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는 민족반역자인가, 삼국통일의 주역인가.
2023. 1. 17. 18:43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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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2년 고구려의 평양에서 중요한 회담이 열렸습니다. 그것은 당시 고구려의 실권자 연개소문과 신라에서 건너온 사신 김춘추의 만남이었습니다. 당시 김춘추는 왜 고구려로 사신으로 건너갔을까. 그보다 1년 전인 641년 백제 31대 왕인 의자왕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침공합니다. 이것은 선대 왕인 성왕이 신라의 전투에서 사망한 것과 관련 있을 것입니다. 당시 백제는 신라에 대한 침략으로 40여 성을 빼앗고 대야성을 함락시켰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침략의 과정에서 김춘추의 사위와 딸이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신라가 빼앗고 이후 성왕의 신라와의 전투에서 사망한 마당에 이에 대한 보복으로 김춘추의 딸과 사위가 죽었으니 백제와 신라는 도저히 함께할 수 없는, 아니 서로 칼을 겨눠야 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위기에 빠진 신라는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군사동맹을 이끌어내도록 하였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회담의 결과는 실패였지만 김춘추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건너갔을 때만 하더라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고 합니다. 고구려는 김춘추를 위해 잔치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조정 내에서는 김춘추가 상당히 비범한 인물이니 죽여서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 입장에서도 김춘추를 죽여 일부러 일을 만들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김춘추는 백제가 신라를 침범하여 어려움에 처하니 고구려의 군사를 얻어 이 치욕을 씻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보장왕은 경상북도 영주와 충청북도 단양을 잇는 죽령이 본디 고구려의 영토이므로 이를 내놓으면 군사를 보내주고 그렇지 않으면 살아서 돌아가지 못한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신라를 대표해서 왔으니 일개 사신인 김춘추입장에서는 대답하기 난감한 요구였습니다. 김춘추는 국가와 영토는 신하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문제이고 고구려는 신라와 친선할 뜻이 없어 보이니 이에 죽음을 각오할 수밖에 없다고 대답합니다. 이에 보장왕은 화가 나 김춘추를 옥에 거두어 버립니다. 사실 이러한 보장왕의 말도 당시 실권자인 연개소문에 의해 조정되어 나온 말일 가능성이 커보입니다.
이에 목숨을 잃을 위험에 처한 김춘추는 선도해에게 베 300필을 주고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에 선도해가 전한 이야기는 바로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입니다. 이에 힌트를 얻은 김춘추는 고구려의 보장왕에게 고구려가 요구한 땅은 본래 고구려의 것이니 신라에 돌아가 왕에게 돌려달라고 간청하겠다고 하고 고구려를 빠져나옵니다. 그리하여 고구려 입장에서는 김춘추를 풀어주도록 합니다. 당시 고구려가 김춘추를 풀어준 이유는 당시 그의 말 뿐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김춘추가 제 때에 돌아오지 못할 경우 아마 신라가 준비해둔 군사로 고구려로 넘어올지도 모른다는 압박감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 수준의 출병계획이 있었는지 모르나 김춘추는 김유신에게 자신이 위험이 빠지게 되면 구하러 와달라고 김유신에게 부탁을 해놓은 것입니다. 그렇게 고구려를 빠져나온 김춘추는 같이 동행한 고구려의 관리에게 보장왕에게 올린 글은 사실 거짓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김춘추의 외교행보는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때는 647년, 당시 왜는 친백제정권이던 소아씨를 타도하고 개신정권이 들어선 시기였습니다. 그리하여 김춘추는 왜로 하여금 친신라노선을 하도록 만들어 백제를 압박하도록 하였습니다. 당시 왜의 기록에서는 김춘추의 용모가 출중하고 담소를 잘하였다고 평해 그의 일본 방문이 긍정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일본 방문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는 신라뿐만 아니라 친당정책 그리고 백제와도 여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왜 입장에서는 백제를 통해 대륙문물과 선진기술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터라 이를 통해 오랜 기간 동안 백제와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당시 백제의 의자왕도 성장기 시절을 일본에서 보냈던 터라 사실상 김춘추의 왜 방문을 목적을 달성할 가능성이 매우 낮았습니다. 또한 650년에는 신라와 왜가 외교적으로 아예 틀어져 버리는 사건이 있었는데 신라 사신이 당복(唐服)을 하고 왜국에 입국한 것입니다. 왜에서는 이러한 신라 사신의 복장을 문제 삼아 아예 입경시키지 않고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또한 654년에 당고종이 왜왕에게 신라가 고구려나 백제의 공격을 받으면 군사를 일으켜 도우라는 글을 보냈으나 655년 신라의 성들이 함락되었을 때 일본의 군사움직임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왜에는 급찬 미무가 왔었다고 하니 김춘추의 왜 방문은 실패였습니다.
