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초기 명장 석우로

2023. 9. 28. 07:52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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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초기에는 왕이 있었으나 친위대는 없었다고 합니다. 친족과 예속민으로 구성된 병력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주력부대는 육부의 주요 씨족들과 그 예속민들로 구성된 부대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나해 이사금은 다른 육부의 눈치를 살펴야 했습니다. 신라 근처에 낙랑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신라보다 더 발전된 나라였습니다. 신라의 왕은 낙랑에게서 선물 받은 것으로 몸을 치장하였고 이를 통해 신라의 통치권을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조분이사금은 신라 11대 왕이었습니다. 그는 제9대 벌휴 이사금의 장남이었던 석골정의 장남입니다. 내해 이사금(제10대)이 비록 차남 석이매의 아들이라 순서에서 밀리지만 백부인 석골정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조분 이사금은 내해 이사금의 딸 아이혜부인(阿爾兮夫人) 석씨와 혼인해서 내해 이사금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재위기간동안 대외 전쟁이 활발했는데 조분 이사금 본인의 업적보다는 전쟁을 주도했던 석우로의 일이 많았습니다. 즉 신라의 장군하면 이사부나 김유신을 떠오르는데 그들의 모습의 대선배는 바로 석우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석우로는 제10대 내해 이사금의 아들이자 제11대 조분 이사금의 큰사위였습니다. 기록이 모호한 신라 초기에서도 여러 전쟁에서 활약한 몇 안 되는 명장입니다. 장인인 조분 이사금 시대에 대장군으로서 경상도 지역 안쪽의 신라 주변 소국의 반란이나 고구려, 왜의 침략을 방어해내며 맹활약했습니다. 
석우로의 아버지가 내해 이사금(10대)으로 석우로는 태자였습니다.  그리하여 11대 신라왕의 자리는 그가 될 수 있었지만 조분 이사금이 되었습니다. 석우로는 왕이 되진 못했지만 조분 이사금 즉위 직후 곧바로 대장군은 물론 최고관직인 서불한에 임명되었고, 조분 이사금의 딸 명원부인 석씨와 혼인했습니다. 이로써 석우로는 부왕 내해 이사금 재위 당시의 석조분이 그러하였듯 왕위 계승서열 1순위가 되었으나 12대 신라 임금은 첨해이사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무장으로 활약하며 그 공이 컸습니다. 231년 7월 석우로는 지금의 김천시에 있었던 소국 감문국을 정벌하며 이름을 높인 것입니다. 또한 그는 솔선수범하는 장군이었다고 합니다.  고구려가 쳐들어와서 그걸 막으러 북쪽으로 갔을 때, 음력 10월인 겨울이어서 갑자기 한파가 불었습니다. 때문에 군사들이 힘들어하자 우로는 직접 나무를 해서 불을 피우며 병사들을 배려하고 거기에 병사들이 감격했다고 합니다. 
232년, 침입한 왜군은 왕경 깊숙이 침입하였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침입은 있었지만 왕성을 포위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습니다. 이에 백성들과 군사들은 반월성으로 피신하였습니다. 조분이사금은 성문을 굳게 닫고 왜군의 식량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식량이 떨어질 때 즈음이면 나가서 왕이 직접 나아가 싸웠습니다. 왜군들은 지쳐 있었기 때문에 신라군의 기세에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왜군들을 신라군이 추격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1000여 명의 왜군이 참살되거나 포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듬해에도 노략질은 계속되었습니다. 
‘〔4년(233)〕 가을 7월에 이찬(伊湌) 우로(于老)가 사도(沙道)에서 왜인(倭人)과 싸웠는데, 바람의 방향을 따라 불을 놓아 적의 배를 태우니, 왜적이 바다에 빠져 모두 죽었다.’ 『삼국사기』

왜군이 침입한 것은 233년 5월이었습니다. 그런데 7월이 되어서야 병력이 출동했습니다. 당시 병력들은 귀족들의 휘하에 있었고 그들의 동의를 얻어야 군대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 귀족들이 싸움에서 병력을 잃을 경우를 우려하여 난색을 표하기도 했습니다. 사도는 지금의 영일로 모래밭은 육지에서 바다쪽으로 경사져 있었습니다. 왜군은 배와 배 사이에 천막을 쳐 막사를 만들고 대열을 정비했습니다. 그리고 신라군의 기습에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저녁이 되자 육지 쪽의 높은 곳에 있던 신라군 진영에서 불덩어리가 날아왔습니다. 왜군은 피하려고 해도 뒤로는 바다가 있어 불리했습니다. 이에 창을 든 신라군들이 돌진해 왔고 왜군들은 참패하고 말았습니다. 왜군은 이 일로 한동안 신라를 침략하지 못하고 외교교섭에 나서야 했습니다. 
