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지증왕은 어떤 일을 헀나

2023. 10. 3. 17:4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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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증왕은 성은 김(金), 이름[諱]은 지대로(智大路)이며, 지도로(智度路)나 지철로(智哲老)라고도 합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지증왕은 체격이 크고 담력도 뛰어났다고 합니다. 그는 500년(소지 22) 소지마립간이 아들이 없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당시 나이가 64세였다고 합니다. 지증왕의 재위기간에는 5세기 말까지 잦았던 고구려와 왜의 침략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그리고 501년(지증왕 2) 백제가 신라의 침입에 대비해 탄현(炭峴)에 목책(木柵)을 설치했다는 기록을 통해 지증왕 시기 신라와 백제의 관계가 이전보다는 동맹이 약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증왕은 부친이 눌지왕의 동생인 기보 갈문왕이고 어머니는 눌지의 딸인 오생부인이라고 합니다. 이들 부부는 삼촌과 조카딸이라고 하니 신라 근친혼의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립간 시기 김씨계 근친과 결혼하여 왕실의 범위는 점점 좁아지고 있었습니다. 그에 반해 지도로는 근친 간이 아닌 박씨계의 귀족과 결혼하였는데 어쩌면 지도로나 그의 자녀들은 왕실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듯 보였습니다. 김씨계 마립간이 동성 간 근친혼을 선호하며 왕실자체를 신성화하는 작업을 하였는데 김씨가 아닌 다른 귀족들에게 호감을 살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도로는 박씨계 귀족연인과 인연을 맺었으니 다른 귀족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주었을 것입니다. 
지증왕은 배필을 구할 때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음경의 길이가 1자 5치나 돼 그에 마땅한 배필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사자를 3도에 보내 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자가 모량부(牟梁部) 동로수(冬老樹)에 이르렀을 때, 개 두 마리가 북만큼 큰 똥 덩어리의 양쪽 끝을 물고 다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어마어마한 배설물의 주인이 누구인지 마을사람들에게 수소문한 끝에 모량부 상공의 딸이 그인 것을 알았습니다. 사자가 그 집에 가서 보니 과연 여자의 키가 7자 5치나 되었습니다. 사자는 그 즉시 지증왕에게 보고를 아뢰었고, 왕이 수레를 보내 모량부 상공의 딸을 궁으로 맞아들여 황후로 삼았다고 합니다. 지증왕고 연제부인의 만남은 남다른 크기의 만남이었고 이는 김씨와 박씨의 정치세력간의 결합이었습니다. 
‘2월에 영(令)을 내려 순장을 금하게 하였다. 이전에는 국왕이 죽으면 남녀 다섯 명씩 순장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금하게 한 것이다’ 『삼국사기』


