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를 겸비한 정치가 거칠부
2023. 10. 4. 17:45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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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부(居柒夫, 502~579)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함께 공존했던 삼국시대 사람으로 성은 김이며 신라 내물왕의 5대손입니다. 그의 집안은 신라 왕족으로 할아버지는 각간 잉숙(仍宿)이며, 아버지는 소지왕의 장인인 이찬 물력(勿力)입니다. 거칠부는 신라시기의 역사서 『국사』를 편찬한 인물입니다. 따라서 학자적인 이미지가 강한데 사실 그는 사사 편찬 외에도 승려이자 학자, 장군, 상대등 그리고 여기에 더해 첩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등 만능앤터테이너형 정치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거칠부는 왕실의 주요 일원이기도 했습니다. 내물계의 다른 직계인 미사흔계의 자손이며 그의 아버지 물력은 524년(법흥왕 11)에 건립된 울진봉평리신라비에 법흥왕(모즉지매금왕)과 함께 국정을 논의한 사람 가운데 한 명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거칠부는 내물마립간 계통의 왕족 후손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나라에 큰뜻을 두고 승려가 돼 사방을 유람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는 고구려에서 혜량(惠亮)법사의 불경강독을 듣게 되었습니다. 혜량법사는 100여명의 많은 젊은 승려들 가운데 거칠부의 관상을 보고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는 빨리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거칠부는 “스님의 높으신 덕망과 명성을 듣고 왔습니다. 부디 내치지 마시고 어리석음을 깨우치게 해 주소서”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혜량법사는 “제비턱에 매의 눈을 한 자네는 앞으로 반드시 장수가 될 거네. 삼국 중에 지금은 신라가 작으나 장차 크게 일어날 걸세. 만일 군사를 거느리고 그때 다시 오면 나를 해치지 말아주게나”라며 신라로 돌아갈 것을 권했습니다. 이에 거칠부는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이 때 신라의 국내 사정은 내물왕 때부터 다져 온 강한 왕권을 바탕으로 법흥왕은 제도를 바로잡고, 그 뒤를 이은 진흥왕은 영토를 넓혀가는 중이었습니다. 신라로 귀국한 거칠부는 벼슬길에 나가서 대아찬에 이르렀습니다. 지증왕 때 울릉도 우산국을 정벌했던 이사부도 거칠부와 함께 신라의 영토를 넓히는 많은 전쟁에 참여하여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진흥왕 6년(545년) 거칠부는 왕으로부터 신라의 역사를 기록하라는 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여러 이야기를 모았고, 나라 안의 여러 책들을 모아 학자들과 함께 책으로 엮었습니다. 이 책이 박혁거세부터 시작된 신라의 역사를 처음으로 정리한 『국사』인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전해지지는 않습니다. 국가 차원의 역사서 편찬 사업은 신라에서만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에서도 이루어졌습니다. 고구려는 초기에 만들어졌던 『유기(留記)』를 개정하여 영양왕 11년인 600년에 『신집(新集)』을 편찬하였습니다. 백제는 근초고왕 30년인 375년에 『서기(書記)』를 편찬하였습니다. 삼국이 자국의 역사를 기록 편찬함으로써 왕실의 신성성(神聖性), 왕의 훌륭한 업적 등을 널리 알리고자 했던 것으로 신라의 전성기를 열었던 진흥왕 대에 그 막중한 임무를 맡은 이가 바로 거칠부였습니다. 이전에는 박·석·김씨 왕족이 교대로 왕위를 계승하였지만, 내물마립간 때부터 김씨 왕족이 왕위를 독점적으로 세습하게 되는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물마립간의 후손들이 국사의 편찬을 건의했을 것이고 진흥왕이 이를 받아들여 『국사』편찬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사실 진흥왕 이전 시기인 지증왕, 법흥왕 대부터 정복사업을 비롯하여 왕이 여러 업적을 쌓아왔는데 그러한 것을 정리하는 과정도 『국사』편찬에 힘을 실어주었을 것입니다. 신라는 더욱 강성해져 551년 고구려의 영토를 침략하여 열 개의 성을 차지했습니다. 이때 혜량법사가 승려들을 데리고 거칠부를 찾아와 “이제 고구려의 앞날은 밝지 않으니 나를 신라로 데려가기 바라네.”라고 말했습니다. 거칠부가 혜량법사를 진흥왕에게 접견시키니, 왕은 혜량법사를 승려의 우두머리인 국통으로 삼고 모든 승려를 다스리게 하여 신라 불교 중흥의 기틀을 마련합니다.
