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물왕의 즉위와 고구려의 속국이 된 이유

2023. 9. 30. 07:54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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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내물 마립간은 김씨 시조 김알지의 8세손이며 아버지는 김구도의 아들인 말구(末仇)이며, 어머니는 휴례부인(休禮夫人)입니다. 아내는 미추 이사금의 딸 보반부인이라고 합니다. 
‘흘해가 죽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내물이 뒤를 이었다.’ 『삼국사기』
별다른 이야기 없이 왕위에 오른 내물왕입니다.  다만 기록에 대해선 의구심이 갖게 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보반부인에 대한 기록입니다. 보반부인에 대해 미추왕의 딸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미추왕은 284년에 사망하였고 내물왕은 356년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보반부인이 미추왕이 죽는 해에 태어났다하더라도 356년에는 73살이 됩니다. 그런데 신라의 관습을 보면 대개 왕이 왕비보다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러면 내물왕은 70대 중반에 즉위했을 것입니다. 그의 출생기록이 물음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서도 내물왕은 46년 동안 왕위자리를 유지하였습니다. 재위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백제의 최전성기를 구가한 근초고왕, 고구려의 최전성기를 연 광개토대왕과 재위기에 있었던 것으로 그의 치세기간을 더하여 죽었을 때는 내물왕은 120살가량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그렇게 고령의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었을 때 장자 눌지의 나이가 어려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눌지 밑으로는 아우가 있었습니다. 바로 복호나 미사흔 같은 아우들인데 그렇게 본다면 내물왕의 사망당시에도 왕비는 임신이 가능한 연령이었을 것이고 그리하여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으로 보고 있습니다. 결국 내물왕이 죽었을 때 보반부인의 나이는 100살을 넘겼을 것인데 정황으로 보면 맞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망하였을 당시 내물왕은 70에 가까운 나이였을 것이고 보반부인이 임신이 가능했다면 내물왕과 보반부인의 나이차는 30년 정도 났을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내물왕에게 보반부인이 첫 부인일까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바꾸어 이야기하면 내물왕에게 보반부인은 첫부인이 아닐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그럼 미추왕이 손녀이거나 증손녀가 보반부인은 아닐까요. 하지만 미추왕에게 아들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럼 미추왕의 딸에게서 나온 자식인 보반부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수 없는 근거는 없습니다. 단순 추정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내물왕은 어떻게 왕이 되었을까 궁금해집니다. 보반부인이 미추왕의 딸도 아닐 것이고 그렇다고 사위도 아니었으니 즉위에 대한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조작입니다. 내물왕을 왕위를 만들 명분을 만든 것입니다. 이것은 내물왕이 사실 왕이 될 명분이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황남대총 남분에서 내물 마립간의 유해로 보이는 뼈의 나이가 60대였는데 이 뼈가 진짜 내물 마립간의 뼈라면 내물 마립간은 330년대 중반에서 340년대 초반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반면 보반부인이 내물왕이 죽었을 당시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의 나이였다면 그 둘의 나이차는 20년이 넘었을 것입니다. 즉 내물왕이 즉위할 당시에는 보반부인은 그이 부인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너무 어려서이기도 하고 내물왕에게는 다른 부인이 있었을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그가 356년 4월 내물왕대부터 912년 4월 제52대 효공왕대까지 556년간 이어지는 경주 김씨 왕조의 시작점이 되는 왕이었고, 신라 왕조의 중시조에 해당하는 인물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이전까지 박씨, 김씨, 석씨가 왕위를 돌아가며 맡았다는 것과 다른 것이며 이전 왕이 흘해이사금으로 석씨였습니다. 내물왕이 된 이후로 상당기간동안 다른 성씨의 왕위 재위가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후로 석씨가문은 왕비조차 배출하지 못했는데요. 이는 박씨 가문에서는 적어도 왕비는 배출되었다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는 흘해 이사금이 죽고 나서 석씨와 김씨 가문 사이에서 왕위를 둘러싸고 큰 다툼이 있었고 과정에서 김씨가 이긴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김씨 가문은 연합세력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박씨입니다. 내물왕 등극 이후 신라 왕실은 김씨가 차지하게 되고 석씨는 완전히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2년(357) 봄에 사자를 보내 홀아비·홀어미·고아·자식 없는 늙은이를 위로하여 각각 곡식 3곡(斛)을 사여하고, 효제(孝悌)에 남다른 행실이 있는 사람에게 직급 한 등급을 〔올려〕 주었다.’ 『삼국사기』
‘3년(358) 봄 2월에 몸소 시조묘(始祖廟)에 제사를 지냈는데 자줏빛 구름이 묘 위를 감돌고 신비로운 새가 묘의 뜰에 모였다.’ 『삼국사기』
내물왕이 왕이 되고 나서 민심을 달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치열한 왕위 싸움을 종결하고 그에 따른 혼란을 겪었을 백성들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한 조처일 것입니다. 그러면서 즉위 3년이 되어 시조 묘에 제사를 지내니 그가 정식으로 왕위를 이었다는 것을 알릴 수 있을 정도로 안정기에 접어든 것입니다.
