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알고 있는 문무왕릉, 과연 맞을까.

2022. 7. 29. 11:36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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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으로 생각했던 대왕암

지난 1967년의 일이었습니다. 경주 동쪽 약 30km의 동해안에서 둘레 이백미터 정도 되는 바위를 발견하였습니다. 동서와 남북 두 갈래로 십자수를 깎아 그 중앙에 4평 가량의 해중 못을 만들어 석함 속에 유골을 묻은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바로 신라 문무왕릉으로 경북월성군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에서 찾은 것입니다. 석함 위에는 길이 3.59m, 두께 0.9m, 너비 2.85m의 큰 거북모양의 화강암이 덮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능의 조영방식은 사문을 배치하고 그 중에 사리를 앉힌 기원전 2세기의 산치탑을 비롯하여 기원전 5,6세기 중국의 육조 시대의 목탑의 방식과 비슷하며 우리나라에서도 신라의 분황사탑, 백제의 미륵석탑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기록에서는 문무대왕이 “내가 죽으면 인도식으로 화장하여 동해에 장사하라. 그러면 용이 되어 왜구의 침입을 막으리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 능의 발견으로 화장 후 물속에 능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이 문무왕릉은 바위섬으로 그 이야기가 인근 마을에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무왕릉으로 전해진 것이 아니라 단지 귀신이 살고 있는 무서운 섬이라고 했습니다. 마을의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아예 그 곳에 가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마을에선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말로 가까이 가면 무서운 변을 당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해녀들도 그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한 해녀에게 도움을 받는 데에도 조사단이 진땀을 뺐다고 하네요. 
이렇게 발견된 문무왕릉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존재했습니다. 과연 왕의 무덤이 맞느냐는 것입니다. 문무왕릉이라고 알려지긴 했지만 의문부호가 달렸습니다. 2001년 한 방송팀에서 이 문무왕릉이라고 하는 곳을 직접 탐사를 했습니다. 대왕암 십자수로의 끝을 모래주머니로 막은 후 양수기로 물을 빼내어 대왕암 한가운데에 있는 바윗돌인 복개석을 비파괴검사로 조사하였습니다. 조사해보니 복개석은 석관뚜껑이나 덮개돌이 아니었으며 그냥 20톤 정도 되는 거대한 바윗돌로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엄연히 암석층이기 때문에 도저히 파내려야 팔 수 없었습니다. 이는 이 밑에 부장품이나 유골상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손을 댄 흔적이 있다고 합니다.  바닷물이 동쪽 수로로 들어와 서쪽 수로로 빠져나가는데, 물이 잘 빠져나가도록 서쪽 수로를 깎아서 동쪽 수로보다 더 낮게 만든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또다른 인위적인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골이나 부장품을 안장하지 않았기에 왜 신라왕실에서 석공을 불러 이런 수고스러운 작업을 했느냐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문무왕의 유골을 산골하여 대왕암에 뿌렸고 나름의 추모의 장소로 이곳을 정비했다는 설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문무왕릉에서는 유골함이나 부장품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문무왕을 기리는 추모 역할로 그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문무왕은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왕입니다. 문무왕이 왕위에 오른 것은 660년으로 태종 무열왕의 뒤를 이었습니다. 당시 백제가 멸망하고 백제부흥운동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에 당과 갈등이 있었는데 신라는 백제땅에 대해 자신의 소유를 주장했지만 당나라는 그 땅에 자신들의 행정구역인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였고 백제의 마지막 왕의 아들인 부여 융을 그 우두머리로 삼았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당나라는 663년에는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로 하고 신라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임명하였으며 665년에는 백제 부여 융과 신라 문무왕이 동맹을 맺으라고 강요하였습니다. 당나라는 백제 유민들을 뒤에서 지원하면서 신라를 견제한 것입니다. 하지만 고구려가 아직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갈등은 크게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자 신라와 당나라는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671년에는 사비성을 함락시켜 백제 옛 땅을 회복하고 675년에는 매소성 전투, 676년에는 기벌포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당은 웅진도독부를 건안성으로 옮기고 안동도호부를 평양으로 옮김으로써 신라는 당나라를 대동강 이북으로 몰아내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이러한 문무왕에 대해 한 쪽에서는 외세의 세력을 끌어들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다는 평가가 존재하지만 당시 신라로서는 고구려와 백제에 협공당하는 어려움 속에서 취했던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신라란 나라에 있어서 문무왕은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나라의 수명을 몇 백 년 연장시킨 왕이자 한민족 문화 기틀을 마련한 왕으로 추앙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문무왕은 자신의 업적을 기려 후대에 알리기 위해 큰 왕릉을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꼴 베고 소 먹이는 아이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가 그 옆에서 굴을 팔 것이니, 분묘를 치장하는 것은 한갓 재물만 허비하고 역사서에 비방만 남길 것이요, 공연히 인력을 수고롭게 하면서도 죽은 영혼을 구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면 마음이 쓰리고 아픈 것을 금치 못하겠으되, 이와 같은 것은 내가 즐기는 바가 아니다.” -삼국사기-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너무 큰 무덤을 만들지 말라고 당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삼국유사』에서도 “왕이 유언하신 말씀에 따라 동해 가운데 있는 큰 바위 위에 장사 지냈다.”라는 말을 했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대왕암인지 알 수는 없다고 합니다. 과연 우리가 알고 잇는 것은 문무왕의 무덤이 맞을까요. 아니면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잘못 알려진 것일까요.  세계에서 유일한 바닷 속 왕릉이 이라는 이 곳 안내판에는 마지막 줄 한 마디가 문무왕릉에 대한 진실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 한편 여기를 문무대왕의 유골을 뿌린 곳(산골처, 散骨處)이라고 보는 이도 있다.“
그리하여 이러한 문무대왕 수중릉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문무대왕릉이 신라 문무왕이라는 근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지적한 학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왕암은 경북 영일과 울산 등 동해안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대왕암 중 하나이며 고려시대 중기 이후에 주변에 감은사와 엮이면서 문무대왕과 연결되었다는 것입니다. 『삼국사기』 「속전」에는 왕은 돌아가시어 용이 됐으므로 그 돌을 가리켜 대왕석이라 한다.‘라는 구절이 있지만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대왕암이라고 볼 수 없으며 문무왕이 용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고려 중기부터 전승되기 시작하므로 역사로 받아들이기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고려중기부터 만파식적 같은 문무왕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왔고 나아가 해중릉이야기로 발전해나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덧붙이며 신라시대에는 지금보다 110cm 정도 해수면이 높았을 텐데 대왕암이 지금처럼 드러나 있을지도 의문스럽다고 하였습니다. 

