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진지왕의 폐위 무엇이 문제였나

2023. 10. 12. 17:59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

728x90

신라의 25대 왕은 진지왕입니다. 그는 진흥왕의 차남이며 지소태후의 사녀 숙명궁주 소생이라고 합니다. 그의 이름은 금륜 또는 사륜이아고 합니다. 그에게는 형이 있으니 그는 태자 동륜으로 개에 물려 죽는 바람에 그가 대신 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576년 8월 진흥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습니다. 진지왕의 어머니는 숙명궁주는 모후인 지소태후의 압박으로 진흥왕관 근친혼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둘의 사이는 원만하지 않았습니다. 숙명은 위화랑의 아들인 이화랑을 좋아하였고 결국 둘이 달아나는 일이 벌어집니다. 따라서 그가 나은 금륜도 진흥왕의 자식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태자의 자리는 동륜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것인 진흥왕의 뜻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동륜이 뜻하지 않은 사고로 죽게 되자 태자는 금륜에게 돌아가고 그가 왕이 된 것입니다. 금륜은 왕이 되었지만 권한은 그다지 강하다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권력은 사도태후와 진흥왕의 애첩인 미실이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지왕는 자신에게 쥐어진 권한이 강하지 않다고 느꼈는지 정사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정권은 사도태후와 미실이 장악하고 사도태후는 거칠부를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이사부의 아들인 세종에게 외치를 맡겼습니다. 

577년 겨울 10월에 백제가 서쪽 변경의 주(州)와 군(郡)에 침입하였습니다. 이찬(伊飡) 세종(世宗)에게 명하여 군사를 내어 일선(一善)註 북쪽에서 쳐서 깨뜨리고 3,700명의 목을 베었습니다. 하지만 진지왕은 이 시기에 왕권에 관심이 없었던듯 합니다. 진지왕은 여자들과 어울리며 놀아난 것입니다. 또한 왕위에 오른 뒤에는 미실을 멀리하고 왕후로 삼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위기였습니다. 
진지왕은 575년에 즉위하여 4년간 재위하였으며 정치가 문란해졌고, 음란함에 빠져 폐위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보여주는 이여기가 바로 진지왕과 도화랑설화입니다.  도화랑은 사량부(沙梁部)에 살던 서민의 딸로, 혼인하여 남편이 있던 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진지왕은 그를 탐했습니다.  진지왕은 도화녀를 궁으로 불러들여 관계를 맺고자 하였으나 도화녀가 거절하였습니다. 남편을 더 이상 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진지왕이 너의 목숨을 빼앗으면 어떡하겠느냐는 말에 차라리 목숨을 잃을 지언정 관계를 가질 수 없다고 합니다. 이에 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는 말에 그 때 도화녀가 된다고 답하였습니다. 이에 도화녀를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해에 진지왕이 폐위되어 죽었습니다. 그리고 도화녀의 남편 역시 3년 후에 죽었는데 남편이 죽은 지 열흘 후 밤에 왕이 도화녀를 찾아온 것은 진지왕이었습니다, 진지왕이 남편이 없으니 이제 괜찮으냐는 말에 도화녀는 부모와 상의한 끝에 결국 방에 들어갔습니다. 왕은 7일을 머무르다가 사라졌습니다. 도화녀는 임신을 하였고, 남자아이를 낳았다. 그가 비형(鼻荊)이라고 합니다. 진평왕이 비형의 출생 사실을 알고, 궁 안으로 데려와서 길렀습니다. 비형이 15세가 되자 집사(執事)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런데 비형은 밤마다 궁 밖으로 나가 귀신을 데리고 놀다가 절의 새벽 종소리에 귀신이 흩어지면 그제야 돌아왔습니다.
도화녀와 진지왕은 특이하다고 할 수 있는데요. 남녀간의 만남이라는 것은 특별하지 않지만 왕과 서민의 만남이었다는것과 산 자와 죽은 자의 만남이었다는 것,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강제하지 않고 여자의 의사를 존중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화녀가 죽은 진지왕과 관계하여 아이를 낳았다는 것도 특이하며 그렇게 낳은 비형랑도 비범한 능력을 가졌으니 그것은 귀신들에게 공포의 존재로 군림하며 그들을 부렸다는 것입니다. 아마 도화랑도 이와 비슷한 능력을 지녔을 것이며 아들 비형랑에게도 대물림된 것입니다. 
비형랑은 귀신들과 어울렸으므로 그에 대한 괴이한 소문이 따랐을 것입니다. 이것이 진평왕에게 흥미가 있었습니다. 진평왕은 비형을 시험하고자 비형에게 귀신들을 시켜 신원사의 북쪽 강을 건너는 다리를 놓을 수 있느냐고 물으니 비형은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귀신의 무리를 시켜서 돌을 다듬어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만들었는데 귀교라고 불렀습니다. 이에 진평왕은 비형을 칭찬하였고 귀신 중에 인간 세상에 와서 도와줄 사람을 추천해 달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추천한 것이 바로 길달이었습니다. 길달은 집사 벼슬을 얻었으며 충직하게 정사를 돌보았습니다. 진평왕은 이에 대해 마음에 들어 했고  진평왕은 당시 아들이 없었던 각간 벼슬의 임종(林宗)이라는 인물에게 양자로 들이게 했습니다. 임종은 길달에게 흥륜사 남쪽에 문을 세우게 하고는 길달은 밤마다 문루 위에서 잠을 잤으니 그 문을 길달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길달이 임종의 딸을 범하고는 여우로 둔갑해 달아나자 비형은 다른 귀신들을 시켜 그를 잡아 죽였습니다. 그 뒤 귀신의 무리들은 비형의 이름만 듣고도 무서워하며 달아났습니다. 그래서 당시 신라 사람들은 “성스러운 임금의 혼이 아들을 낳았으니 비형랑이 머무르는 집이다. 날고 뛰는 모든 귀신의 무리들은 이곳에 머무르지 말라”라는 글을 붙여서 잡귀를 쫓는 부적으로 삼았습니다. 
‘제25대 사륜왕(舍輪王)의 시호는 진지대왕(眞智大王)으로 성은 김씨이며 왕비는 기오공(起烏公)의 딸인 지도부인(知刀夫人)이다. 대건(大建) 8년 병신(丙申)에 왕위에 올라 고본(古本)에는 11년 기해(579)라고 하였으나 오류이다, 나라를 다스린 지 4년 만에 주색에 빠져 음란하고 정사가 어지러우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폐위시켰다.’ 『삼국유사』

