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유역을 점령한 신라의 진흥왕 순수비

2022. 7. 16. 21:26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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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 순수비

조선 후기의 문신 추사 김정희는 추사체로 글씨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동시에 그는 금석문학자로 옛 것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보존하는 것에 관심을 가질 줄 아는 선비였습니다. 그는 비문을 해석하는데 그치지 않고 비를 찾거나 무덤을 추정하기도 하였습니다. 김정희가 했던 일련의 모습들은 현대의 고고학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아마 그는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 첫 번째 고고학자일지도 모릅니다. 
김정희는 친구 김경연과 1816년 북한산에 올라왔습니다. 그들이 올라간 비봉에는 이끼가 잔뜩 낀 비석 하나가 덩그러니 있었습니다. 이 비봉이란 이름도 비석이 하나 있어서 그렇게 이름지어진 것입니다. 당시에는 이 비봉의 비석에 대해 신라시대의 도선국사가 후에 무학대사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기 위해 이곳에 올라올 것이라는 내용을 적은 예언비로 생각되어 왔습니다. 생각만 그럴 듯하게 한 이유는 비문을 읽을 수 없어 몰자비로 알려졌고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만의 해석을 단 것입니다. 옛 것을 복원하는데 흥미를 가진 김정희는 이를 가만히 두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손으로 이끼를 걷어내고 탁본을 찍어냅니다. 그리고 그는 첫 글자를 읽어냈는데 그것은 진(眞)이라는 글자였습니다. 몰자비라 생각했던 비문을 읽어낸 김정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김정희가 해독한 비문에 대해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것은 신라 진흥왕 순수비이다. 병자년 (1816년) 7월에 김정희와 김경영이 와서 읽었다.”
“경축년 6월 8일에 김정희와 조인영이 함께 와서 자세히 감정해 본 결과 남아 있는 글자는 예순여덟 자이다.”
김정희와 김경연이 읽은 비는 바로 진흥왕 순수비였던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고대의 비석에 자신의 글을 적어 넣은 것은 현대에서는 처벌받을 수 있는 행동이지만 당시 금석문학자 김정희와 김경연이 적어놓았기 때문에 그 가치가 훼손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전에도 서유구가 이곳에 올라 비석을 확인했는데요. 진흥왕 순수비란 이름도 그의 판독의 결과로 얻어진 이름입니다. 다만 그가 해독한 것은 10여 글자였고 이후 김정희가 올라 나머지글자를 판독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비를 세운 사람은 바로 진흥왕으로 밝혀졌으니 그는 신라 제 24대 임금이자 신라의 전성기를 이끈 왕이었습니다. 진흥왕은 영토를 크게 확장한 왕으로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비석을 세웠는데 3개의 순수비와 1개의 척경비를 세웁니다. 순수비는 임금이 나라 안을 돌면서 지방의 정치와 민심을 살피고 이를 기념하고자 세운 비석으로 3개의 비석에는 순수관경(巡狩管境)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순수비로 알려진 것은 북한산 순수비와 황초령비, 그리고 마운령비가 있습니다. 그리고 창녕비에는 이러한 글자가 없는데 대신 진흥왕이 이 지역을 다스린다는 내용과 더불어 관련된 사람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순수비가 세워진 곳


