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화랑 그들은 누구인가

2023. 10. 11. 17:57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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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을 만든 것은 진흥왕 37년 576년의 일입니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때에 인재(人材)를 선발할 목적으로 만든 조직이자 또는 그에 소속된 사람을 화랑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화랑의 기원으로 보는 것은 원화로 여성 우두머리가 낭도를 거느린 제도였습니다.  이 제도를 운영함에 있어 처음에 임금과 신하들이 인재를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근심하다가, 사람들로 하여금 무리를 지어 놀게 하고 그 행실을 관찰한 연후에 발탁해서 등용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뽑힌 무녀가 남모와 준정이었습니다. 이들은 3백여 명이나 모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두 여자가 아름다움을 다투고 서로 질투하였는데,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한 뒤 억지로 술을 권하여 취하게 되자, 남모를 끌고 가 강물에 던져 죽였습니다. 하지만 일이 발각되어 준정은 사형에 처해졌고, 무리들도 사이가 나빠져 흩어졌습니다. 그 후에 다시 미모의 남자를 선발하여 곱게 꾸미고 화랑(花郞)이라 이름하고 받들었는데, 무리들이 구름같이 모여 들었습니다. 혹은 도의(道義)로써 서로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음악으로써 서로 즐겨서 산과 내를 찾아 노닐며 멀리까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중에 훌륭한 자는 조정에 천거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花郞世記)』에는 “현명한 보필자와 충성스러운 신하가 여기에서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이 이로부터 생겨났다.”라고 하였습니다. 
청소년들로 구성된 화랑도는 대개 15세에 수련을 시작하여 3년간 하였으며 18세가 되면 마쳤습니다. 이것은 전국적인 조직은 아니었고 신라 왕경 내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화랑도는 신라를 이끌어갈 미래의 인적 자원이라 할 수 있었으며 별도로 수련을 하며 자신들의 임무를 자각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은 신라 내에 왕권 강화와도 관련이 있었습니다. 신라에는 6부라는 것이 있어 나름대로의 정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은 연맹체 시절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강력한 왕권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개선해야할 문제였습니다. 아무래도 6부가 자립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면 국왕의 통제를 받는 고구려와 백제를 상대할 적에는 문제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법흥왕 대에 있었던 일들, 즉 병부설치와 율령반포, 불교 공인 등은 신라가 좀 더 강력한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조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문제는 신라에는 고구려의 태학 같은 교육기관이 없었습니다. 이는 국가구성원으로서 일체감을 갖게 하는 시스템이 부재하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신라는 국가에 충성하고 능력 있는 인물을 선발하고자 했으므로 이러한 기관이 없다는 것은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고르는 데 애를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화랑을 정비하는 과정에서도 훌륭한 자를 조정에 천거하도록 한 것은 화랑도가 만들어진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6부로부터 추천을 받아 사람을 썼을 것인데 그러다 보면 사람의 됨됨이를 잘 알지 못하고 써야 하는 경우도 생겼습니다. 그러다 보니 국가적으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조직이 생겨난 것입니다. 
화랑도의 연원이 된 것으로 풍류도를 꼽기도 합니다. 이는 풍월도라고도 하지만 현재로서는 그 구체적인 것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풍류에 관해 최치원은 ‘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는데 이것을 풍류라고 한다. 이 가르침을 설치한 근원은 선(仙)의 역사에 상세히 실려있다. 실로 이는 유교 불교 도교 3교를 포함한 것으로 모든 사람과 접촉하여 이를 교화하였다. 집에 들어와 효도하고 나아가서 나라에 충성을 다하니, 이는 공자의 뜻이며, 또한 모든 일에 거리낌없이 대하면서도 무언으로 실천하는 것은 주나라 노자의 가르침이며,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착한 행실만 믿어 행하는 것은 석가의 교화이다.”