551년 신라군을 이끌던 것은 거칠부였습니다. 거칠부가 이끄는 신라군은 소백산맥의 죽령에서 6백리 길을 북상해 철령까지 진군한 것인데요. 1년 전에 이사부가 탈취한 충북 적성에서 출발하여 강을 넘어 북으로, 북으로 공격해갔습니다. 그들은 소백산맥 죽령에서 지금은 북한 땅인 철령(高峴)까지 10개 군은 빼앗았습니다. 이 해 신라와 고구려의 전투는 신라의 정복 전쟁 사상 단일 전투로는 최대의 영토를 차지한 싸움이었습니다. 이때 신라가 확보한 새 영토의 면적은 진흥왕이 즉위할 당시의 영토에 버금간다고 합니다.
‘임금이 거칠부 등에게 명해 고구려를 침공하게 했는데, 승세를 타고 10개 군을 취했다. (王命居柒夫等 侵高句麗 乘勝取十郡)’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조-
이 전투는 신라 단독이 아닌 백제와의 협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삼국사기』에는 ‘백제가 먼저 평양을 격파하고, 거칠부가 승세를 몰아 고구려를 공격했다.’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당시 고구려는 남쪽의 신라, 백제는 물론 북쪽의 돌궐(突厥)이 요동의 거점인 신성을 포위, 공격하자, 고구려는 반격을 가했습니다. 돌궐이 고구려의 저항으로 실패하자, 다시 백암성을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 고흘(高紇) 장군이 병사 1만으로 돌궐과 치열한 싸움을 펼치는 이 때에 신라와 백제가 침공한 것입니다. 당시 전투에 나선 것은 거칠부였고 한 해전에는 이사부가 나섰습니다. 이사부는 한해 전에 벌어진 도살성, 금현성 전투에서 나제(羅濟)동맹을 깨고 백제가 고구려에서 뺏은 도살성을 함락시킨 바 있는데 이것으로 인해 신라와 백제의 동맹관계는 깨지기 일보직전까지 갔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사부 대신 거칠부가 투입되었고 이를 통해 백제와의 관계를 겨우 유지시킨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칠부가 뺏은 땅이 맥국(貊國)으로 알려진 곳입니다. 맥국은 춘천을 중심으로 화천, 양구 일대를 통치하던 고대국가였으며, 횡성, 평창등지에서도 맥국의 전설이 남아 있어 영서지방을 총괄하는 연맹체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진흥왕은 2년 후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하류 지역도 차지하였습니다. 이 일로 신라와 백제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하였고,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이 전사하면서 양국의 관계는 원수지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라는 한강 하류 유역을 차지하면서 비옥한 토지를 얻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직접 이어지는 교통로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551년 고구려를 공격한 것을 끝으로 거칠부의 이름이 『삼국사기』에서는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대신 진흥왕의 또 다른 업적이자 영토를 개척하고 그곳을 순행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에서 거칠부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중 진흥왕 22년(561년)에 세워진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에는 이 지역을 순행한 진흥왕을 수행한 관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 거칠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진흥왕 29년(568년)에 세워진 마운령신라진흥왕순수비에서도 거칠부의 이름이 확인되었습니다.
한편 2012년에는 흥미로운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진흥왕 순수비에 대한 의문과 그에 따른 해석을 제시한 것인데요. 세 개의 비는 경주에서 제작한 다음 사람을 보내 세우게 했으며, 비문을 지은 사람은 거칠부(?~579)였을 가능성이 높고, 고구려나 백제 사람들에게 위업을 과시하기 위한 대외용이었을 것입니다. 비의 재질이 북한산이나 경기도 일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며 한국의 유명한 화강암 산지에서 나는 것도 아니라는 근거를 들었습니다. 또한 세 개의 비가 비슷한 시기(568년)에 특정 장소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진흥왕이 순수를 다녀온 뒤 비를 제작해 보내 세웠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 점에서 순수비가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란 추정입니다. 그리고 유교적 정치사상으로 뒤덮여 있는 비문을 찬술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진 이는 당대 최고의 문사이자 유불에 능통한 거칠부밖에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비문을 썼다고 비에 기록돼 있지 않은 이유는 이미 진흥왕을 수행하는 이들 중 하나로 이름이 올라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이 주장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문무에 능통한 거칠부는 신라 전성기에 큰 힘이 되었고 이는 삼국통일의 기반이 되어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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