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왕의 불교사업

2023. 10. 8. 17:51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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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6세기 후반 조성된 황룡사 금당에서 출토된 불두 나발이다.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10년(549) 봄에 양(梁)나라에서 사신과 입학승(入學僧) 각덕(覺德)을 파견하여 부처의 사리(舍利)를 보냈다. 왕이 백관(百官)으로 하여금 흥륜사 앞길[興輪寺前路]에서 받들어 맞이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각덕은 신라에서 최초로 중국에 유학한 승려입니다.  일찍이 불법(佛法)을 배우기 위해 남조의 양(梁)나라에 유학하였다가 진흥왕 10년(549) 봄에 양나라 사신과 함께 귀국하였습니다. 그에 대해서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권2 각덕전(覺德傳)에서는 각덕이 총명하고 박식하였으며, 범인인지 성인인지 헤아릴 수가 없었고, 양나라에서 고명한 스승들을 두루 찾아 열심히 섬기면서 가르침을 받아, 덕행이 뛰어났고 인망(人望)이 높아졌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귀국을 결심하였다고 기술하였습니다.
한편 이보다 앞선 진흥왕 5년(544) 봄 2월에 흥륜사(興輪寺)가 완공되었습니다. 법흥왕 시기인 527년에 흥륜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차돈 순교 뒤 천경림에 신라 최초 공인 사찰, 흥륜사가 건축되었고 진흥왕 시기에 완성된 것이며 이름에는 ‘불법이 바퀴를 일으키는 절’이라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이는 불교를 공인하고 나라에서 나서서 절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한편 『해동고승전』과 『삼국유사』에서는 “법흥왕은 절이 완성되자 면류관을 벗고 스님 옷을 입고 법공(法空)이라 이름 하였으며, 왕족을 바치어 절의 노예로 삼았다”라는 사실을 전하고 있는데, 이것은 표현 그대로 출가하여 비구가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신(捨身) 행위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이 학계의 일각에서 제기되었습니다. 제왕의 사신이란 잠시 정사를 쉬고 절에 들어가서 삼보의 노예가 되는 의식인데, 이때 조정에서는 노예가 된 제왕의 몸값을 치르고 모셔오게 됨으로써 절에서는 막대한 재원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양나라 551년에 조성된 아육왕상은 높이가 48.5cm로, 성도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진흥왕 10년(549) 봄에 양나라의 사신 심호(沈湖)가 유학승 각덕(覺德)과 함께 불사리(佛舍利)를 가져옴에 왕이 백관에게 흥륜사 앞길에서 맞이하도록 하였습니다. 따라서 신라불교는 법흥왕에 이어 진흥왕대의 초기불교에 양나라 불교의 영향을 직접 받고 있었음이 주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유학승 각덕의 귀국은 ‘서학(西學)’이라 하여 중국문화 수입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선례가 되었으며, 뒤의 진평왕 22년(600)에 귀국하는 원광(圓光)도 서학의 대표적 인물이 되었습니다. 양나라 사신이 직접 불사리를 이운해 왔다는 것은 신라가 고구려나 백제를 통하지 않고 중국과 교류했다는 방증으로, 곧 신라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신라가 양나라에게서 진신사리를 얻은 것에 백제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이해하는 측면도 있는데요. 남진정책을 펼치던 고구려에서 내분이 일어나 곤경에 빠졌고 이 때 백제가 영토수복의 기회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를 회복하기 위해 신라에게 접근했고 진흥왕 2년 541년에는 백제의 화친 요청이 그것이며 이를 수락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백제가 한강유역에 대해 수복의지를 다질 때에  본격적으로 가야지역으로의 영역확대를 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라 발전의 관건이 되는 한강유역의 확보도 넘볼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때에 백제가 양나라에게서 부처의 진신사리를 구해주겠다고 제의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551년에는 고구려에서 혜량이라는 스님이 망명해왔습니다. 그는 거칠부가 처음 영접한 인물로 거칠부가 고구려에 잠입하였을 때 그를 보호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내분이 일어나자 신라로 망명하였습니다. 신라로 온 혜량(惠亮)은 국통(國統)에 임명되어 불교제반사를 통관하게 하는 승관제도를 정비하였습니다. 그리고 혜량에 의해 신라에서 처음으로 백고좌회(百高座會)와 팔관회(八關會)가 행하여지게 되었습니다. 팔관회는 551년 신라 진흥왕 때 처음 행해진 호국 불교행사로 고려시대 공식 행사로 자리 잡았고 8계를 받아 지키며 나라의 번영과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불교 전통 의식이라고 합니다.

