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궁과 월지에 담겨진 역사
2022. 12. 1. 07:58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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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 14년인 서기 674년 2월대궐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여러 가지 화초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는데 이 때 판 못을 안압지 혹은 동궁과 월지라고 합니다. 발굴 전 둘레는 800m였고 석축은 완전히 매몰된 상태였습니다. 발굴을 하는 동안 석축이 드러났으며 귀중한 유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동궁과 월지는 신라시대 조경미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졌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곳은 인공호수라고 합니다. 이곳에서 많은 우물이 발견되었는데 경주는 물이 많이 솟아나는 지형조건과 풍류를 즐기는 문화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월지입니다.
‘월지궁에 입궁시켰다.’ 헌덕왕 14년 (822)
이 기록을 통해 이 연못이 월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월지 주변에는 임해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곳은 왕이 손님을 접대하거나 외국사신을 맞아 잔치를 벌인 곳이므로 이곳은 왕궁의 한 영역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안압지라고 불렸던 곳입니다. 이러한 명칭과 관련하여 김시습의 시에는 ‘안하지’라는 명칭이 등장하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안압지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안압지, 천주사 북쪽에 있다. 문무왕이 궁궐 안에 못을 파고 돌을 쌓아 산을 만들었는데 무산십이봉을 본떴으며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들을 길렀다. 그 서쪽에 임해전 터가 있는데 주춧돌과 섬돌이 아직도 밭이랑사이에 남아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
신라 멸망 이후에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가 많이 날아들게 되면서 안압지란 명칭을 갖게 된 것으로 보면서 2011년까지 사용되었습니다. 이후 각종 기록과 유물로 미루어서 이곳의 명칭은 동궁과 월지라는 이름을 찾게 되었습니다.
‘왕이 고구려 포로 7천 명을 데리고 경주로 돌아왔다.’ 『삼국사기』
이 곳을 발굴하기 위해 물을 뺐는데 동궁과 월지에서 큰 돌을 벽돌처럼 만들어 가지런히 쌓아올린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는 고구려의 성을 쌓는 방법과 유사합니다. 고구려의 성문으로 알려진 평양시 중구역 금수산에 위치한 현무문도 다듬은 돌로 선과 면을 갖추어 쌓았으니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석축 주위에 보호석을 받쳐놓은 것도 고구려의 방식입니다. 아마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고구려유민들 중에 동궁과 월지 조성에 관여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이러한 동궁과 월지를 만든 이유에 대해 바로 동북쪽에 있는 황룡사라는 9층 목탑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그 방향으로 동궁을 배치하면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갈 때 직선이 점차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는 동궁의 조망점이 모두 황룡사 9층 목탑에 향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황룡사 9층 목탑이 잘 보이도록 누대는 높게 만들고 앞에 있는 섬이나 조산은 낮게 만들었으니 과학적으로 설계된 연못정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못의 서쪽 호안은 반듯한 직선인 반면에 동쪽은 심한 굴곡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왜 이런 설계를 하였을까. 이러한 구조는 공간을 실제보다 넓게 보이게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동궁과 월지는 개방성과 폐쇄성이 반복되는데 막혀 있는 공간 뒤에는 개방적인 공간을 마주하게 되면 보다 넓게 보이는 효과가 있으며 역동적인 느낌도 줍니다. 또한 호안의 높이차를 두었는데 서쪽 호안은 5.1m, 동쪽 호안은 2.1m로 두배 이상 차이가 나는데 이 때문에 서쪽 호안에서는 마치 바다를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을 주게 됩니다. 