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서간 다음은 남해 차차웅

2023. 9. 26. 07:51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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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차차웅은 신라 제 2대 국왕으로 혁거세 거서간과 알영 부인의 아들입니다. 제 1대 박 혁거세와는 달리 남해에게는 차차웅이라는 명칭이 붙었는데요. 김대문(金大問)은 말하기를, “차차웅이란 무당을 이르는 방언(方言)이다. 세상 사람들은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기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하고 공경한다(世人以巫事鬼神尙祭祀故畏敬之)”고 했습니다. 이는 신라왕이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제사장의 위치에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반론도 있는데요. 중국에서는 이미 기원전 221년에 진시황에 의해 통일되고 황제의 강력한 중앙집권 정치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이전에도 이미 제정일치 사회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신라의 개국시점은 그로부터 한참 지난 뒤였는데 그 시점에서도 과연 제정일치 사회였을까하는 것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차차웅의 ‘웅’은 환웅의 붙은 웅과 같은 것으로 보며 왕이나 우두머리로 본다는 것인데 그렇게 된다면 차차웅은 ‘두 번째 왕’이란 뜻이 됩니다. 
‘두 분(혁거세와 알영)의 성인이 세상을 떠나시고 내가 백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나, 이는 잘못된 일이다.’ 『삼국사기』
이러한 기록은 남해차차웅이 혁거세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은 것이 아니고 백성들에 의하여 추대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박혁거세는 61년 간 나라를 다스리고 하늘로 올라갔는데 7일 후 시신이 땅에 흩어져 떨어졌고 왕후도 세상을 떠나니 사람들이 합장을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큰 뱀이 방해를 하여 오체를 제각각 장사지내 오릉(五陵) 또는 사릉(蛇陵)이라고 했습니다. 『삼국유사』에서 이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데 이 기록에 대해서는 시신마저 제대로 수습해서 장사지내기 어려웠던 상황 묘사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에 대해 인도의 경전 『리그베다』에 나오는 변재천녀(辨才天女) 설화를 차용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관련 설화를 소개하면, “변재천녀가 죽어서 승천하였는데, 7일 만에 유체(遺體)가 다섯으로 나뉘어 땅에 떨어졌다. 이를 모으고자 하였으나, 큰 뱀이 방해하여 오릉에 묻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이에 대해 『리그베다』에는 해당 설화가 나오지 않는다는 반박도 제기되었습니다. 
‘두 마리 용이 금성 우물에 나타나더니 폭풍우가 심하게 불고 성의 남문에 벼락이 떨어졌다.’
두 마리의 용은 박혁거세의 왕위를 두고 다툼을 벌인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여기서 승자가 남해가 된 것입니다. 

‘원년(4) 가을 7월에 낙랑(樂浪) 병사들이 와서 금성(金城)을 여러 겹으로 에워쌌다. 왕이 좌우 신하에게 말하기를, “두 성인이 나라를 버리시고 내가 국인들의 추대로 왕위에 그릇되게 거하게 되어 위태롭고 두렵기가 마치 하천의 물을 건너는 것 같다. 지금 이웃 나라가 침략해 온 것은 나의 부덕이라 하겠으니, 어찌하면 되겠는가?”라고 하니, 좌우 신하들이 대답하기를, “적들이 우리에게 상(喪)이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고 망령되게 병사를 동원하여 왔으니 하늘이 반드시 도와주지 않을 것입니다.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적이 얼마 있지 않아 물러나 돌아갔다.‘ 『삼국사기』
이러한 기록을 본다면 남해 차차웅이 즉위 당시에 반대세력이 많았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라 혁거세의 딸로 아로가 있습니다. 제2대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과는 남매간입니다. 한편 남해차차웅의 왕비는 아루부인(阿婁夫人)으로 나타나며 아로는 이 아루부인과 같은 인물이면서도 남해차차웅과 남매 관계에 있다고 하였던 것으로 보기도 한합니다. 아로는 신라 최초의 국가 제사인 시조묘(始祖廟)의 제사장이었습니다. 『삼국사기』에서는 남해 차차웅의 부인으로 운제부인도 나타나고 있으나 아로부인과 동일인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에는 제2대 남해차차웅이 즉위 3년에 시조를 제사 지내기 위한 시조묘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신라 초기의 왕비 이름을 보면 시조비 알영을 비롯하여 아루, 아로, 아니, 아이혜 등 알(ar)계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알(ar)계 이름은 단순한 개인 이름을 뜻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신라 왕실의 제사를 관장했던 종교적 직능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렇다면 아로 이후에도 신라에서는 알(ar)계 이름으로 나타나는 왕실 여성이 국가 제사에 관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알(ar)계 왕비의 이름은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이 시기는 왕의 칭호를 마립간이라고 칭하고 있으며, 마립간기 말기에 국가 제사의 중심도 신궁 제사로 바뀌고 있습니다. 즉, 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의 변화는 왕의 호칭만이 아니라 국가 제사 체계에도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남해 차차웅에 대해서 의문이 드는 것은 그 뿐만이 아닌데요. 그가 만약 정상적인 방법으로 왕위를 이어받은 것이 아니고 쿠데타나 그와 비슷한 형태로 이은 것이라면 그가 과연 박혁거세의 아들일까 하는 점입니다. 히 『삼국유사』는 남해왕이 박혁거세(알영부인 포함)를 죽인 다음 박혁거세 시신을 다섯 갈래로 분리하여 따로따로 매장했다고 했으니 그 둘이 부자관계라면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 나라 왕은 본래 백제인이다. 바다로 도망해 신라로 들어가 마침내 그 나라 왕이 되었다. 대대로 왕을 이어와 김진평(26대 진평왕)에 이르렀다.’ 『수서』