진지왕은 이러한 기록을 보면 음란한 이유로 폐위당한 것 같지만 자세한 상황은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진지왕과 관련하여 전해지는 도화녀 설화도 진지왕인 남편 있는 미모의 여성을 탐하려 했다는 것에서 음탕하다고 볼 수 있으나 실제적으로 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이것만으로 진지왕이 음탕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기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륜계(舍輪系)와 동륜계(銅輪系)의 대립이 진지왕 폐위의 가장 커다란 원인이었고, 진지왕의 ‘정란황음(政亂荒淫)’은 진지왕이 폐위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진지왕이 즉위하는 데는 거칠부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진지왕 원년에 그가 상대등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와 함께 태자 동륜의 아들이자 진지왕의 조카가 아직 어리다는 것도 사륜이 왕이 되는 것에 힘을 실어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륜이 성장함에 따라 귀족들의 의중도 이동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진흥왕에게도 책임이 있을 텐데요. 그는 말년에 불교에 심취하면서 정사를 뒤로 하였는데 그러면서 후계자를 정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은 듯합니다. 어쩌면 자신의 나이가 아직 40대이니 그런 것에 큰 신경을 쓰지 않을 수도 있는데요. 그런데 진흥왕이 사망하면서 차기 왕을 사륜을 정하고 갔는지 그리고 그런 것에 대해 거칠부에게 부탁하고 갔는지 또한 동륜태자를 따르는 이들에게 사륜을 모실 것을 당부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다짐을 받더라도 그것이 현실에서 충성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편 진지왕이 박씨 진골귀족을 비롯한 새로운 세력과 연대하려고 하다가 실패하자, 숙흘종(肅訖宗)을 비롯한 진골귀족세력들이 진지왕을 폐위시키고 ‘정란황음’을 표면적인 폐위 명분으로 내세웠다고 하거나 진지왕은 제왕(帝王)의 위용을 갖추지 못하였는데, 반대세력이 진지왕의 강력한 후원자인 거칠부(居柒夫)가 사망하자, 곧바로 그를 폐위하였으며, 그 후 진지왕은 2년 남짓 유폐 상태로 지내다가 사망했다고도 보고 있습니다. 한편 진지왕이 정사(政事)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 정치가 문란해진 상황에서, 거칠부 사망 후 진골귀족 사이에 정국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갈등이 나타났고, 여기에다 대외적으로 백제가 신라를 위협하면서 위기감이 고조됨에 따라 진골귀족들이 진지왕을 폐위시키고 나이 어린 동륜태자의 아들인 백정을 왕위에 옹립하였다는 것도 제기되었는데요. 그러한 와중에 그가 나은 아들 용춘은 나중에 김춘추를 낳게 됩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