 이 상황이 달갑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천경림이라고 해서 6부 지배 집단들을 이 곳에 가서 자신들만의 신에게 제사를 지냅니다. 그들도 천신의 자손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이러한 분열되어 자신들만의 신을 경배하고 왕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6부의 귀족의 힘을 누르기 위해 강력한 사상이 필요했고 그것이 바로 왕즉불 사상을 가진 불교였습니다. 
법흥왕은 거짓왕명으로 절을 지으려한 이차돈의 처형을 결정합니다. 그리하여 벌어진 처형장에서 기록처럼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해오는 내용처럼 이 모습에 대해 대신들은 당황했을 것입니다. 바로 당시 귀족들이 당황했다는 근거는 바로 법흥왕이 자신의 최측근인 이차돈에 대해서도 율령에 의거하여 처형에 처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대신들은 아마 자신들도 율령을 어기면 이차돈처럼 목숨이 달아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신라는 토속신앙을 믿었기에 외래종교에 대한 거부감이 컸던 귀족들의 반대도 컸고 또한 지리적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거쳐야 했기에 신라로의 불교 유입이 늦어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건 바로 이차돈은 왜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아야 했던 것일까 하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의 순교로 신라는 개혁의 가속페달을 밟을 수 있었고 법흥왕은 왕권과 더불어 신장된 국력으로 금관가야롤 병합하였으며 화백회의의 의장인 상대등을 두어 사실상 신라왕이 신라귀족들보다 위에 있다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고구려, 백제보다 발전이 더디다고 생각되었던 신라를 법흥왕의 노력으로 한단계 도약하였으며 이는 삼국통일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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