연못이라는 한정된 곳을 무한한 공간으로 표현하기 위한 조상들의 지혜가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공연못이라며 어떻게 이곳에 물을 채울 수 있었을까. 이곳에 들어오는 물은 너비 50㎝, 깊이 25㎝인 수로를 통해 들어옵니다. 3단계에 걸친 직각의 수로를 통해 들어오게 됩니다. 수로를 타고 물이 들어올 동안 낙엽 등의 각종 이물질과 토사도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설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설계된 수로는 유속을 떨어뜨리고 모래를 침전시켜 맑은 물이 연못으로 들어오게 합니다. 그리고 두 개의 석조를 만들어 하나는 낙엽을 먼저 걸러내며 최소한으로 이물질을 거르고 미처 걷어내지 못한 이물질은 두 번째 석조에서 걷어내어 깨끗한 물이 월지에 들어가도록 설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들어온 물은 1.5m의 폭포를 통해 연못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폭포의 바닥에는 판판한 돌을 놓았습니다. 바닥의 침식의 막아 흙탕물이 나오는 것을 막을 뿐 아니라 맑은 물이 널리 퍼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물이 떨어지는 곳 바로 앞에는 인공섬을 만들었는데 물이 인공섬에 부딪혀 물이 천천히 흐르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연못바닥에는 경사도를 주어 이를 통해 물은 원하는 곳으로 원활하게 빠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연못의 빠져나가는 배수구에는 상하로 3개의 배수구가 있습니다. 비가 많이 내리는 경우 배수구를 적게 막아 수위가 낮아지도록 하였고 비가 적게 올 때는 배수구를 모두 막아 수위가 높아지도록 조절한 것입니다. 월지의 수위를 인위적으로 조절하여 일정 높이를 유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들어오는 월지의 2단 입수구의 모양을 보면 같은 형태의 입수구 모양을 일본의 것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아스카시대의 유물인 수미산석을 확인해보면 말 그대로 불교의 우주관에서 나온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하는 상상의 산인 수미산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문양을 백제금동대향로에서 찾을 수 있으며 백제금동대향로가 먼저 제작된 것입니다.
‘(백제로부터 도래한 사람이 있었다.…) 수미산의 모양과 오교를 만들어 남정에 만들라고 명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노자공이라 했다.’ 『일본서기』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진귀한 새를 기르고 기이한 화초를 가꾸었다.’ 『삼국사기』「백제본기」 진사왕 7년
‘대궐 동쪽에 임류각을 세웠는데 높이가 다섯 길이었다. 또한 연목을 파고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 『삼국사기』「백제본기」 동성왕 22년
‘대궐 남쪽에 못을 파서 20여 리 밖에서 물을 끌어들이고 사면 언덕에 버들을 심고 물 가운데 방장선산을 흉내낸 섬을 쌓았다.’ 『삼국사기』「백제본기」 무왕 25년
백제가 스스로 궁남지같은 연못을 만들고 일본에 정원기술을 전수해줄 만큼 뛰어난 건축기법을 가지고 있었는데 백제의 유민들 또한 삼국통일 이후 안압지 건설에 힘을 보탰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안압지 이전에 이와 같은 정원이 신라에 없었다는 것이 동궁과 월지 조성에 백제의 힘이 크게 들어간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 안압지에서는 기러기, 뀡, 오리와 더불어 산양과 놀, 말과 사슴, 개, 맷돼지 등 포유류 등과 더불어 호랑이와 곰과 같은 맹수류의 뼈도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발견된 목간에는 ‘관장조사’라는 직책이 확인되었는데 동물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곳 안압지에서는 동물들이 뛰어 놀았던 공간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이러한 동물들이 어떻게 안압지에서 있을 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신라의 활발한 교류 때문입니다. 『일본서기』에서는 낙타, 앵무새, 공작 같은 이국적인 동물들을 포함하여 신라에서 많은 동물들을 보내왔다고 합니다. 아마 그 동물들도 신라가 먼 이국땅의 사신이 가져온 것을 다시 길러 왜에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왕실보물창고인 쇼소인이 있는데 이 곳에서 발견된 문서에는 신라산 물품의 이름, 수량, 가격을 기록했는데 그 중에는 신라산은 물론 동남아산, 서역산도 있었습니다. 실크로드의 종착지인 경주에서는 고구려, 백제의 건축토목기술을 받아들여 동궁과 월지를 만들었고 이 에서 이국적인 동물들을 길렀습니다. 아마 동궁과 월지는 삼국통일의 주인공이자 세계화의 중심이었던 신라의 모습을 모두 엿볼 수 있는 그런 장소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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