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평왕은 어떻게 하늘로부터 옥대를 받았을까

2023. 10. 14. 18:0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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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26대 왕은 진평왕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동륜으로 진흥왕 시절 태자였으나 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으며 어머니는 진흥왕의 누이인 만호부인으로 동륜태자 부부는 근친혼의 사례였습니다. 진평왕의 본명은 백정(白淨), 부인은 복승(福勝)갈문왕의 딸인 마야부인(摩耶夫人)이었습니다. 그리고 즉위한 직후 친동생인 백반(伯飯)은 진정(眞正)갈문왕, 국반(國飯)은 진안(眞安)갈문왕으로 책봉하여 왕실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주목되는 것은 진평왕의 가족 이름이 모두 인도 석가왕실 가족들의 이름에서 그대로 따왔다는 점입니다. 석가의 부모인 백정(白淨,또는淨飯,Śuddhodana)과 마야(摩耶,Māyā), 석가의 형제인 백반(白飯,Śuklodana)과 곡반(斛叛,Droņodana) 등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여기에 영향을 준 것은 대승불교이며 왕즉불 사상입니다. 그리고 전륜성왕이라는 불교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군주는 현실에서도 적용되어 현실에서의 이상적인 군주는 곧 부처로 여겨질 수 있었고 왕권강화에 기여했을 것입니다. 한편 당시에는 불교에 반대하는 귀족들도 있었을 것이고 불교 입장에서는 포교를 위해 후원세력을 포섭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특히 그 세력이 왕실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불교는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데 기여함으로써 불교에 전파하는 데 이용했을 것이고 왕실의 힘을 빌리는 데에 제시된 것이 바로 신라 왕실이 곧 석가불의 종족이라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진평왕의 출생 시기에 대해서는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화랑세기』에서는 567년에 태어났다고 하지만 학계에서는 『화랑세기』를 위서로 정하고 있습니다. 진평왕이 왕위에 오른 연도는 579년입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태자 동륜이 죽은 것은 572년입니다. 그리고 진흥왕이 죽은 576년인데요. 이전에 진지왕이 오르기 전에 왕 후보로 거론된 백정은 나이가 어려 왕이 되지 못했습니다. 진흥왕은 7세의 나이에 왕이 되었으니 아마 후에 진평왕이 되는 백정은 진지왕이 즉위하던 당시에는 7세가 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진지왕이 즉위하던 시기에는 백정의 나이는 4세에서 6세로 추정할 수 있는데요. 그에게는 두 명의 동생이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합니다. 진흥왕이 죽게 되는 576년이고 그의 아버지 동륜이 572년에 죽었으므로 그의 두 동생은 4세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연년생을 태어났다하면 백정은 진지왕이 왕에 오르던 당시에는 6세였을 것입니다. 물론 진흥왕이 7세에 왕위에 올랐다는 것을 사실에 비추어 보았을 때 백정은 이 시기에 나이가 어려 왕위 되지 못했으므로 6세 이하로 잡는다는 가정 하에서입니다. 또한 동륜이 태자가 된 것은 566년입니다. 이 때 백정이 태어났다고 생각한다면 576년에는 백정은 10세가 됩니다. 그렇게 보면 진지왕이 즉위할 당시 백정은 6세에서 10세 정도의 소년이었고 진흥왕이 왕이 되던 시기와 비교해서 신라의 규모가 커졌기 때문에 왕위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고 또한 진흥왕의 다른 아들인 사륜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여건상 왕위는 당시 진지왕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4년이 지났습니다. 바로 진지왕이 폐위당하던 시점이었습니다. 이때에는 백정의 나이가 9세에서 13세가 되니 왕위에 올릴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진지왕이 즉위할 적에 신장이 11척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내제석궁에 거동하여 섬돌을 밟자 두 개가 한꺼번에 부러졌습니다. 왕이 좌우를 돌아보면서 말했습니다. 
‘이 돌을 옮기지 말고 그대로 두었다가 뒷 세상 사람들이 보도록 하라.’ 
이것이 바로 성 안에 있는 다섯 개의 움직이지 않는 돌의 하나라고 합니다. 한편 진평왕 즉위원년(元年)에 천사(天使)가 대궐 뜰에 내려와 왕에게 말하는데요. 
