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흥왕은 무슨 일을 했나

2023. 10. 6. 17:48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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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증왕 이후에 왕이 된 이는 바로 법흥왕입니다. 사실 그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그 영향력을 발휘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증왕이 64세의 고령의 나이로 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연제부인 박씨의 소생으로 이름은 원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지증왕이 되었을 때 이미 차기 왕으로 원종이 낙점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서는  키가 7척(尺)이었고, 성품이 너그럽고 후하며 사람들을 사랑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부인은 박씨 보도부인이었습니다. 
1988년 1월에는 경북 울진 봉평에서 봉평비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서는 ‘모즉지 매금왕’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매금’은 마립간을 줄여서 쓴 것이고 모즉지는 법흥왕의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라의 왕호는 520년대까지 ‘매금왕’이었으나, 530년대 중반에 가서는 대왕(大王), 태왕(太王)으로 격상되었습니다. 천전리 각석 명문 기미명(539)에 법흥왕은 무즉지태왕으로, 을묘명(535년)에서는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이라고 표기돼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국왕의 위상이 달라졌음을 말합니다. 한편 매금(寐錦)이란 단어는 광개토왕릉비, 중원 고구려비, 일본서기,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 등장하는 군주의 칭호입니다. 광개토왕릉비에는 ‘신라의 매금이 직접 와 조공을 바쳤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중원고구려비에는 무려 6번이나 매금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모즉지대왕과 법흥왕이 같이 사용되었으며 이는 불교가 전 왕실이나 지배층 내에 충분히 포교되지 못했거나 신앙화되지 못했음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즉 국가 내에서 아직 불교의 영향력이 확고히 자리 잡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법흥왕 3년(516년)에는 병주의 장관에 해당하는 병부령을 1명 두었고 이어 517년에는 병부라는 부서를 처음 설치하였습니다. 이는 그 전까지는 왕실과 유력자들이 사병 비슷하게 사유하고 있던 병사를 이제는 국가 차원에서 소속시키고 다룬다는 의미가 있는데 신라가 점차 조직적인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전까지는 6부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6부의 장정들로 구성되는 6부병이 곧 신라의 군사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군사력은 각 부별로 움직였습니다. 그 시기에는 왕권도 미약했을 것이며 당시에는 정치행정도 6부 출신의 족장들의 협의에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법흥왕이 6부의 병력을 국왕을 정점으로 하여 지휘하고자 한 것은 바로 고구려 그리고 백제와의 대결을 염두에 둔 조처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520년에는 율령을 반포합니다.  
‘7년(520) 봄 정월에 율령(律令)을 반포하고, 처음으로 백관(百官)의 공복(公服)에 붉은색과 자주색으로 위계(位階)를 제정하였다.’ 『삼국사기』
율령은 기본적으로 율(律)·령(令)·격(格)·식(式)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율은 죄와 벌을 규정한 오늘날 형법(刑法)에 해당하고, 영은 사회와 국가를 운영하기 위한 각종 제도 등을 규정한 행정법규를 뜻합니다. 식은 율령을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한 시행세칙을 말하며, 시대의 변화에 대응해 율령을 전면적으로 개정하기 전까지의 사이에 제정된 법령을 묶은 것을 격이라고 부릅니다. 율령이 반포되기 전에는 관습법에 의해 다스려졌는데 이러한 것은 기득권을 쥔 귀족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편이지만 율령은 국왕과 더 나아가 국가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으로 반대로 귀족의 특권을 어느 선에서 제한하는 역할도 하였습니다. 
