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왕의 정복사업

2023. 10. 9. 17:5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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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11년인 550년 고구려와 백제가 도살성과 금현성을 두고 싸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비집고 들어온 것은 신라였습니다. 도살성과 금현성 전투에서 백제와 고구려가 혼전을 펼치며 두 나라의 군사들의 기력이 쇠해있는 틈을 타서 신라 이사부 장군이 두 성을 빼앗은 것입니다. 백제가 충청북도 한강 중류를 장악하기 위해 우선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는데 이에 고구려는 백제 사비성과 도살성 중간에 있는 금현성을 공격해 도살성을 고립시키고, 한강 중류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백제의 대혈투가 벌어집니다. 이에 이사부는 두 나라가 한치의 양보 없이 싸우다 지칠 무렵 군대를 동원해 두 성을 차지하고, 한강 중류를 차지했다. 신라가 드디어 죽령을 넘어 한강 유역에 발을 걸쳐 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학계에서는 도살성의 위치에 대해서 충북 음성의 백마령,  충남 천안설, 충북 증평 이성산성과 진천 두타산성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로 나눠져 있으며 금현성은 충북 진천군 서쪽이라는 설, 충남 연기군 진동면과 전의면 경계라는 설이 있습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인해 신라는 소백산맥을 넘어 충청북도의 남한강 중류를 장악하게 되었으니 이는 육로가 발달하지 못했던 그 시대에 수운을 확보했다는 의미이고 한강유역을 공략할 교두보를 마련한 셈입니다. 
551년에는 진흥왕은 거칠부에게 명하여 고구려의 변경을 침략하였고 결과로 10개 군을 차지하였습니다. 그 일대는 남한강변의 충청북도 일대인 충주와 단양 등지라고 합니다. 당시 고구려군이 신라군에게 밀린 이유로 백제의 영토수복정책도 한 몫한 것을 보기도 합니다. 이전 개로왕의 죽음과 한성 수복이라는 백제에게 과제가 있었습니다. 마침 고구려는 귀족들 간의 다툼이 잦았고 돌궐이 고구려의 서북방면을 침입하고 있었습니다. 백제는 이 틈을 노려 한강하류와 서울일대를 공략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남한강유역까지 내려와 있던 고구려군대 역시 신라의 공격을 받자 퇴각하였을 수 있습니다. 사실 이전에도 신라는 거칠부로 하여금 고구려를 정찰하게 하였습니다. 이는 이 지역에 대해 신라가 병합의지가 있었음을 이야기합니다.  
‘승성(承聖) 3년 9월 백제 병사가 진성(珎城)을 침범하여 남녀 3만 9천명과 말 8천 필을 빼앗아 갔다. 이보다 먼저 백제가 신라와 군사를 합하여 고구려를 치자고 하니 진흥왕이 말하기를 “나라가 흥하고 망함은 하늘에 달려 있는데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 어찌 바라겠느냐.” 하였다. 그리고 이 말을 고구려에 전하니 고구려는 이 말에 감동이 되어서 신라와 평화롭게 지냈다. 그러나 백제가 이것을 원망하여 침범을 한 것이다.’ 『삼국유사』

이 때는 554년의 기록이었습니다. 신라가 이전에는 고구려와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시절 5만의 군사를 내어 신라를 구원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는 백제를 상대해야 했고 돌궐의 침략도 염려하던 시기였습니다. 이를 알고 백제가 신라에 같이 고구려정벌을 알렸으나 아직 진흥왕은 고구려의 힘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라는 이러한 백제가 신라에 고구려정벌을 같이 하자는 것을 제의한 사실을 고구려에 알렸습니다. 이에 고구려는 아예 남한강 유역을 잠시 신라에 내주도록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추정도 하는데요. 왜냐하면 신라와 백제 사이에 적대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하여 한반도 남부에 대한 긴장관계를 완화시키고 고구려가 나중에 잃어버린 땅을 찾는 과정에서도 백제보다는 신라를 상대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을 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렇다면 백제는 치열하게 싸워 고구려로부터 영토를 얻어냈을 것이고 신라와 고구려 간에 어떠한 밀약이 있어 고구려가 땅을 내주기로 했다면 신라는 백제보다는 쉽게 남한강 상류지역을 획득하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2년 후의 예고 없이 신라가 백제를 침공한 것은 이러한 배경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후 김춘추가 백제와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고구려로 넘어간 적이 있었는데 이 때 고구려의 실권자인 연개소문이 죽령 이북의 땅에 대해 반환을 요구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닐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신라와 연합한 백제는 551년 고구려를 공격해 한강 하류의 옛 영토를 회복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와 밀약을 맺은 신라가 553년 백제군을 밀어내고 한강 하류 지역을 차지해 버렸습니다. 