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두 동생을 구한 신라 충신 박제상

2023. 10. 1. 07:54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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눌지 마립간은 17대 내물 마립간의 장남이고 제18대 실성 마립간의 종질(從姪)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내물 마립간은 서기 400년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록대로 백제, 왜, 가야의 3국 연합군의 침공과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지원군 파견, 신라의 속국화에 충격을 받아 몸져누운 끝에 승하했다고 하는데요. 그러면 눌지가 왕이 되어야 했지만 나이가 너무 어렸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왕위에 오른 것은 눌지의 오촌 당숙인 실성왕이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었습니다. 그의 용모에 대해 ‘키가 7척 5촌이나 되고, 사람됨이 똑똑하고 빼어나서 미래를 볼 줄 알았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 있다가 401년에 갑자기 왕이 되었으니 아마 신라 내부에는 그를 지지할만한 세력이 없었음에도 그가 왕이 된 것은 그의 등극에 고구려의 힘이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실성의 어머니가 석씨인데, 내물 이사금의 즉위로 왕위를 잃어버린 석씨가 자신들의 영향력을 다시금 확보하기 위해서 석씨 왕실의 피가 섞인 실성을 지지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즉위년(402년)에 내물 마립간의 3남 김미사흔을 왜와 화해하기 위해 인질로 보내고 412년엔 2남 김복호를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는데요. 그가 타국에 볼모로 보낸 미사흔과 복호는 전왕의 친아들들이니 실성 마립간의 최대 정적을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실성왕은 복호를 고구려로 보내 본인의 친고구려 노선을 재차 확인시키려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흔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왜구의 침입이 있었는데요. 미사흔이 인질로서 그다지 가치가 없었다든지 하는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습니다. 한편 눌지는 당숙인 실성왕의 딸 아로부인과 혼인했는데 이를 통해 실성왕은 눌지의 모든 것을 감시하려 했습니다. 이는 실성왕이 눌지도 부담스런 상대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417년 실성왕은 눌지를 불렀습니다. 신라로 들어오는 고구려군을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성왕은 자신이 알고 지낸 고구려장수로 하여금 눌지를 제거하려는 음모였습니다. 눌지는 이 계략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고구려장군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러한 눌지의 모습이 당황함이 없었는데  이에 고구려장수는 마음을 바꿉니다. 
‘왕은 전왕의 태자인 눌지(訥祗)가 매우 덕망이 있는 것을 꺼려 그를 해치려고 하였다. 그래서 고구려에 군사를 청하고 거짓으로 눌지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군사들은 눌지가 어진 행실이 있는 것을 보고, 곧 창을 거꾸로 돌려 왕을 죽이고 눌지를 왕으로 삼은 뒤 돌아갔다.’ 『삼국유사』