이를 통해 남해왕이 백제인 출신의 왕 후보로 생각하는데요. 『북사』에서도 ‘백제 사람이 신라에 들어가 왕이 되었다.’에 이어 ‘그 나라는 처음에 백제에 부속되었었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백제인이 신라의 왕이 되었다는 기록인데요. ’남해(南解)는 ‘남쪽으로 간 해(解)씨’를 가리킵니다. 해씨는 백제왕족(시조 해온조)의 고유 성씨입니다. 남해왕의 왕비 이름은 ‘아루(阿婁)’가 있습니다. ‘루(婁)’는 백제초기 왕인 다루왕(2대), 기루왕(3대), 개루왕(4대)의 ‘루(婁)’와 같습니다. 개구리(蛙)를 지칭하는 말로 백제에서는 귀하게 쓰인 글자입니다. 따라서 남해와 아루는 이름이 말하듯이 백제와 관련이 깊습니다. 두 사람이 백제 출신이라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또한 남해 차차웅은 박혁거세가 사용한 거서간을 버리고 차차웅을 사용하여 이전 시기와 차별을 꾀했습니다. 따라서 남해왕은 백제 제사장 출신으로 백제왕녀 아루와 연을 맺고 이후 어떤 사연으로 백제에서 쫓겨나거나 남해가 백제왕녀 아루와 눈이 맞아 제사장에서 쫓겨난 뒤 신라로 건너가 반란을 일으켜 박혁거세와 알영을 죽이고 신라왕에 즉위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이야기의 후보로는 남해왕 말고도 더 이야기할 수 있는데요. 『북사』에서는 ‘세대를 전하기 30대 진평왕에 이르다.’라고 하니 그 왕은 신라의 초창기 왕으로 보여집니다. 그런데 진평왕의 선조라고 하므로 박혁거세를 거론할 수 있으나 그의 출신은 이미 큰 알에서 태어났다고 『삼국사기』등의 고서에서 찬술한 바 있으며 그의 재위기간동안 백제와 연결 지을 수 있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리하여 진평왕의 씨족 조상 중 시조로 볼 수 있는 미추왕을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조상은 김알지이므로 그는 황금 궤에서 나온 아기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를 바다를 건너온 백제인이라고 연결짓기에는 무리수가 따릅니다. 그나마 비슷한 시기에 바다를 건너온 출생이야기를 담은 사람이라면 석탈해를 꼽을 수 있습니다. 석탈해는 바다를 건너온 만큼 그의 출생에 대해 불분명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백제라고 확정지을 수 없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수서』나 『북사』를 저술하는 사람들이 신라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던 상황에서 신라를 백제의 소국으로 폄하하는 어느 사람의 말을 들어 적었다고 하는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물론 역사서에서 오기는 있을 수 있으나 문제는 이것의 상당수는 잘못 기술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백제인이 건너와서 신라의 왕이 되었다는 기술을 믿지 못하는 것은 이것을 연결지을 수 있는 내용을 국내 사료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인데요. 과연 남해 차차웅은 정말 박혁거세의 아들인지 아니면 외부세력인지 알 수 없습니다. 신라는 박씨, 김씨, 석씨가 차례대로 왕위를 계승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어쩌면 그것보다 더 복잡한 과정에 의해 신라의 왕위가 이어졌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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