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적성비, 신라를 알려주다.

2022. 7. 15. 21:22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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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적성비

1978년 1월 국내 한 대학교 학술조사단은 온달의 유적을 찾기 위해 충북 단양을 탐사하였습니다. 이들은 단양에 있는 성재산에 들렀지만 밤새 내린 눈으로 힘들었습니다. 그 중 한 명이  돌에 발을 올리고 신발을 털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돌덩이에 글자가 써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들 눈에 띈 것은 대(大)였으며 이어 아(阿)자와 간(刊)자도 보였습니다. 이들은 발굴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찾아낸 이 땅의 선조가 남긴 것, 단양 신라 적성비를 발견한 순간이었습니다. 
단양 적성비는 성재산 정상부의 323미터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높이 93cm, 폭 107cm, 두께 25cm의 크기인 적성비는 그 형태가 두꺼웠는데 위가 넓고 두꺼웠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좁아지고 얇아진 모양이었습니다. 그리고 윗부분은 잘려나갔으므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화강암의 비석에는 440자 정도의 글자를 품고 있었고 그 중 288자가 확인 가능한 글자였습니다. 
당시 이 비석이 해독하면서 순수비가 아닐까하는 추측도 있었습니다. 순수비라는 것은 왕이 국토를 확장하고 국위를 선양하기 위해 신하들을 데리고 변경을 돌면서 기념물로 세운 것입니다. 당시 알려진 진흥왕 순수비로는 창녕비, 북한산비, 황초령비, 마운령비 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비는 기존의 순수비와는 성격이 다른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 비석의 글은 순수비와 같은 예서체로 썼으나 그 격이 낮으며 이두문이 섞여있었고 난해한 한자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단양 신라적성비는 이 지역을 점령한 후에 왕명을 받고 온 신하들에 의해 건립된 비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도 고구려, 백제, 신라중에서 가장 발전이 늦었던 신라가 팽창하는 한 단면을 보여주는 소중한 유물이라는 것은 순수비와 그 의미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비에는 진흥왕이 세 신하에게 교지를 내리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신하들은 이사부와 거칠부, 무력입니다. 그러면서 이 지역을 차지할 때 큰 도움을 준 적성 출신의 야니차와 그 가족에게 상을 내리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야니차는 기록으로 전해지는 최초의 단양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신라의 백성들이 된 이들을 잘 달래주고 충성을 하면 상을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라 관직에 대한 기록, 신라의 행정제도, 점령지역 주민의 세금을 1년간 면해주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신라의 율령제도와 관련된 장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점령지역 주민들을 소인(小人)과 대인(大人), 남자와 여자, 노인 등 5등급으로 나눠 호적을 정리되어 있으므로 적어도 이때부터 호적제가 시행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적성지방에서 내려오는 관습을 일반화한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럼 이 비가 세워진 것은 언제쯤일까요. 학자들은 551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신라는 북방을 공략하기로 하고 한강유역을 차지한 게 진흥왕 시기였습니다. 그러면서 지금의 단양, 적성현이 신라에게 넘어간 것은 진흥왕 12년인 551년이므로 이때가 건립시기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삼국사기』에는 진흥왕 12년인 551년에 거칠부와 17관등 중에 5관등직에 해당하는 대아찬 비차부 등 여덟 장군에게 명해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침공하여 죽령 바깥쪽 고현 안쪽의 10군을 빼앗았다는 내용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비문에는 비차부라는 사람이 6관등에 해당하는 자리인 아간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즉, 비가 건립되었을 때는 비차부라는 사람이 관등인 대아찬으로 승진하기 전의 기록이므로 단양 신라 적성비는 551년 이전에 건립되었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단양적성비문