순장되는 사람들의 반발이 커지고, 농업 생산력의 발달로 인간의 노동력을 중시하면서 순장은 점점 약화되었습니다. 특히 살생을 금하는 불교가 전래되며 순장은 국가 차원에서 금지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사실 이러한 순장은 중국에서도 청나라 때까지도 행해졌습니다. 게다가 순장에는 왕관 관련 있는 풍습이었고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라 지증왕의 순장폐지라는 조처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용기있고 파격적인 조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순장을 금지시킨 해에 지증왕은 우경도 실시하였습니다. 기존의 사람이 손으로 직접 밭을 가는 것보다 훨씬 편리하고 시간도 절약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우경은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사정에 따라 실시하지 있는 지역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에 따라 지증왕이 전국적으로 실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인 신라의 왕권이 지방에 대한 통제도 강화되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우경으로 인해 농업이 발달하자, 상업도 덩달아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지증왕은 경주의 동쪽에 시장을 설치해서 상업이 더욱 활발해 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경주의 동쪽에 있다는 시장이라고 해서 ‘동시(東市)’라고 부르게 되었는데요. 『삼국사기』에 따르면 소지 마립간 때 수도에 시장을 처음으로 개설하였고, 지증왕 때 동시와 함께 동시전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지증왕 대에 이루어진 동시의 설치가 추가 설치된 것인지, 확대 개편된 것인지, 복구된 것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당시 신라에서 물자의 유통이 이전보다 활발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503년 지증마립간 4년에는 신하들의 요청에 의해 나라의 최고 지배자를 마립간이 아니라 ‘왕’으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라 이름도 신라로 정하게 되었는데요. ‘왕의 덕업이 나날이 새로워지고, 사방의 영역을 두루 망라한다.’에서 앞의 두 글자를 취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실 이전에도 신라라는 국호는 사용했습니다.  내물마립간 이전의 시기에도 사용했고 「광개토대왕비문」에도 신라라는 명칭이 보입니다. 하지만 지증왕 대 이전에 신라 외에도 계림, 사로 등의 국호가 혼용되고 있었고 주변국이나 중국에서는 기록상 사로라는 명칭을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증왕 대에 제도를 정비하면서 국호 역시 신라로 정하게 된 것입니다. 
이밖에도 지증왕 시기에 국가의 지배력이 사회/문화 전반에 미치고 있었다는 것은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504년에 정한 상복법입니다. 상례라는 것은 가족에게 있어 중요한 의식으로 이것을 국가에서 나서서 그 법도를 정했습니다. 당시 신라에는 제각각의 상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신라는 국가가 나서서 그 기준을 세우니 물론 본래 내려오던 관습을 파괴한다는 반발도 있을지도 모르나 문화는 발전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진통을 겪는 법입니다. 국가가 나서서 상복법을 제정한 것은 국가가 주민들의 생활에도 통치권을 내세우겠다는 적극적인 의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라 안의 주•군•현 행정구역을 정비했습니다. 통일 전 신라의 수도, 지방 행정 조직은 6부 5주였는데, 지증왕 때 최초로 실직주(지금의 강원도 삼척시)를 설치하고, 이곳의 군주로 이사부를 파견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완성된 것이 아닌 일시적은 조처로 이해되고 있는데요. 그렇지만 실시했다는 것에 의미를 둘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증왕은 순장을 금지시켜 노동력의 손실을 방지시키고 우경을 통하여 노동의 질을 향상시켰으며 사회전반적으로 개혁을 진행시켰는데 그 배경에는 15년이라는 짧지도 길지도 않은 기간 동안 천재지변이 적었고 전쟁도 없었으며 무엇보다도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사회적으로 뒤처져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를 따라잡기 위해 구상한 바를 실천한 데에 따른 것입니다. 


한편 1989년에는 경북 영일군에서 냉수리비라고 일컫는 신라 지증왕 시대(재위 500-514년)의 아주 오래된 금석문이 나왔습니다. 영일 냉수리비의 내용은 절거리(節居利)라는 사람의 소유 재산과 죽은 후 재산상속 문제, 재산분쟁 때 이를 해결하는 절차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면의 제3행에서 후면의 제1행까지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 이하 중앙의 6부 출신 고위관리 7인이 계미년 이전에 있었던 두 왕의 결정사항을 재확인하면서 절거리가 죽은 뒤 제아사노(弟兒斯奴)가 재산을 상속할 것과 말추(末鄒), 사신지(斯申支)는 이 재산에 관여하지 말 것을 결정한 내용입니다.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후면 2행에서 마지막인 제7행까지로 중앙에서 파견된 전사인(典事人) 7인이 앞의 고위관리 7인의 결정 사항을 집행하면서 소를 죽여 제의를 지내고 이를 포고한 사실을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지증마립간 4년에 살았던 절거리라는 사람이 거의 90여 년 전에 재위했던 실성마립간과 50여년 전에 재위했던 눌지마립간으로부터 재물에 관해 각각 한 차례씩 도합 두 차례의 조치를 받았다는 것은 의아함을 갖게 합니다. 따라서 절거리의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그 권리를 실성마립간으로부터 처음 인정받고 다시 눌지마립간에게 인정받은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 뒤에 절거리가 선대의 권리를 상속받았다는 것입니다. 절거리는 후손으로 그 권리를 이어받았지만 이후 추가적인 국가의 조치가 없었던 탓에 지방의 두 유력자들이 빼앗으려 한 것으로 보고 이에 절거리가 중앙정부에 호소하여 그 권리를 재차 확인받은 것입니다. 이 비에는 그리고 신라 국호를 사라(斯羅)라고 썼는데, 지증왕이 신라의 한자 표기를 신라(新羅)로 통일한 것이 바로 이 비석이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해와 같은 해인 503년 음력 10월입니다. 그리고 이 비석은 9월 25일에 건립되었으므로, 국호 통일 명령을 내리기 불과 1달 전에 이 비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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