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서기석은 누가 새겼을까.
2022. 12. 9. 08:08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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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로 갈수록 전해오는 글이 적어지므로 알 수 있는 것에 대해 한정적입니다. 그런 면에서 당시의 글을 담은 비문은 당시의 실상을 전하는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신라에서는 당시의 실상을 전해주는 비문이 여러 개 전해져 옵니다.
그 중에 임신서기석은 신라의 두 청년이 임신년(壬申年)에 하늘에 충도(忠道)를 지킬 것을 맹세하고, 그 전년(前年)인 신미년(辛未年)에는 유교 경전을 학습할 것을 맹세하는 내용을 새긴 비석입니다. 이 비석이 세상에 알려진 대는 1934년입니다. 당시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의 주사였던 오사카 긴타로는 기와를 탐구하기 위해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금장리에 소재한 석장사지(錫杖寺址)를 방문하였습니다. 때가 되어 절터 북쪽의 있는 작은 언덕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우연히 그의 발끝에 곡선 모양의 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30㎝ 남짓한 돌에 글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본 그는 그 자리를 파내어보았고 그렇게 임신서기석은 세상에 그 존재를 알리게 됩니다. 임신서기석의 길이는 약 34cm이며, 상단의 너비는 12.5cm, 하단의 너비는 9cm로 아래로 갈수록 폭이 좁아지는 모양이었습니다. 이 돌이 스에마쓰 야스카즈에게 눈에 띈 것은 1935년 12월 18일이었습니다. 그는 첫머리에 임신이라는 글자를 알게 되었고 찬찬히 살펴본 결과 이 비문의 내용의 두 사람의 서약임을 알게 됩니다.
임신년(壬申年) 6월 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여 기록한다.
‘하늘 앞에 맹세하기를, 지금으로부터 3년 이후에 충실한 도(道)를 지키고 과실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약 이 맹세를 잃으면 하늘에게 큰 죄를 얻을 것을 맹세한다. 만약 나라가 편안하지 않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워지면, 가히 행하는 것을 용납함을 맹세한다.
또한 따로 이전 신미년(辛未年) 7월 22일에 크게 맹세하였다. 『시〈경〉(詩〈經〉)』, 『상서(尙書)』, 『예〈기〉(禮〈記〉)』, 『〈춘추〉전(〈春秋〉傳)』 등을 차례로 3년 동안 얻기를 맹세하였다.’
그는 ‘임신년에 서로 서약하는 내용을 기록한 돌’이라는 의미에서 돌의 이름을 임신서기석이라고 정합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36년에 경성제대 사학회지 제 10호에 ‘경주출토 임신서기석에 대해서’라는 제목으로 탁본과 함께 논문이 발표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임신서기석은 돌을 발견한 오사카의 소유였으나 광복이 되면서 경주박물관에 남겨졌습니다.
임신서기석의 작성자는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이 비석에 대해서는 신라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일단 발견지역이 신라의 왕성인 경주라는 것, 그리고 ‘卄’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二十’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러한 글자는 고려시대 이전에 사용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임신서기석이라는 말 앞에 붙은 임신이란 말 때문인지 몰라도 맹세연도가 언제냐는 것이 가장 큰 관심사였습니다. 아무래도 연대가 밝혀지면 이 비문의 내용을 통해 당시 사회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임신이란 간지는 60년마다 되풀이됩니다. 이에 따라 스에마쓰는 신라 문무왕 때인 672년 그리고 성덕왕 대인 732년 둘 중의 하나로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732년에 더욱 무게를 두었습니다.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나라를 안정시킨 다음에 이 비석이 만들어졌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고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광복 후에 역사학자 이병도가 이 비문을 조사하면서 진흥왕인 52년이나 진평왕인 612년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앞서 주장한 스에마쓰의 연도와는 대략 120년 정도 차이가 납니다. 그럼 두 학자 사이에 이렇게 다른 견해를 보이는 근본원인은 무엇일까. 바로 글에 인용된 시경, 상서, 예기 같은 글귀인데 이는 신라 국학의 주요 과목으로 아마 두 청년은 국학에서 배우는 교과에 대한 열공을 다짐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국학을 설치하고 난 뒤로 보아야 하므로 시기는 문무왕 12년인 672년 혹은 성덕왕 31녀인 732년이 되는 것입니다.