진흥왕은  14년(553) 봄 2월에 담당 관청에 명하여 월성(月城)의 동쪽에 새 궁궐을 짓게 하였는데, 그곳에서 황룡(黃龍)이 나타났습니다. 왕이 이것을 괴이하게 여기고는 계획을 고쳐서 불사(佛寺)를 짓고, ‘황룡(皇龍)’이라는 이름을 내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566년에는 황룡사가 완공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황룡사는 신라의 호국 사찰로 ‘신라의 땅이 곧 부처가 사는 땅’이라는 불교관이 담았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유사』 권제3 탑상제4 황룡사장육조에서는 황룡사를 기축년(己丑年: 569)에 주위의 담을 쌓고 17년 만에 겨우 완성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책에 따라 사찰의 완공 시점이 다르게 전하는데, 전자에서는 중요한 시설들이 갖춘 것을 기준으로, 후자에서는 건물 둘레에 담장까지 둘러 공사가 완전히 마무리된 것을 기준으로 완공 시점을 설정하였기 때문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35년(574) 봄 3월에 황룡사(皇龍寺) 장륙상(丈六像)을 주조하여 완성하였는데, 구리의 무게가 35,007근(斤)이고, 도금한 금의 무게가 10,198푼(分)이었다.’ 『삼국사기』
장륙상(丈六像)은 높이가 1장(丈) 6자[尺]되는 불상이라는 뜻으로, 부처의 키가 주척(周尺)으로 1장 6자였던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장륙상(장륙존상)은 황룡사9층목탑, 진평왕의 천사옥대(天賜玉帶)와 함께 신라 3보(三寶)로 숭앙되었습니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삼국유사』에서는 인도[西天竺]의 아육왕(阿育王: 아소카왕)이 황철(黃鐵) 57,000근과 황금 30,000푼[分]을 모아 석가삼존상(釋迦三尊像)을 주조하려다가 실패하자, 이것들과 부처상 1구, 보살상 2구를 함께 배에 실어 보냈는데, 신라 진흥왕이 울산 하곡현(河曲縣) 사포(絲浦)에 도착한 배에 실려 있는 부처와 보살상을 동축사(東竺寺)에 모시고, 대건(大建) 6년 갑오(甲午: 574) 3월에 황철과 황금을 가지고 황룡사 장륙존상을 주조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도의 전설적인 신불군주(信佛君主)인 아육왕이 보낸 금철(金鐵)로 남염부제(南閻浮提)의 십육대국(十六大國), 오백중국(五百中國), 십천소국(十千小國), 팔만취락(八萬聚落) 모두가 장육상을 주성(鑄成)하는데 실패하였지만 진흥왕은 이를 가지고 만들었다고 합니다. 아마 이러한 사실을 통해 신라가 불국토라는 것을 내세우려 했을 것이며 또한 아소카왕과 진흥왕이 서로 인연이 있음을 이야기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인도 불교계에서 아소카왕이 전륜성왕이 될 것이라는 부처의 예언을 선양하였듯이 신라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통해 진흥왕을 신성시하고 높인 것입니다. 

진흥왕의 불교정책에 크게 기여한 것은 그의 어머니인 지소태후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진흥왕이 어린 나이에 올라 섭정이 불가피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소태후가 한 일은 흥륜사를 일으킨 것이나 중국 남조로부터 부처님의 사리를 가져오게 한 것 등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소태후의 불교진흥정책은 고스란히 진흥왕의 전책이 되었습니다. 
진흥왕은 진흥왕'의 진흥은 眞興(참 진, 일 흥)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진흥시키다'의 진흥은 振興(떨칠 진, 일 흥)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법흥왕과 더불어 불교식으로 시호를 올린 예로 손꼽힙니다. 즉 진흥왕은 신라의 삼국통일전쟁에 있어서 진흥왕은 그 기반을 닦은 왕이자 불교를 흥하게 하였습니다. 그가 새로 확보한 지역을 순시하면서 신라에 편입된 지방민들에게  불교와 같은 문화와 함께 신라의 뜻을 전파하고 그 기록을 돌에 새겨 순수비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순수비를 보면 이름 높은 승려를 대동하거나 현지의 유명 승려를 초빙하였습니다. 당시 한반도에 불교가 유입된 지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 선진문화라는 인식이 있었고  불교는 당시 선진 종교로 여겨졌으므로 새로 편입된 주민들 및 주변국에게 신라의 문화적, 군사적 수준을 과시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진흥왕의 불교정책은 왕실 신앙 그 자체였다고 볼 수 있는데요. 진흥왕은 만년에 몸소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었으며 법운이라는 법명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왕비 사도부인도 승려가 되어 영흥사에서 지낼 정도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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