그럼 신라는 당나라에 어떠한 외교전을 펼쳤을까. 진평왕 47년인 625년 신라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가 길을 막아 당으로 갈 수 없고 자주 침범한다.’고 하였고 선덕왕 12년인 643년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를 자주 침범하여 군사를 빌려달라’고 했으나 당 태종의 요구한 세 가지 계책에 대해 적절한 답을 못해 소득을 볼 수 없었습니다. 648년에는 김춘추가 당에 들어가 태종을 만났습니다. 당시 김춘추는 “백제가 포악하고도 교활하여 자주 침범을 하였으며, 지난해는 대부대의 군사로 수십 성을 함락시킴으로써 입조할 길조차 막았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군사로써 흉악한 무리들을 잘라 없애지 아니한다면 우리 지방백성들은 전부 사로잡히게 되니 육로와 수로를 거쳐 조공할 일도 다시 바랄 수 없습니다.”고 말했고 이에 더해 ‘관리의 복식도 중국식으로 따르겠다.’고 하였습니다. 당 태종은 이에 승낙하였으나 당태종은 수 차례 고구려의 원정을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649년에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신라의 요청에 따라 군사를 준 일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 태종 이후에 즉위한 것은 당고종이었습니다. 이에 신라에서 건너온 사신은 바로 김춘추의 아들 김법민이었습니다. 그는 백제의 침공사실을 알리고 군사를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당고종은 신라 사신의 말이 공감하고는 당시 와 있던 백제 사신에게 ‘신라의 땅을 돌려주지 않으면 요수를 건너 쳐들어갈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이러한 조서를 내린 당고종은 고구려를 두 번 다시 침공하지 말라는 아버지 당 태종의 유언을 무시하고 고구려에 침공하였으며 그 전에 신라와 협공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백제의 멸망에 크게 기뻐한 것은 바로 김춘추였을 것입니다. 이전의 백제의 침략으로 자신의 딸과 사위를 잃었으니 그는 백제에 제대로 복수를 한 셈입니다. 당시 김춘추는 모척이란 자를 잡아 목을 베었는데 그는 신라인이었지만 백제로 도망했다가 검일과 함께 모의하여 신라의 대야성이 백제에 의해 함락되도록 모의하였으며 김춘추는 이에 검일도 사로 잡아 극형에 처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김춘추는 이들에게 죄를 열거하였는데 검일과 모척이 모의해 백제의 병사들을 끌어들이고 창고에 불을 질러 식량을 바닥나게 하여 신라의 패배를 이끌어낸 죄, 그리고 성주인 김품석 부부를 죽인 죄, 그리고 백제와 함께 신라를 공격한 것이 세 번째 죄로 말한 것입니다. 김춘추는 이후 661년 6월에 사망하게 되었는데 당시 시호를 무열(武列), 묘호를 태종이라 하였습니다. 692년에는 무측천이 사신을 보내 당태종과 같은 시호를 쓴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한 바 있는데 이에 신라에서는 무열왕이 어진 덕과 함께 김유신이라는 신하와 함께 삼한을 통일하였으므로 그 공이 작다고 할 수 없다고 하며 거절하는 답서를 보냈습니다. 사실상 무열왕이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왕으로 인정받았고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하여 평화를 가져오니 후대 신라의 왕들에게 극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사대를 통해 당나라와의 동맹을 이끌어냈으니 누군가는 이러한 부분을 아쉽게 여길 수도 있겠습니다. 역사학자 신채호 선생은 외세의 힘을 빌어 동족을 멸망시킨 것에 대해 세차게 비판했으며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은 무열왕의 외교적으로 우리나라가 이후 외국에 끌려다니며 하나로 뭉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누군가는 김춘추를 삼국통일에 공헌을 한 사람이라 평하고 또 누군가는 그를 민족반역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김춘추의 외교전은 과연 성공적이었을까. 만약 그의 외교가 실패했다면 우리나라 역사는 우리가 상상하는 좋은 쪽으로 흘러갔을까하는 점은 한 번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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