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혁거세 이야기
2023. 9. 25. 07:51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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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를 세운 사람은 박혁거세입니다. 고대국가의 시조가 다 그렇듯 박혁거세도 믿기 힘든 설화를 담고 있는데요. 큰 박 같은 알에서 태어났다 하여 박을 성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박혁거세의 탄생설화는 그 자체가 귀인으로 여겨질 수 있는데요. 박혁거세 거서간에서 거서간은 진한 사람들의 말로 왕이란 뜻으로 혹은 귀인을 이르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 거서간은 1대인 박혁거세에만 사용되고 있습니다. 박혁거세의 성이 박씨라고는 하나 당시 성씨의 개념은 없었습니다. 이름만으로 자신을 나타냈을 뿐입니다. 6세기까지 만들어진 신라의 금석문 자료에 지배층의 성씨가 확인되지 않는 것은 이런 사정을 반영합니다. 『양서(梁書)』 신라전에는 521년 당시 신라의 왕이었던 법흥왕을 ‘모진(募秦)’이라고 기록하였는데, 『남사(南史)』나 『책부원구(冊府元龜)』에서는 아예 왕의 성이 ‘모(募)’인 것처럼 잘못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만 하더라도 신라에는 성씨가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중국식 성씨를 따르지 않은 것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중국 측 기록에서 신라의 왕성(王姓)이 확인되는 것은 565년에 북제(北齊)가 진흥왕을 ‘사지절 동이교위 낙랑군공 신라왕(使地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으로 책봉하면서 왕의 이름을 ‘김진흥(金眞興)’이라고 표시한 것이 최초 사례이며 이 도 6세기 후반에 중국과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생각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박씨가 생겨났다고 볼 수 있는데요. 그렇다고 혁거세를 정점으로 하여 형성된 혈연집단이 상고기에 신라의 최고 지배층으로 존재했을 것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럼 당시 박혁거세는 어떻게 출현했을까. 서라벌에는 6촌이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철기를 사용했고 그에 따라 생산량도 증대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해결하는 능력까지 발전한 것은 아니었는데요. 아마 사람들은 경험자, 혹은 연장자로서 사람을 뽑아 그를 지도자로 삼고 갈등을 풀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도 한계에 부딪히게 되어서 새로운 지배자를 바깥에서 구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결국 혁거세의 탄생은 새로운 지배자의 탄생으로 서라벌에 있던 마을 일을 들을 처리하는 역할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토착세력으로 여겨지며 용의 갈빗대에서 탄생하였다는 것은 이후 불교설화의 영향을 받아 윤색되었다는 것은 추정하게 합니다. 사실 이러한 설화의 모습은 단군이 웅녀와 결합하거나 하늘의 아들 해모수가 토착여인과 결혼하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즉, 선진적인 외부세력이 해당지역에 와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토착세력과의 융합을 불가피했습니다.
사실 여기서 더해지는 의문은 박혁거세가 기원전 57년에 즉위했을까 하는데 이는 건국연대를 올린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의 즉위년이 갑자년이라는 것이 그것을 말해주는데 동양에서는 갑자를 통해 연도를 나타내는바 갑자년은 해당 연도의 첫해라는 것입니다. 진흥왕 대에 신라의 역사가 처음 정리될 때, 혁거세의 실제 즉위 시점을 파악하기 어려웠던 사관들이 갑자혁명설에 기대어 임의로 정했을 가능성이 거론한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2대 남해 차차웅의 재위 년도도 갑자년입니다. 즉 혁거세는 60년을 재위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박혁거세에 대한 역사상 인물로 격상시키려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남해 차차웅도 갑자년에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이 왕이 되었다. ‘차차웅’은 혹은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김대문(金大問)이 이르기를, “방언으로 무당을 일컫는다. 세상 사람들은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들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공경하였다. 그래서 존장자(尊長者)를 칭하여 ‘자충’이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혁거세(赫居世)의 적자이다. 신장이 크고, 성격이 침착하며 온후하고, 지략이 많았다. 어머니는 알영(閼英) 부인이다. 왕비는 운제(雲帝) 부인이다. 일설에는 아루(阿婁) 부인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를 계승하여 왕위에 올라 원년을 칭하였다.‘ 『삼국사기』