그럼 단양적성비는 우리에게 어떠한 사실을 알려줄까요. 기존의 문헌자료에서 보이지 않은 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대중등, 군주, 당주, 사인 등의 관직명이 보이는데 이를 통해 지방의 통치조직과 촌락의 양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으며 비에 나와 있는 단어들은 신라사회의 율령제도와 조세제도 등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비에는 우리가 알만한 신라시대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지증왕 때에 우산국을 정벌한 이사부, 신라의 재상으로 진흥왕의 명령으로 『국사』를 편찬한 거칠부, 그리고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김무력입니다. 이들은 신라가 영토를 확장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인물입니다. 『국사』를 편찬한 거칠부가 있다니 의외라고 생각하실 분들도 있을 텐데, 그는 551년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격파하여 죽령 이북의 10군을 빼앗는데 큰 공을 세운 바 있습니다.
 한편 삼국사기에서는 법흥왕 7년인 520년에 율령을 반포했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했다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었는데요. 따라서 일본학자들은 법흥왕이 공포한 율령이 복식에 한한 것이므로 정치, 사회, 경제에 대한 전반적인 것이 아니라는 해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신라 단양적성비에 보이는 소자(小子), 소녀(小女)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사람을 나눌 때 가장 어린 자녀를 아우르는 말이었으며 비문에는 일종의 토지제도로 풀이되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전에 마이케 켄이치가 신라는 진평왕 때에 관등제도가 성립되었다고 주장했는데 이 비문을 그러한 내용을 한 번에 일축한 자료인 것입니다. 
그럼 적성비가 세워진 단양은 삼국시대 당시에는 어떠한 곳이었을까요. 고대국가초기에는 백제 땅이었는데 장수왕 때 고구려가 남하하면서 단양은 고구려 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신라 땅이 되었는데요. 아마도 이 과정에서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을 것입니다. 실제로 충북에는 산성들이 많이 존재합니다. 청주의 '상당산성(上黨山城)', 보은의 '삼년산성(三年山城)', 단양의 '온달산성(溫達山城)'이 있으며 이와 더불어 적성산성이 있습니다. 당시 이곳은 전략적 요충지였으니 진흥왕이 이곳을 점령하고 고구려를 압박하는 과정에서 적성산성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적성산성이라는 말에서 단양적성비라는 명칭의 비밀을 밝힐 수 있습니다. 비문에  '赤城(적성)'이라는 단어가 나오니 이것은 옛 단양의 지명입니다. 바로 고구려 적성현입니다. 신라가 이곳을 점령하고 성을 쌓으니 그 곳이 바로 적성산성입니다. 그러니까 이 중요한 지역을 신라가 편입하는 과정에서 아마 지역주민들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 곳에 비를 세우고 성을 쌓았으니 당시 단양은 그 위치가 중요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서 건국초기에는 약소국이었습니다. 진흥왕 이전의 시기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패권을 두고 세력을 다툼하는 형국이었고 신라가 끼어들 틈이 없어보였습니다. 하지만 진흥왕시기에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금관가야를 병합하고 백제와 연합하여 한강을 차지한 후 다시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유역을 신라 땅으로 만드는데요. 그 과정에서 적성현의 점령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입니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 문화유적학과 교수는 논문 '단양 신라 적성비와 신라 진흥왕대 제비(諸碑)의 비교'에서 "단양 적성비는 신라가 소백산맥을 넘어 고구려 영내로 진출해 건립한 최초의 비석이었다."며 평가합니다. 그야말로 신라의 이 지역의 점령은 기념비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고 단양적성비는 그 증거인 셈입니다. 
고대사로 갈수록 문헌자료가 빈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오래되다 보니 자료가 소실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도 고대사를 밝히는 사료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있으나 이 문헌만으로는 우리나라 고대사를 재현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릅니다. 그리고 중국 측의 사서나 『일본서기』를 인용하기는 하지만 다른 나라의 사서이니만큼 신뢰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따라서 글자를 전하는 비문의 발견은 소중한데요. 따라서 귀중한 자료인 신라 단양적성비가 국보로 지정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입니다. 그것이 천 년의 세월에 의해 글자가 지워지고 훼손되더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비문에서 차마 다 전하지 못한 이야기는 이제 후대 사람들이 풀어야할 숙제로 자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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