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역사학자가 주장하는 이야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의 없이 받아들였고 따라서 신라가 국학을 설치하고 유교경전을 교과목으로 채택한 이후로 이 비석의 제작시기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병도가 이 의견에 달리한 것은 국학이 설치되기 전부터 이러한 유교경전은 신라사회에서 중요시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비문에는 나라에 충성하는 글귀가 보이는데 이러한 것은 화랑이란 제도가 크게 성장하는 진흥왕 13년인 552년이나 진평왕 34년인 612년으로 보는 것을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또한 역사학자 이병도가 반기를 든 것은 신라의 화랑도 정신에 근거했기 때문입니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나라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화랑들이 큰 활약을 했고 그들의 행동강령에는 세속오계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첫째가 나라에 충성하는 것, 사군이충이었습니다. 따라서 삼국통일에 크게 활약한 청년들이 앞으로 국가에 충성할 것을 맹세하며 돌에 그 의미를 새겼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정황상 그러할 뿐, 사실 이 비문의 작성자를 화랑으로 확정하지는 못합니다. 게다가 나라에 충성하는 덕목은 굳이 신라의 화랑이 아니더라도 다른 국가, 사회에서도 강조되는 덕목입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맹약하는 것 역시 어떤 시기를 특정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니까 그 시기가 진흥왕이나 진평왕, 혹은 성덕왕 대가 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문을 새긴 주인공이 화랑이라 한다면 왜 이런 내용을 굳이 새긴 것일까. 세속오계의 주인공이 귀산과 추항이 새긴 것일까. 600년(신라 진평왕 22년), 화랑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오계를 전수하였다고 합니다. 한편 진흥왕이 원화제도를 창설한 것은 576년으로 보고 있으며 『삼국사기』에서는 원화를 폐지한 후 화랑을 만들었다고 하고 『삼국유사』에서는 여러 해가 지난 뒤에 화랑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한편 576년 이전에도 사다함이 화랑이 있었으니 그는 562년 진흥왕 23년 9월 이사부가 대가야를 정벌할 때 15세의 어린 나이로 종군을 신청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사료와는 다르게 576년 이전에도 화랑이 있었으므로 552년에도 이미 화랑이 있었거나 아니면 화랑의 원류가 되는 무리가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화랑은 대개 20살 이전의 청년들로 구성되었으니 지금으로 따지면 많아야 21~22살의 청년이 맹세를 돌에 남긴 것이므로 그 조숙함은 현대사회에서도 찾기 힘듭니다. 하지만 약관의 나이에 불과한 그들을 사상적으로 일찍이 가르친다면 아마 이러한 돌새김도 가능했을 것입니다.
역사학자 최광식은 화랑도의 지도이념은 풍류도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풍류도에 대해 언급한 것은 최치원으로 그는 ‘난랑비서’에서 풍류도란 현묘한 도로 그 가르침의 기원은 삼교(三敎)를 본디부터 포함한 것으로서 많은 사람을 접촉하여 교화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를테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주지(主旨)와 같고, 무위(無爲)로 일을 처리하고 말 없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종지(宗旨)와 같으며,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석가의 교화(敎化)와 같다고 하였으니 이는 유교, 도교, 불교를 융합하여 조화시킨 신라에서 전해진 도인 것입니다. 한편 육당 최남선 선생은 풍류도의 어원을 ‘부루’에서 찾고 있는데 하늘의 도를 실현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최남선 선생은 불교와 유교, 도교가 유입되기 전에 이미 ‘부루’라는 신앙이 있었고 나중에 들어온 외래사상과 함께 존립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한편 화랑들은 노래와 춤을 서로 즐겼다고 하는데 이 현대적 의미의 유흥이 아닌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신내림을 통해 신과 자신이 하나됨을 느끼며 춤과 노래를 곁들였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화랑들은 경치 좋은 곳을 찾아다녔는데 이 역시 유흥이 목적이 아닌 바로 수련이 일환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다시피 임신서기석을 새긴 사람들이 화랑이라고 할만한 결정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다만 당시 사회분위기를 고려하면 비문을 남긴 이들이 화랑이라는 구성원 외에는 떠오르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돌에 면학을 다짐하고 나라에 충성한다는 내용을 새길 만큼 당시 신라의 사회분위기는 좋았을 것이며 이러한 것이 삼국통일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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