고구려장수는 눌지에게 실성왕의 눌지 제거계획을 알렸습니다. 그래서 이에 눌지는 오히려 역공을 가하게 되는데요. 고구려군은 왕경으로 들어왔습니다. 실성왕은 눌지의 제거소식을 기다리며 고구려군을 맞이하여 성문을 열어주었지만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삼국사기』에서는 눌지가 스스로 실성 마립간을 죽이고 임금이 됐다고 했지만 『삼국유사』에서는 고구려군이 눌지를 임금으로 앉혔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상 눌지가 고구려군과 손을 잡고 왕위를 빼앗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실성왕도 친고구려파였으나 눌지로 교체당한 것은 고구려에게 있어 자신들이 이용하기에 가치가 있는 사람은 눌지로 판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구려로 인질로 가 있는 복호는 실성왕에게는 정적 제거용이었지만 눌지에게는 동생이었습니다. 이미 고구려에 잡혀 있는 인질 복호의 이용가치를 높이기 위해 고구려는 실성왕을 내쫓고 눌지를 내세운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왕위에 오른 것은 눌지에게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눌지왕 자신도 언젠가 실성왕처럼 내쫓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복호는 고구려에, 왜에 미사흔을 보낸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 때 눌지 마립간 앞에 나타난 충신이 있었으니 그는 박제상이었습니다. 그는 김제상(金堤上)이라고도 하며 『삼국사기』에 박제상은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으로 제5대 파사이사금의 5대 손이며 할아버지는 아도(阿道)갈문왕(葛文王), 아버지는 파진찬(波珍飡) 물품(勿品)으로 되어 있으나 신빙성은 없다고 합니다. 눌지왕의 명을 받들어 박제상은 고구려로 갔습니다. 그는 장수왕 앞에 나아가 이야기했습니다. 
‘신이 듣건대 이웃 나라와 사귀는 도리는 정성과 믿음뿐이라고 했으니, 질자를 교환하는 것과 같은 일은 5패(五覇)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인지라 진실로 말세의 일입니다. 지금 저희 임금의 사랑하는 아우가 이곳에 있은 지 이제 거의 10년이 되어갑니다. 우리 임금께서는 어려움에 처한 형제를 생각하는 뜻을 오래도록 가슴에 품어 마지않으시니, 만약 대왕께서 은혜롭게 돌려보내 주신다면 마치 아홉 마리 소에서 터럭 하나 빠진 것과 같아 손해될 바가 없겠거니와, 우리 임금께서 대왕께 입는 은덕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왕께서는 그 점을 살피소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장수왕은 복호를 신라로 데려갈 것을 허락합니다. 눌지왕은 즐거워하였지만 그의 고민거리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다른 아우 미사흔이 아직 왜에 있었습니다. 이때에도 박제상이 나섰는데 그는 고구려는 대국이고 왕도 어진 사람이기에 말로써 깨우칠 수 있으나 왜는 말로써 달랠 수 없다고 하며 계책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왜로 가거든 반역의 죄를 씌우고 그 소식을 왜에 전달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죽기로 하고 왜로 떠난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박제상의 아내는 포구로 달려갔으나 제상은 이미 출항하였습니다. 그는 왜에 도착해서는 자신이 모반을 도모하다가 도망쳐 나왔다고 거짓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이에 더해 백제인이 왜에 건너와 신라가 고구려와 도모하여 왜를 치려 한다고 거짓말한 적이 있으며 이에 왜는 신라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사람을 보냈는데 신라에 있던 고구려인들에게 발각되어 죽었습니다. 이로 인해 왜에서는 백제가 한 거짓말을 진실로 받아들였고 여기에 더해 미사흔과 제상의 가족이 갇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자 제상의 말을 더욱 믿었습니다. 하지만 제상은 이미 미사흔을 보낼 생각으로 왔습니다. 왜왕은 고구려와 신라가 침입하기 전에 먼저 신라를 습격하기로 하고 제상과 미사흔에게 길안내를 맡겼습니다. 그리고 신라를 멸하고 제상과 미사흔의 처자를 잡아오는 일에 대해 구상했습니다. 제상은 이 계획을 알고도 모른 척했습니다. 그리고 왜인들이 마음을 놓게 되자 미사흔에게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고 마침내 미사흔을 신라로 보내는 것에 성공하였습니다. 미사흔이 떠나고 난 뒤 시간을 벌기 위해 제상은 늦게까지 잠을 자는 척했습니다. 왜인들이 미사흔을 확인하여 방문을 열려했을 때에도 사냥으로 인해 피곤하니 자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하지만 저녁 때 즈음 미사흔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에 제상은 미사흔이 멀리 떠났음을 말했습니다. 

‘제상이 홀로 방 안에서 자다가 늦게 일어났는데, 미사흔으로 하여금 멀리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여러 사람이 묻기를, “장군께서는 어찌하여 늦게 일어났습니까?”라고 하였다. 대답하여 말하기를, “어제 배를 타 나른하고 피곤하여 일찍 일어날 수 없었다.”라고 하였다. 〔제상이〕 방에서 나오자, 〔그제서야〕 미사흔이 도망간 것을 알아챘다. 이에 제상을 포박하고 배를 저어 〔미사흔을〕 추격하였다. 때마침 연무가 자욱하여 어두컴컴해짐에 따라 멀리 바라볼 수가 없었다. 〔왜인들이〕 제상을 왕이 있는 곳에 보내자, 〔왜왕이〕 곧바로 목도(木島)로 유배보냈다가 얼마 안 있어 사람을 시켜 장작불에 불을 질러 〔제상의〕 신체를 태운 후에 그의 목을 베었다.’  『삼국사기』
한편 신라에서 국가를 위해 순국(殉國)한 영웅들의 일화를 가무극 또는 연극의 형태로 각색하여 공연하였습니다. 박제상의 일화를 애국심을 고취하는 내용으로 각색하여 가무극이나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하였는데, 아마도 이때 『삼국유사』에 전하는 내용과 같은 스토리가 정립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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