이찬직에 있던 석우로는 15년(244) 봄 정월에 서불한(舒弗邯)에 임명되었습니다.  서불한은 신라 경위 17관등 중 제일 높은 이벌찬(伊伐湌)의 이칭이라고 합니다. 신라 초기에 제1, 2관등인 서불한(舒弗邯)·이벌찬(伊伐湌), 이찬(伊湌)의 임명 기사에 그들에게 군사와 국정운영을 맡겼다는 표현이 같이 나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군사에 대한 업무만 기록되었더라도 이미 그 이전부터 석우로는 군사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으므로, 서불한 이전부터 국정과 군사를 모두 총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당시 이들이 책임을 맡았던 군사와 국정이 엄격히 구분되는 업무 분야는 아니었다고 여겨집니다. 이찬 등이 관직이 아니므로, 군사와 국정이 이찬 등의 고정적인 직무라 하기는 힘들고, 아직 관직과 관등이 분화하지 않은 상황에서 최고 직위의 역할을 서술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던 첨해이사금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에도 왜구들은 괴롭혀왔습니다. 갖은 요구를 하면서 사신을 보낸 것입니다.  이에 대해 괴로워하던 왕을 대신하여 사신을 맞이하게 된 것은 석우로였습니다. 왜의 사신 갈라고는 임금님의 며느리를 맞이하려고 왔다고 하니 이에 석우로는 왜왕은 아들이 몇이기에 자주 며느리를 구하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갈라고가 20여 명은 되다고 하니 한 배에 몇 명이나 낳냐 하니 석우로의 말투는 왜 사신 갈라고를 무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이에 왜사신이 신라의 여인이 일 잘한다고 하니 얻어가려 한다고 하니 석우로는 신라여인을 종으로 삼으려 한다고 불쾌감을 드러내더니 급기야 이 한 마디로 선을 넘고 말았습니다. 
‘왜왕을 붙들어다가 신라의 소금 굽는 종으로 삼고 왕비는 데려다가 부엌데기로 만들어야겠는걸’ 
이 말을 들은 왜의 사신은 첨해이사금에게도 알리고 왜왕에게도 알렸습니다. 이에 왜왕은 분개하여 신라로 침입하였습니다. 이에 석우로는 자신이 책임지겠다며 왜의 진영으로 나갔습니다. 자신의 병력을 데리고 나왔으나 병력의 사기는 떨어져 있었습니다. 석우로는 왜의 진영에 가서 단지 농담을 던졌을 뿐이다라고 했지만 왜의 군사들이 들이닥쳐 그를 포박하고는 화형에 처했습니다. 왕의 아들의 죽음에도 신라 상층부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신라의 명장 석우로라도 한 마디의 말로 전쟁을 불러왔다는 점에서 비난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갑작스럽게 남편을 잃게 된 명원부인은 복수를 다짐했습니다. 몇 년이 지난 뒤 13대 미추이사금 때에 왜국에서 사신이 왔습니다. 명원부인은 미추이사금에게 나아가 자신이 왜국 사신을 접대하겠다고 청하였습니다. 왕이 허락하자 명원부인은 사신을 집으로 초대하여 융숭하게 대접하였습니다. 명원부인의 접대에 기분이 좋아진 왜국 사신은 술을 마시고 몹시 취했습니다. 이때 명원부인은 힘이 센 장사를 시켜 왜국 사신을 뒤뜰로 끌고 가게 했습니다. 그러고는 왜인이 남편에 했던 것과 같이 사신을 불태워 죽였습니다. 이 일로 왜군이 다시 신라의 수도인 금성(金城)을 침공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이후 남편을 대신하여 복수한 명원부인도 신라의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처형당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신하의 복수를 위해 신라로 쳐들어왔던 왜군도 철수했습니다. 이 일은 신라와 일본의 역사서에 기록되었으며 이후 군신들은 명원부인의 아들 흘해를 왕으로 추대하니 그 사람이 신라 제16대 흘해이사금입니다. 
석우로의 죽음에 대해서 왕위계승과정에서 희생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요. 우로가 왜의 사신에게 모독적인 직접 했는지도 의심스러우며 당시 첨해이사금은 친왜적인 대외정책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거되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일국의 재상이 제거되었음에도 첨해이사금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점은 사실상 방관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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