공복제정과 관련해서는 종래에 이러한 규정이 바로 520년(법흥왕 7)에 제정한 백관 공복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이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이와 더불어 이때에 골품제를 완비하였다는 견해가 널리 수용되었습니다.  반면에 일부 학자는 색복지에 전하는 관제(冠制)는 법흥왕대 품주(稟主) 조직 내에서 금하대등(衿荷大等)과 그 이하의 관직자들이 썼던 관을 규정한 것이라고 이해한 다음, 당나라의 의관제(衣冠制)를 수용하여 신라의 의관제를 개정한 진덕여왕대에 성골(聖骨)이 소멸됨과 동시에 비로소 두품제(頭品制)가 체계적으로 정비되면서 골품제가 확립되었으며, 이에 의거하여 자비청황색(紫緋靑黃色)을 기초로 하는 공복제를 정비하였다는 견해를 제기하였습니다. 또 금하와 상당·적위가 모두 사원성전(寺院成典)의 관리였고, 영(令)-경(卿)-대사(大舍)-사(史)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행정관서의 관직체계가 비로소 진덕여왕대에 정비된 사실 등을 주목하여 색복조에 전하는 관제는 당나라의 의관제를 수용한 진덕여왕대에 정비되었다고 이해한 다음, 문무왕 8년(668)에 김유신에게 태대각간을 처음 수여하였다는 사실, 520년 무렵에 대아찬과 대나마 관등을 비로소 설치하였다는 사실 등을 근거로 자·비·청·황색을 기초로 한 공복제 역시 진덕여왕대에 정비하였다는 결론을 도출하고, 진골과 6~4두품과 같은 법제적인 신분을 기본으로 하는 골품제는 진덕여왕대에 완비되었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공복제정은 외부에 드러나는 옷차림에서부터 왕과 신하의 차등을 명확히 하겠다는 것이고 이를 통해 이전에 가져가던 귀족의 이익을 제한하겠다는 의미도 담겨 있을 것입니다. 
법흥왕은 군사적으로 주변을 압박하였고 그 중 하나가 바로 금관가야입니다. 금관가야는 신라-왜 전쟁 이후 전성기를 벗어나 가야 지역의 주도권도 잃은 채 약화된 상태였고, 한때 고구려의 속국 신세였던 신라와의 국력 차이가 벌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529년에는 금관가야가 신라로부터 위협을 느껴 왜에게 지원군을 요청하였습니다. 신라는 상신(上臣) 이사부에게 3,000명의 병력으로 토벌을 명하니 왜군이 이를 보고 도망갔다고 합니다. 이사부는 금관국을 포함한 4개 도시를 빼앗고 백성들을 포로로 데려가니 금관가야는 이미 약해진 상황에서 더욱 타격을 입었습니다. 

대가야의 마지막 왕인 이뇌왕의 왕비는 신라의 왕녀라고 합니다. 『삼국사기』에는 이찬(伊飡) 비조부(比助夫)의 여동생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찬 비지배(比枝輩)의 딸, 『일본서기』에는 신라 왕녀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신라의 여성이 가야로 와서 왕비가 된 것은 가야 이뇌왕의 요청에 의해서였습니다. 신라와 백제 사이에서 압박을 받고 있던 가야는 신라와의 동맹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하였습니다. 신라 법흥왕(法興王)이 이뇌왕의 요청을 받아들임으로써 522년(법흥왕 9년) 혼인이 성립되었습니다. 하지만 복장문제가 터졌습니다. 왕비가 가야로 올 때 신라왕은 100여 명의 시종을 함께 보냈습니다. 가야에서는 이들을 여러 지역에 분산해서 배치했는데, 이들이 신라의 의복을 입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리사등(阿利斯等)은 이들이 가야의 복장을 따르지 않은 것을 보고 분노하여 사자를 보내 돌려보내게 하였습니다. 법흥왕은 모욕을 받았다며 왕비를 신라로 돌려보낼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뇌왕은 이미 부부가 되었는데 헤어질 수 없다는 것과, 아이가 있다는 점을 들어 거절하였습니다. 신라 법흥왕은 이 일을 빌미로 장군 이사부(異斯夫)를 가야에 파견했습니다. 이사부는 지나가는 길에 있는 세 성을 함락시키고, 또 북쪽 변경의 다섯 성을 함락시켰으니 사실 법흥왕의 대가야의 이뇌왕과 혼인정책을 핀 것은 대가야를 정복하고자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법흥왕 18년에는 상대등을 설치합니다. 상대등은 대등이라는 귀족회의 구성원 중에서 최고의 지위를 갖는 귀족의 대표입니다. 당시에는 갈문왕이 귀족의 회의에 참여하여 의장역할을 하였고 봉평비에서는 법흥왕이 그 역할을 하였는데 국왕의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상대등이라는 직위를 만들어 귀족회의를 운영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는 왕의 권위가 이전보다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다른 귀족과 협의하는 위치에서 이제 귀족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고려하고 선택하여 국정을 운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처음으로 독자적으로 연호를 만들어 사용합니다. 바로 ‘건원’으로 ‘원년을 세운다.’는 의미입니다. 이 시기를 시작으로 진덕여왕 때까지 독자적인 연호를 썼으며 신라역사에서는 가장 자주적인 국가의식으로 무장된 시기로 법흥왕이 그 시작을 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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