그럼 진흥왕은 이러한 비를 왜 세웠을까. 이 시기에 신라는 가야를 완전 병합하고 고구려가 장악한 한강하류일대와 더불어 동해안을 따라 함경남도 인근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이 중 북한산 순수비는 155cm, 폭은 약 71cm, 두께는 16cm로 직사각형 모양입니다. 
“眞興王巡狩碑興太王及衆臣等巡狩管境之時記…”
진흥태왕(進興太王)으로 시작하는 비문은 한강유역을 차지하는데 큰 역할을 한 김무력이란 이름이 보이는데 그 이름은 김유신의 할아버지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비에는 진흥왕의 영토확장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비는 568년에서 569년 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근데 정작 이 순수비가 어디에서 제작이 되고 누가 비문을 지었는지 확인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더욱 의아한 것은 이 시기에 진흥왕이 황초령비와 마운령비를 세운 것이 568년인데 현재의 서울인 북한산주와 함남 안변인 비열홀주를 폐지하고 경기이천인 남천주와 강원도 고성인 달홀주로 군사기지를 옮겼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비들을 세우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변방의 군사기지를 후퇴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위에서 이야기했다시피 순수비는  임금이 나라 안을 돌면서 지방의 정치와 민심을 살피고 이를 기념하고자 세운 비석이라고 했잖아요. 그럼 진흥왕은 순수비를 세우면서 하나의 기능을 추가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바로 이 지역을 다시 점령할 세력, 즉 고구려나 백제에 대해 신라의 진흥왕이 이 지역에 왔다갔음을 알리는 역할 말입니다. 
진흥왕은 법흥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불과 7세,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그는 귀족들의 권세에 눌려 있다가 18세가 되면서 친히 다스리며 연호를 ‘개국’으로 정합니다. 그리고 진흥왕은 순수비를 세운 이력에서 볼 수 있듯이 영토 확장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였고 법흥왕이 만든 화랑을 활용하는가 한편 황룡사를 건축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이사부와 거칠부가 있었고 이들은 영토확장과 국사 편찬에 참여하며 진흥왕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었습니다. 북한산 순수비에는 작성자가 나와 있지 않겠지만 아마 그들이 진흥왕의 최측근으로 비문을 작성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진흥왕이 건립한 황룡사는 자장, 원효, 이상, 원광 같은 수많은 잇따라 고승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진흥왕

진흥왕 대에는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밀어내고 한강 상류를 차지하였으며 이후에는 백제가 차지한 한강하류마저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사실상 백제와 신라의 동맹관계가 깨지게 되었습니다. 이후에 백제와 신라의 관계가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만든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554년에 있었던 관산성 전투의 비극이었습니다. 하지만 신라의 전성기를 이끈 진흥왕은 전쟁에 지쳤고 태자 동륜은 일찍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자신들의 측근세력이 커졌고 이에 부담을 느꼈을까. 그는 스스로 스님이 되어 법운이라는 이름으로 짓고 살다가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그가 순수비를 세웠던 것은 진정 민심을 살피는 것에만 있었을까요. 그는 순수비를 세우면서 신라의 중심의 세계를 꿈꾸었을 것이고 그것은 바로 삼국통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귀족의 세력을 눌러 강력한 국왕의 힘을 보여주고자 했고 그 실체가 바로 순수비였을 것입니다.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는 패배하였고 신라의 하급장수 고도에게 참수를 당합니다. 『일본서기』의 기록에서는 성왕은 고도에게 죽음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 전에 성왕은 왕의 머리를 베려할 적에 성왕이 노(奴)의 손에 자신의 머리를 맡길 수 없다고 하였지만 신라에서는 맹세한 바를 어기면 국법에 따라 노의 손에 맡겨진다고 말하며 성왕의 최후를 진행했다고 합니다. 당시 성왕을 참수한 고도라는 사람이 과연 미천한 사람이었는가에 대한 말은 있지만 이 비극은 나중에 부메랑처럼 돌아와 포석정의 참극으로 벌어졌습니다. 
북한산 봉우리에 순수비를 세우며 그 위세를 떨치던 진흥왕은 말년에 권좌에서 내려와서 승려로 살아갔습니다. 진흥왕대에 건립한 황초령비에는 제(帝), 짐(朕), 호(號)라는 글자를 통해 신라를 황제국임을 천명한 것을 생각하면 의외의 행보라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승려로 향한 그의 발걸음에는 무슨 의미가 담겨있을까요. 그의 재위시절 태자 동륜이 사망하게 되었는데 전장을 누비며 바깥으로 돌아다니는 사이 있었던 태자의 죽음과 그 사이에 커진 귀족들의 견제가 그에게 부담이 되었을까요. 아마 진흥왕 순수비로 인해 생긴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왕이라는 수식어 뒤에 그의 쓸쓸한 퇴장은 가려진 건 아닌가 싶습니다. 아니 어쩌면 진흥왕은 자신이 언제나 강력한 군주로 후대에 전해지길 바랬는지도 모릅니다. 혹시 그게 목적이었다면 그래서 순수비를 세운 것이라면 진흥왕의 의도는 성공했다고 봐야 할까요. 이러한 비석에는 스님으로 살아간 쓸쓸한 말년을 적어 놓을리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이제 진흥왕의 순수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지만 세월에 따라 닳은 모양과 한국전쟁 때 맞은 총탄의 흔적에서나마 치열했던 진흥왕의 삶과 업적을 되새겨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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