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은 왜 황룡사 9층 목탑을 지었을까.

2022. 7. 18. 21:22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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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분의 1로 축소되어 복원된 황룡사 9층목탑

세계에서 가장 높은 목탑은 호류사 5층 목탑이라고 합니다. 이 목탑은 7세기에 만들어졌습니다. 높이가 30미터에 이르는 이 목탑은 여러 차례 보수과정을 거치면서도 처음의 모습을 최대한 유지하며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황룡사 9층 목탑이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황룡사 9층목탑은 높이가 80미터에 이르는 탑이었다고 합니다. 엄청난 높이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존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높이가 높은 이 목탑은 여러 차례 벼락에 맞았습니다. 이 목탑을 짓고 나서 50여 년이 지난 효소왕 시절에 벼락에 맞더니 신라 시절 내내 벼락에 몇 번이고 맞았습니다. 이후 왕조가 바뀌었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벼락에 맞으면 다시 짓고를 반복한 이 황룡사 9층 목탑은 결국 몽골의 침입 아래 불태워졌습니다. 몽골은 고려의 끈질긴 항전에 화가 나서 신라시대에 지어지고 고려시대에도 보존해온 국가적인 보물을 없애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실물대신 모형으로만 황룡사 9층목탑을 볼 뿐입니다.
그러면 황룡사 9층 목탑, 이 거대한 상징물은 어떻게 지어졌을까요. 일단 황룡사의 건립배경에 대해서 『삼국유사』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신라 진흥왕은 즉위한 지 14년이 되는 553년, 용궁 남쪽에 궁궐을 지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황룡이 나타나서 궁궐 대신 황룡사라는 절을 지었으며 17년 만에 완성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지어진 황룡사는 어마어마한 규모였습니다. 현재 발굴된 면적만 불국사의 8배라고 하니 엄청 큰 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궁궐 자리에 지어진 절이니 만큼 신라를 대표하는 절이었을 것이고 그 안에 지어진 황룡사 9층 목탑도 역시 엄청난 위용을 자랑했던 것입니다. 황룡사 9층 목탑의 건립배경도 『삼국유사』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자장법사는 당나라로 유학을 갔는데 거기서 신령스러운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자장법사에게 무슨 근심거리가 있는지 물었습니다. 이에 자장법사는 "우리 신라는 북쪽으로는 말갈, 남쪽으로는 왜국에 접해 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 두나라가 국경을 침범하며 이웃나라의 도적들이 마음대로 드나듭니다. 이것이 우리 백성들의 걱정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에 신령스러운 사람은 신라는 덕은 있지만 위엄이 없어 이웃나라가 침략을 꾀한다고 말하며 황룡사라는 절에 9층으로 된 탑을 세우라고 전합니다. 그리고 그 황룡사를 보호하고 있는 용이 자신의 큰 아들이라는 믿을 수 없는 말도 전합니다. 자장법사는 곧 신라로 돌아와 선덕여왕에게 황룡사 9층 목탑을 지을 것을 건의합니다. 당시 신라는 여러 어려움에 처해 있었습니다. 백제의 침략으로 수많은 성을 빼앗겼고 동맹을 위해 고구려를 찾은 김춘추는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겨우 빠져나온 것이 이 즈음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엄청난 국고를 들여 거대한 탑을 짓는다는 것이 쉽사리 납득이 되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국난을 헤쳐 나가고 신라의 번영을 기원하길 바라며 왕실의 지원과 신라 백성들의 열망이 하나로 뭉쳐져 목탑의 건설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히 설명될 수는 없습니다. 아무래도 황룡사 9층 목탑이 불교의 건축물이라는 점이 건설에 탄력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늦게 불교가 공인되었지만 막상 받아들이고 나서는 국가적인 믿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특히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은 '왕이 곧 부처'라는 불교이념을 전파시켜 신라 내 사회통합에 주력하였고 이는 이후 선덕여왕 때의 황룡사 9층 목탑의 건설에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하여 신라 백성들의 불교를 향한 믿음과 국가적인 어려움을 불교의 힘으로 헤쳐나가겠다는 신라왕실의 의지가 더해져 황룡사 9층 목탑이라는 결실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완성된 9층 목탑은 주변의 여러 나라를 평정하겠다는 신라의 거대한 야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1층은 일본을 막고 2층은 중국을 막기 위함입니다. 3층은 오월을 막기 위함이고 4층은 탁라를 막기 위함인데 대체로 탐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5층은 응유를 막기 위함인데 이는 백제로 생각되고 있으며 6층은 말갈, 7층은 거란, 8층은 여진족, 그리고 9층은 예맥 즉 고구려를 막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 목탑은 그야말로 신랑 중심의 질서를 세우겠다는 원대한 포부가 담긴 탑인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목탑은 총 지휘자는 적국이라고 할 수 있는 백제의 아비지가 맡았습니다.
이렇게 완성된 황룡사 9층목탑은 이제는 볼 수 없습니다. 몽골에 불태워져버린 이 목탑은 그 거대한 규모 때문에 복원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고려시대 때에는 몽골의 눈치를 보느라 지을 수가 없을 테고 시간이 흘러 고려가 망하고 그 자리에 세워진 조선은 억불정책을 내세웠기 때문에 절 안에 목탑을 짓는다는 것은 더더욱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조선의 수도 한성에 세우는 건축물도 아니고 고려 이전의 왕조의 도읍에 거대한 건축물을 세우는 것은 아마 세금낭비라고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이래저래 황룡사는 터만 남은 채 황룡사 9층 목탑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거대한 건축물이 되었습니다. 