이에 백제가 분노한 것은 당연했습니다. 신라는 이곳에 신주를 설치하고 김무력을 군주로 임명하였습니다. 이는 신라가 이 지역을 일시적으로 점령한 것이 아닌 지속적으로 관리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인 것입니다. 이로써 신라는 현재 경기도 남양인 당항성을 차지하게 되어 중국과 외교할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당시 진흥왕의 나이 스무 살이었습니다. 백제의 분노는 당연한 것이지만 국제관계는 냉혹한 것이었습니다. 한강하류를 신라가 차지한 것에 대한 책임은 그에 대비를 하지 않은 백제에게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백제는 신라에 대해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백제는 고구려를 상대하느라 신라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못한 듯 보였고 또한 신라와 고구려 간에 밀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움직임을 전혀 감지 못한 것은 당시 이 상황을 설명해 줄 백제의 정치가가 없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공격이 있은 불과 3달 후에 진흥왕은 백제왕의 딸을 맞아들여 소비(小妃)로 삼았습니다. 백제 성왕이 신라와 고구려의 압박 때문에 한강 하류지역을 포기하고, 위기를 일단 면하기 위한 인적 담보물로서 왕녀(王女)를 신라 진흥왕에게 보냈고, 신라 진흥왕은 백제와의 관계를 더 악화시키지 않기 위해 백제 왕녀를 받아들인 것으로 이해됩니다. 한편 백제가 왕녀를 신라왕에게 보낸 것은 일단 신라의 한강 하류지역 점령에 대해 인정하는 듯한 자세를 보임으로써 신라의 경계 태세를 풀고, 그러한 가운데 고구려나 신라를 공격할 준비를 하려고 하였다고 이해하는 견해도 제기되었습니다. 
서기 554년 9월 지금의 충북 옥천군 옥천읍에 있었던 관산성에서 백제와 신라 군대가 맞붙었습니다. 진성에서 펼쳐진 1차 전투는 가야의 여러 나라와 왜의 군사 지원까지 받은 백제의 승리였습니다. 하지만 신라의 깊숙한 영역인 구타모라새에서 벌어진 2차 전투는 쉽지 않았습니다. 왕자 여창이 이끄는 백제군은 3만여 명. 금관가야 구형왕의 셋째 아들이자 김유신의 조부인 김무력이 신라군을 이끌고 백제에 맞섰습니다. 전투가 지루하게 이어지자 백제의 성왕은 아들을 위문하러 보병과 기병 50여 기를 거느리고 길을 나섰습니다. 하지만 정보를 입수하고 옥천의 구진베루(狗川)에서 매복한 신라군에 잡혀 죽었습니다. 대혼란에 빠진 백제군은 3만 명에 가까운 장졸과 마필을 잃고 대패했습니다. 관산성 패전 이후 백제에서는 왕권이 흔들리며 8개의 대귀족 가문을 중심으로 한 정치 운영으로 체제가 바뀌었습니다. 반면 신라 진흥왕은 강력한 왕권을 확립해 신라를 반석에 올려놓았습니다. 군사조직 정비, 신무기 개발, 왕권 중심의 불교 치국책과 호국불교 강화 등이 뒤따랐습니다. 진흥왕은 이를 기반으로 백제, 고구려, 가야 등으로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지증왕이 국호 ‘신라’에 부여했던 ‘덕업일신 망라사방(德業日新 網羅四方:덕업을 날마다 새롭게 해 사방을 망라한다)’의 의미를 실현해 나갔고, 삼국통일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562년 대가야가 신라에 반기를 들자 진흥왕은 이사부를 보내 공격하게 했습니다. 원정군이 대가야 경계에 이르자 사다함은 이사부 장군에게 자신이 선봉에 서겠다고 자청했으나 이사부는 그의 어린 나이를 들어 거절했습니다. 이에 사다함은 정병 5천명을 거느리고 몰래 적군의 성문인 전단량을 기습해 왕과 왕비를 사로잡는 등 대가야를 멸망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 공으로 진흥왕으로부터 좋은 밭과 포로 300명을 노비로 하사받았으나 밭은 부하 병사들에게 나눠 주고 노비는 모두 일반 백성으로 풀어주었습니다. 이 일로 대가야의 멸망으로 가야 연맹은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한편 어려서부터 무관랑과 우정을 맺어 죽음을 같이하기로 맹세한 사다함은 무관랑이 병사하자 7일 동안 통곡하다가 17세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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