‘9년(364) 여름 4월에 왜병(倭兵)이 대거 이르렀다. 왕이 이를 듣고 대적할 수 없을 것을 두려워하여, 풀로 허수아비 수천 개를 만들어 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서 토함산(吐含山) 아래에 나란히 세워두고, 용맹한 군사 1,000명을 부현(斧峴)의 동쪽 들판에 매복시켰다. 왜인(倭人)이 무리가 많음을 믿고 바로 나아가니, 매복한 군사가 일어나 불의에 공격하였다. 왜인이 대패하여 달아나자 추격하여 그들을 거의 다 죽였다.’ 『삼국사기』
내물왕시기에 왜군이 쳐들어왔으나 허수아비군대를 통해 이를 물리쳤으며 백제와 화친관계를 맺으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하지만 신라와 백제 사이가 냉각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373년에 백제 독산성의 성주가 300명을 데리고 신라로 투항했습니다. 내물왕은 이를 받아들여 각각 6부에 나누어 살게 했습니다. 백제왕이 문서를 보내 말하기를, “두 나라가 화친을 맺어 형제가 되기를 약속했는데, 지금 대왕께서 우리의 도망한 백성을 받아들이니 화친한 뜻에 매우 어긋난다며 항의했습니다. 
‘백성은 일정한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각이 들면 오고 싫어지면 가버리니 진실로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대왕은 백성이 편안하지 않음을 걱정하지 않고 과인을 나무라시는 것이 어찌 이렇게 심하십니까.’

내물왕의 답변에 백제는 더 이상 반응하지 않았으나 이들의 사이는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또한 한 해 전에는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어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떠도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사자를 보내 창고를 열어 그들을 진휼하게 하였으니 그러한 상황에서 독산성주와 그 주민들을 받아들인 것은 꽤 의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물왕의 재위 기간 백제와 고구려의 상황은 치열했습니다. 369년 9월에는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2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의 치양을 공격하였으며 371년에는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으로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전사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373년 백제의 독산성주가 신라로 투항하였습니다. 이후 391년에 광개토대왕이 즉위합니다. 
‘37년(392) 봄 정월에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냈다. 왕은 고구려가 강성하였기 때문에 이찬(伊湌)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을 보내 볼모로 삼았다.’ 『삼국사기』
이 기록에 대해 신라에서는 나물왕이 석씨계와 연결된 실성을 견제하기 위해 볼모 파견을 활용한 것으로 이해되며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대대적인 백제 정벌을 앞두고 신라를 고구려의 영향권 아래 강하게 종속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395년에는  말갈이 침입하자 이를 쳐부수었으며 400년에도 왜군이 침입하여 고구려가 5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물리치기도 했습니다. 동년 겨울 10월에 왕이 늘 타던 내구마(內廐馬)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우는 일이 기록되었는데 아마 고구려에 구원받은 일로 고구려의 사신에게 늙은 내물왕이 고구려의 속국이 되겠다고 맹세한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을 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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