분황사 모전석탑

선덕여왕은 신라 최초의 여왕이었습니다. 선덕여왕은 어떻게 신라에서 왕이 될 수 있었을까. 간단히 이야기하면 신라는 골품제 사회였고 성골만이 왕위를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왕위를 이을 성골남성이 없게 되자 성골여성인 덕만이 왕위에 올라 선덕여왕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의문점이 드는 것이 바로 선덕여왕에게 언니인 천명공주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미 성골이 왕위에 오르도록 하였고 이제 여성만 남아있다면 선덕공주가 아닌 천명공주가 왕위에 올랐어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록에서는 선덕공주가 왕위를 이을만 했고 효심이 뛰어난 천명공주는 순종하며 지위를 양보하고 출궁했다고 기록합니다. 학계에서는 천명공주가 성골을 버리고 진골로 신분이 강등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모로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기가 적합하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럼 그 배경에 무엇이 있을까요. 선덕여왕도 결혼했었다고 『화랑세기』에서는 전하고 있습니다. 위작에 대한 논란은 있지만 기록에 따르면 선덕공주는 25대 진지왕의 아들인 용춘과 결혼한 뒤에 아이가 없자 역시 진지왕의 아들이자 용춘과 형제인 용수와 관계를 맺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아이가 없었죠. 그런데 여기서 의아한 것은 용수는 이미 선덕여왕인 언니인 천명공주와 혼인한 사이였습니다. 하지만 이후 용수가 죽으면서 자신의 부인인 천명공주와 그의 아들은 선덕에게 맡기니 아들은 바로 김춘추였습니다. 그리고 선덕이 왕이 되면서 다시 용춘을 남편으로 맞았으나 역시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천명공주는 왕이 될 수 없었고 선덕은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 그에 대해서는 천명공주는 용수와 결혼하면서 진골인 남편의 가계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성골로서의 지위를 상실했고 선덕은 용춘과 용수와 결혼하면서도 궁궐에 머물렀기 때문에 성골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골이라도 고대국가에서 왕위를 잇는 남성이었고 여성은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그 반발도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선덕여왕은 자신의 위엄을 드높이기 위해 건축물 짓는 데에 힘을 쏟았을까요. 황룡사 9층 목탑 외에도 재위 3년이 되는 634년에 분황사를 지었습니다. 분황사의 의미는 향기로운 황제의 절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벽돌의 전탑을 모방하여 돌을 벽돌 모양으로 깎은 쌓은 모전탑이 있는데 지금은 3층이지만 당시에는 9층탑이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 태종이 모란 그림과 씨앗을 보내왔을 때 꽃이 향기가 없을 것이라 예측하며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선덕여왕이 분황사를 지은 것일까요. 여기에 더해 선덕여왕은 독자적인 연호 인평을 사용하여 자주국임을 천명하였습니다. 황룡사 9층 목탑과 분황사 건립이 선덕여왕의 위엄을 살리는 데 도움이 되었을까 의심이 들지만 이러한 건축물들이 선덕여왕의 이야기에 한 부분이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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