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당 전쟁의 승기를 가져오다. 매소성 전투

2022. 11. 11. 07:57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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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 야욕을 드러내므로 나당전쟁을 불가피했습니다. 당시 당이 백제왕자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으면서 신라를 견제하자 신라는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봉하고 이에 대항합니다. 이에 당고종은 고간 이근행에게 4만의 군사를 주어 평양으로 진군케 하였는데 이를 신라상장군 의복이 현재의 예성강 부근의 백수성에서 당군과 만나 혈전을 벌여 당군 수천을 베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당나라군을 추격한 신라군은 지금의 황해도 서흥으로 추정되는 석문에서 다시 한 번 붙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신라는 전쟁의 공을 자신들에게 가져가려는 욕심 때문에 제대로 된 협력과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아 전열이 흐트러졌고 당군은 이 빈틈을 노려 신라와 고구려 부흥군이 연합된 군대에게 참패를 안겼고 이 싸움에서 신라장군 효천과 의문이 전사하였습니다. 이에 김유신의 아들 원술이 패배에도 불구, 적진으로 뛰어들으려 했으나 이 때 그를 따르던 좌관 담릉이 ‘죽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죽을 곳을 찾아 죽는 것이 어려운 것’이라며 ‘그 곳을 찾지 못한다면 살아 뒷 날을 도모하는 것만 못하다.’고 말합니다. 이에 원술은 부친 김유신을 무슨 면목으로 마주하느냐는 대꾸했지만 결국 담릉이 말려 살아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원술을 김유신은 왕명을 욕되게 하고 가훈을 저버렸다며 문무왕에게 참형을 주청했으나 왕이 중형에 처할 수는 없다하여 용서하였고 원술은 이에 부끄러움을 느껴 숨어 지냈다고 합니다. 이후 김유신이 죽게 되자 원술은 어머니를 뵈고 부친의 영전에서 곡을 하려 했으나 어머니 지소부인이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이후 당은 말갈, 거란병까지 끌고 왔으녀 당 고종은 신라왕의 관직을 삭탈하고 유인궤를 계림도대총관으로 삼고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로 삼아 20만 대군으로 하여금 매소성에 주둔시켰습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문무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으며 그에 따라 왕의 관작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전쟁을 하기 위한 시간벌기였습니다. 문무왕 15년 9월 29일에 신라군은 이 전투에 사활을 걸었습니다. 신라군에는 고구려유민과 백제 유민은 물론 죄수들까지 사면시켜 군대에 편입시킬 정도였습니다. 이 전투에 원술도 참여하였으며 신라는 이 성을 빼앗고 3만 3백 80필에 달하는 말을 노획하고 수만의 당군 사상자를 냈습니다. 
 전쟁터에서 패해 김유신에게 인정받지 못한 원술이 참여한 매소성 전투는 당의 20만 대군을 몰아낸 대승전투였습니다. 당나라는 이 전투의 여파로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요동성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중국 측 사서에서는 아마 이 전투가 치욕적인 패배라 기록을 축소, 누락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럼 우리 측의 기록은 어떨까. 
 "문무왕 13년(675년) 9월 29일 당나라 장수 이근행이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매소성에 주둔했는데 우리의 군사가 공격해 쫓아버리고 전마(戰馬) 3만 380필을 얻었으며 그 밖에 노획한 병기도 이만큼 됐다“ 『삼국사기』
 그래서 한 쪽에서는 20만 명이라는 병력도 의심하고 있으며 당나라 기병 1만명과 말갈, 거란병등을 합쳐 3~4만 정도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당나라 입장에서는 무척 긴 원정길이었으로 보급부대까지 합쳐 20만으로 기록했을 경우도 있고 아마 보급부대가 있었다면 신라군에데 큰 타격을 입고 이것이 매소성 전투에서 당나라의 기세에 큰 영향을 끼쳤을 수 있습니다. 