“상제(上帝)께서 제게 명하여 이 옥대(玉帶)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왕이 꿇어앉아 친히 이것을 받으니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교사(郊社)나 종묘(宗廟)의 큰 제사 때에는 언제나 이것을 띠었습니다. 그 후에 고구려왕이 신라를 치려하면서 물었습니다.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서 침범하지 못한다고 하니 그게 무엇이냐.”하니  “황룡사(皇龍寺)의 장육존상(丈六尊像)이 그 첫째요, 그 절에 있는 구층탑이 그 둘째요, 진평왕의 천사옥대(天賜玉帶)가 그 셋째입니다.”라는 말을 듣고는 신라를 공격할 계획을 중지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무엇을 의미할까. 이야기는 진평왕의 위대함을 설명하기 위해 신체적 특징이 남과는 다르다고 하면서 하늘로부터 물건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불교의 제석신앙(帝釋信仰)과 관련시켰다고 볼 수 있는데요. 제석은 인도의 고대신화에 등장하는 인드라(Indra)신을 가리키는데, 불교에 수용되어 수미산 도리천의 선견성(善見城)에 거주하면서 사방을 수호함과 아울러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이 되었습니다. 진평왕대 이미 제석신앙을 수용하여 왕궁 안에 내제석궁(또는 천주사)을 설치하고 왕권강화에 이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석천은 하늘의 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진평왕이 무릎을 꿇고 옥대를 받았다는 것은 부처님도 인정했다는 것으로 진평왕이 숙부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것에 대한 정당성을 설파하기 위한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석가종족이라는 이념에 따라 절대적인 왕권을 행사하려 한 진평왕에게 순조로웠던 국정운영과는 달리 다른 데서 시련이 찾아옵니다. 첫째 자식으로 딸이 태어난 것입니다. 물론 아들딸 나올 확률은 반반이지만 자신들을 석가의 가족이라고 칭할 정도로 왕실을 신성시했을 텐데 첫 딸 덕만의 출생으로 대놓지는 못해도 많은 귀족들이 의구심을 품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이후에도 둘째딸로 낳은 것은 나중에 김춘추의 아내가 되는 천명부인입니다. 여기에 더해 『삼국사기』에는 없지만 『삼국유사』에서는 또다른 진평왕의 딸을 기록하는데요. 그것은 셋째딸인 선화공주입니다. 하늘로부터 옥대를 받을 정도로 자신이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설파한 진평왕이지만 자녀생산에서는 남자형제들만 있던 석가모니와는 달랐던 것입니다. 

여기서 다음 왕위 계승이 문제가 될 것인데요. 진평왕의 다음 왕은 선덕여왕입니다. 모든 것이 남성중심이었던 7세기 중반 선덕왕과 진덕왕이라는 두 명의 여왕이 나왔다는 것은 속시원한 해답을 찾기 어려운 것인데요. 이에 대해 기존의 역사학자 이병도가 주장한 것을 수용하여 신라 최고의 지배신분계층인 성골은 부모 모두 왕족이며 진골은 어느 한쪽이 왕족이라는 점을 이야기했습니다. 문제는 김춘추는 진지왕이 할아버지이고 아버지가 김용수(혹은 김용춘), 어머니 또한 진평왕의 딸인 천명부입니이다. 따라서 김춘추는 부모 모두 왕족이므로 성골이어야 한다. 그런데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모두 김춘추가 진골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신라에 성골이라는 신분은 없었다고 하는데요. 
여기에 더해 진평왕의 죽음과 함께 성골신분인 남자들이 없어짐에 따라 바로 진골출신 남자에게 왕위가 넘어가지 않고 왜 성골들인 선덕, 진덕의 두 여왕이 등장하게 되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대해  김춘추가 할아버지인 진지왕이 정치를 잘 하지 못해 왕위에서 쫓겨나면서 그 아버지인 용수, 혹은 용춘 또한 성골거주지역인 왕궁에서 축출될 때 이미 그 집안이 진골로 신분이 떨어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법흥왕 7년(520년) 율령이 반포될 당시 성골, 진골, 6두품을 비롯한 골품제의 각 신분이 공식화된 것으로 보면서 성골은 왕을 중심으로 한 그 형제 가족공동체로서 금성이니 사량궁이니 하는 왕궁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며 따라서 즉 성골이 되기 위해서는 왕 혹은 그 형제가족일 것이며 또한 반드시 왕궁 안에 거주해야 한다는 두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골은 새로운 왕이 등장할 때마다 그를 중심으로 새롭게 만들어졌으며 그 범위를 벗어나면 성골도 진골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당시 여자도 한 대에 한해서이긴 하나 가계 혈통을 이을 수 있는 ‘부계성원권’이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선덕은 여자였지만 부계성원권에 의해 성골 신분으로 왕위에 올랐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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