문무왕으로 추정되는 또다른 곳, 가미새바위

사실 현재 알고 있는 문무대왕릉이 발견되기 이전인 1967년까지만 하더라도 괘릉이 문무왕릉이라 여겨 표지석까지 세워두었지만 후에 원성왕릉으로 고쳐졌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문무왕릉은 허술한 조사와 임의적으로 지정하는 과정에서 현재의 대왕암이 문무왕릉으로 전해지고 있다며 이를 연구한 한 학자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곳이 아닌 다른 곳이 문무대왕릉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그 곳은 바로 가미새바위입니다. 일단 그전에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문무왕릉에 대해서는 2001년 조사 당시 위에서 한 번 이야기한 것과 같이 복개석이 아닌 원래 있던 자연석이었고 1967년 당시 있었다는 용혈이라고 하는 큼직한 암혈 역시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이 문무왕릉에 대해 의문이 드는 건 당연했고 학계에서는 현재 이곳이 전 문무왕릉이라고 부르거나 문무왕릉을 추모하는 허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를 대신하여 문무왕릉이라고 추측되는 가미새바위는 보기만 해도 거대한 바위로 대왕암처럼 보입니다. 바위절벽으로 된 당수깨 언덕 아래 80m 정도 되는 거리에 이 바위가 있는데 이 거리가 세종실록지리지에서 말하는 거리와 유사하며 이 바위가 역사의 기록에서 말하는 거북머리모양과 닮았으니 신빙성이 더했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았던 문무왕릉, 이제는 그 존재가 의혹에 싸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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