남해 차차웅이 왕위에 올랐으니 이를 원년이라 하였는데요. 공교롭게도 그 시기가 갑자년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왜지 끼워 맞춘 것은 아니냐는 느낌이 드는데요. 보통 왕이 그 해에 죽고 즉위하더라도 그 해는 이전 왕이 재위한 기간으로 보기 때문에 역사서에 기록될 때에는 다음 해가 즉위년도가 된다고 합니다. 즉 선대 왕이 몇 개월 즉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해를 새로운 왕의 해를 잡는다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진흥왕 대에 역사서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거꾸로 남해 차차웅을 기록하고 그 다음 박혁거세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나온 오류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라왕들의 기록이 이루어졌을 당시 사관들의 고민은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개국 시기의 기록은 당연히 빈약할 수밖에 없는데 그래도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차차웅이나 거서간에 기록은 적을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즉위년을 갑자년으로 잡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날 사량리(沙梁里) 알영정(閼英井)에서 계룡이 나타나서 왼쪽 옆구리로부터 동녀(童女)를 낳으니 자색이 뛰어나게 고왔다. 그러나 입술이 닭의 부리 같은지라 월성(月城)북천(北川)에 가서 목욕을 시켰더니 그 부리가 퉁겨져 떨어졌으므로 그 천의 이름도 따라서 발천(撥川)이라 하였다. …(후략)’ 『삼국유사』
지난 2021년에는 신라왕경 핵심 유적 복원 정비사업의 하나로 추진 중인 경주동부사적지대(발천) 수로 복원 정비를 위한 발굴작업을 벌인 결과, 신라 첫 번째 왕의 왕비 ‘알영’과 관련된 ‘발천’이라는 하천, 수로, 돌다리 터(석교지), ‘석교지’ 연결도로와 수레바퀴 자취 등의 흔적을 발굴했다고 알려왔습니다. 발천은 ‘경주 동궁과 월지’에서 월성 북쪽과 계림을 지나 남천으로 흐르는 하천을 가리키는데, 신라 시조 박혁거세 왕의 비인 알영이 전설이 내려온다고 합니다. 이러한 유적의 발견이 삼국유사에 실린 박혁거세 설화를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적어도 그저 야사로만 생각했던 신라의 건국신화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합니다.
이와 박혁거세와 관련 지을 수 있는 이야기는 더 전해져 오는데요. 중국 황실의 딸 사소는 어려서 신선의 술법을 익혀 동쪽 나라에서 살더니 오래도록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황제가 솔개의 발에 편지를 묶어 부치면서 “솔개를 따라가 멈추는 곳에 집을 지어라”고 했습니다. 사소는 솔개를 따라 선도산에 집을 짓고 신선이 됐는데, 이 산을 서연산이라고 불렀습니다. 신모가 처음 진한에 왔을 때 성스러운 아들 혁거세를 낳아 동국의 첫 임금이 되게 했습니다. 그리고 신모는 신선이 돼 선도산에 오래 살면서 많은 덕을 베풀었다고 하니 이것이 바로 『삼국유사』에 나오는 「선도성모수희불사(仙桃聖母隨喜佛事)」이야기입니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조선의 대문호 서거정(1420∼1488)은 <필원잡기>에서 삼국사기의 편저자 김부식이 중국에 가서 이들 중 누군가가 황제의 손자라는 이야기를 들은 일화를 소개합니다. 『필원잡기』에 의하면, 김부식이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는데 그를 맞이한 중국 관리는 김부식이 역사학자라는 것을 알았는지 우신관이라는 건물 안에 놓인 여자신선상을 가리키며 "이 상은 귀국의 신이다. 누구인지 아시느냐"고 물었습니다. 김부식이 머뭇거리자 중국 관리가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옛날 황제의 딸이었던 여자 선녀는 남편이 없었음에도 회임을 하여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바다를 건너가 진한에 이르러 아들을 낳으니 해동의 첫 임금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지선이 되어 선도산에서 영생하고 있습니다."다 하니 서거정은 "신라, 고구려, 백제의 시초에 황제의 딸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며 "아마도 중국에서 잘못 알고 이런 말이 나온 것이 아닌가"라고 해석했는데요. 진한이 신라의 옛 지역이고 경주 효현동에 실제 신도산이라는 곳이 있으니 여기서 말하는 해동의 첫 임금이 박혁거세인가 추측하지만 선도성모가 중국 제실의 딸이라는 점은 당대의 가장 발달한 문명국가에서 건너온 고귀한 혈통이라는 걸 강조하여 신라가 문명국임을 드러내고자 하는 남북국시대에 덧붙여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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