처음 이 매소성 전투의 격전 장소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경기도 양주시 어둔동의 양주산성설, 남방동의 남방리산성설이 있었지만 근래에는 경기도 연천 대전리 산성으로보고 있습니다. 특히 이곳에서 발견되는 성벽의 구조와 출토된 유물이 나당전쟁 시기의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곳에서 당나라 군대가 주둔했다는 고고학적인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이곳을 매소성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아직 무리가 있다고 합니다. 
그럼 매소성에서 신라가 당대 강대국 당나라를 격파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669년 신라에 파견된 당나라 사신이 황제의 조서를 전달하고 돌아가면서 신라의 쇠뇌 기술자인 구진천을 데려갑니다. 당고종은 구진천에게 목노(木弩)를 만들게 하니 완성된 목노의 화살은 30보 밖에 날아가지 않았습니다. 당시 당의 황제가 ‘신라에서 만든 노를 쏘면 1000보 나간다고 하는데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고 이에 구진천은 ‘나무의 재질이 좋지 못해 그렇습니다.’라고 답합니다. 당시 신라의 천보노 제작기술은 당나라에게 위협이 되는 것이었고 그 제작자를 데리고 간 것을 보면 당나라는 신라와의 전쟁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신라의 목재로 이용해 제작해 보았지만 60보밖에 날아가지 않았고 이에 구진천은 ‘바다를 건너오면서 습기를 먹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지만 실은 무기제작기술은 당나라에 넘겨주지 않으려고 건성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태부(太府)의 공인(工人)은 그 수가 적지 않으니 (평원)왕이 그들을 필요로 한다면 스스로 문주(聞奏)하면 될 것인데 여러 해 전에 재화를 갖고 몰래 들어와 소인(小人)을 이익으로 움직여 사사로이 노수(弩手)를 데리고 그대의 나라로 도망하였다. 병기를 수리하는 의도가 착하지 못하므로 바깥 소문을 두려워하여 도둑질한 것이 아니겠는가."  '『수서(隋書)』
이 기록은 보면 쇠뇌를 만드는 기술은 본래 수나라의 기술인데 고구려가 몰래 기술자를 빼낸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많은 고구려인들이 7000명을 경주로 압송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전에 이미 고구려의 유력민들이 당으로 압송되었으므로 신라입장에서는 고구려의 일반 백성이 아닌 신라에서 활용할 수 있는 인적자원을 데리고 간 것이고 그 중에는 쇠뇌제작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신라에는  설당이라고 하는 특수부대가 있었다고 합니다. 운제당은 성벽을 넘기 위한 사다리 특화 부대, 충당은 성문을 부수기 위해 특화한 부대, 석투당은 투석으로 성벽과 건물을 부수기 위해 만들어진 부대였으며 쇠뇌를 특화한 부대가 있으니 그들이 바로 노당입니다. 그럼 당시 신라에는 고구려 멸망 전까지 신라에는 쇠뇌기술이 없었을까. 

매소성 전투 기록화

‘신라가 장극(長戟)과 강노(强弩)로 임나(가야)를 멸망시켰다.’ 『일본서기』
일본 측의 기록에 따르면 6세기 중엽에 이미 쇠뇌를 전쟁에서 활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그 무기를 더욱 발전시켜 매소성 전투에서 활용하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일본서기』의 기록에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장극(長戟)입니다. 당의 주력은 기병이었습니다. 중국 병법서 『육도(六韜)』에서는 ‘평지에서는 기병 1기가 보병 8명, 험한 지형에서는 보병 4명에 필적한다.’고 했을 만큼 고대에서는 막강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던 것이 바로 기병입니다. 금나라의 기병 17명이 송나라 기병 2천 명을 대파한 기록도 있어 훨씬 앞선 시대인 나당전쟁시기에도 기병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나라는 이러한 기병을 바탕으로 한반도 전체 지배에 대한 야욕을 품었습니다. 
‘신라의 장창당은 당나라 군사 3천 명과 부딪쳐 그들을 모조리 잡아 대장군의 병영으로 보냈다.’ 『삼국사기』
당시 기병은 보병들보다 높이 있고 그 움직임이 빠르기 때문에 위압감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 때 장창병은 장창을 땅에 고정시켜 말의 가슴이나 말 목을 겨냥하여 낙마시켜 그 대열을 정체시키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낙마한 기병부대들을 보병들이 에워싸서 공격했을 것이며 또한 궁수들이 두려움없이 활을 쏠 수 있도록 장창부대는 그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그것보다 신라는 이 싸움이 국운이 걸렸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나라의 존망을 위해 싸운 한반도인의 의지가 빛을 발한 전투가 매소성전투입니다. 그럼에도 그 기록이 빈약한 것은 우리나라 전투역사의 또다른 수수께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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