이러한 사상은 유교나 불교, 도교 중 어느 하나에 속한 것은 아니며 다만 최치원조차도 확실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풍류도라는 풍류에서 알 수 있듯이 산천을 사랑하고 즐기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사상은 신라에서만 있던 것은 아닙니다. 고대 세계 여러 민족들도 이런 것에 고민을 했을 것이며 신라도 이에 대한 고민을 하고 풍류도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화랑이 산천을 찾아다닌 것은 그저 놀러 다닌 것만은 아닙니다. 그들은 풍류도의 진면목을 느끼기 위해 자연을 교실로 만든 것이며 이러한 교육의 장을 통해 이전의 기술과 기술을 전수하는 것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닌 스스로 국가에 대한 자부심과 충성시을 갖도록 하고 자율적으로 경전을 읽고 토론을 하고 학업에 성취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화랑도들은 무리를 지어 명승지를 유람하며 서로 교제하고 신체를 단련하였습니다. 611년 김유신이 중악 석굴에서 난승을 만나 비법을 전수받았다는 것은 종교적인 면과 주술적인 면 더불어 이를 연마하기 위해 수련을 하는 화랑의 모습을 그리게 합니다. 그리고 김유신과 같은 화랑을 따르는 무리들을 낭도라고 하며 그 무리마다 이름이 붙기도 했습니다. 김유신의 무리에는 ‘미륵을 신앙하는 무리’라는 뜻으로 ‘용화향도’라고 불린 것입니다. 이를 통해 화랑도가 미륵신앙과 관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자 무당을 세속에서 화랑 혹은 박사라 칭한다.”『오주연문장전산고』
이러한 기록은 과연 화랑이 무속과 연관 지을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합니다. 신라 화랑에게는 정치적, 군사적 요소 외에도 다음과 같이 명산들을 찾아다니며 노래와 악기 연주를 하는 예술적인 면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더러는 도의를 연마하고, 더러는 가악(歌樂)을 서로 즐기면서 산수를 찾아 노닐어, 먼 곳이라도 그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삼국사기』
‘동도(東都)는 본래 신라의 도읍지다. 옛날 사선(四仙)이 있었는데 각각 천여 명의 무리를 거느렸고, 가법(歌法)이 성행했다.’ 『최자, 보한집』
 신라 화랑의 종교적인 모습은 이들의 정치적, 군사적 요소가 거의 사라진 고려시대에 들어가서 알 수 있습니다. 명산대천과 용신 등 우리 민족 고유의 신들을 섬기는 팔관회를 신라를 이어 고려시대에도 이 신라 화랑 계통의 사람들이 담당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고구려 때는 '선배(仙輩)제도'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선배는 높은 인격을 지닌 자를 가리키는데, 각종 예기의 장기 경쟁에서 선발합니다. 가장 뛰어난 자가 전체 선배들을 통솔하는 수장을 맡았습니다. 선배제도는 계급과 무관하게 열려 있어서 다양한 계층이 벼슬에 오르는 길이 되기도 했습니다.  
'선배제도의 조의선인은 학문에 힘쓰며 수박과 활쏘기 등의 기예를 익히고 원근 산수를 탐험하며 시가와 음악을 익히며 공동으로 일처에 숙식했다. 평시에는 환난 구제를 자임했고, 전시에는 전장에 나가 목숨을 걸고 일신을 희생했다. 지방의 교육기관이었던 경당에서도 문무가 분리되지 않았다. 지방 서민의 아들들이 결혼하기 전까지 밤낮으로 독서와 활쏘기를 익혔다고 전해진다.' (<태조본기>, <구당서 동이 고려조>)
신라의 화랑도는 고구려의 선배제도를 모체로 성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라에서 화랑들이 삼국통일에 기여했듯이  신라보다 500년 앞서서 고구려는 태조대왕(6대, 53년 즉위)이 ‘선배’라 부르는 화랑을 창설하여 정치적 군사적 강국의 토대를 만들었습니다. 고구려는 이후로 668년 나라가 나당연합군에게 패망할 때까지, 수나라를 멸망시키고 당나라의 수십만 대군을 물리친 수많은 전쟁의 중심에 ‘선배’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뜻에서 시작된 화랑도 시간에 지남에 따라 쇠퇴하게 되는데요. 신라에 평화기가 들어서자 낭도들의 결속은 배타적인 성격을 불렀고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하자 그 목표를 상실하면서 현실에 안주하여 역할을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나중에는 친교조직으로 그 위상이 떨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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