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을 도운 남자들

2023. 10. 15. 18:05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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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27대 왕은 선덕왕으로 『삼국유사』에서는 선덕여왕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덕만인데요. 진평왕이 그의 아버지고 그의 어머니는 석가모니 어머니의 이름을 한 마야부인으로 진평왕은 자식으로 아들을 바라고 있었으나 딸이 태어났습니다. 그의 왕명은 선덕도 역시 불교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여러 불경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름이라고 합니다. 선덕여왕에 대해서는 진평왕의 장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편 진평왕의 딸로 천명부인이 있는데 그의 어머니가 마야부인이 아닐 가능성도 있어서 선덕여왕은 천명부인보다 늦게 태어났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런데 진평왕이 후계자로 덕만을 정했을 때 반발은 없었을까요. 칠숙과 석품이 반란을 일으키니 그 때가 631년 5월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때의 반란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 때 후에 진덕여왕이 되는 승만공주는 몇몇 낭도들의 호위를 받으며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는데 이 때 뒤늦게 움직이던 석품은 이를 알아보고 일이 글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낭도들은 반란군들을 기습하였고 칠숙을 비롯한 반란군은 당황하여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하고 흩어졌습니다.  덕만은 나머지 잔당들을 잡아들이는 한편, 도망간 석품을 추적하니, 석품은 멀리 도망갔다가 가족들을 보고자 나무꾼의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왕경에 돌아왔다가 잠복 중이던 병사들에게 잡히고 말았습니다. 이후 진평왕이 죽게 되었으니 그 때가 632년이고 선덕여왕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그리고 633년에는 이전 해에 가뭄이 들었으므로 세금을 면제하였으며 634년에는 연호를 인평이라 고쳤습니다. 
선덕여왕 재위 전에 있었던 반란에서 알 수 있듯이 여성이 신라의 왕이 되었다는 것에 대한 반감과 우려가 컸습니다. 이는 국제적으로도 이야깃거리가 되었는데요. 공주이던 시절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고 하니 왕으로서의 자질은 어느 정도 갖추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자 결국 덕만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인데요. 덕만이던 시절 당나라에서 가져온 모란꽃의 그림과 꽃씨를 덕만에게 보였는데, 덕만이 말하기를, “이 꽃은 비록 빼어나게 아름다우나 틀림없이 향기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실제로도 그러했는데 어떻게 알았느냐는 질문에 ‘꽃을 그렸으나 나비가 없는 까닭에 그것을 알았습니다. 무릇 여자가 뛰어나게 아름다우면 남자들이 따르고, 꽃에 향기가 있으면 벌과 나비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이 꽃이 매우 아름다운데도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틀림없이 향기가 없는 꽃일 것입니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선덕왕이 짝이 없음을 희롱한 것이라는 선덕왕의 해석이 실려 있습니다. 당시 당나라 화풍에서는 꽃을 그릴 때에 벌과 나비를 그리지 않는 것이 관례였는데, 그럼에도 선덕여왕은 지레짐작으로 그림의 의미를 위와 같이 해석하였을 것을 보았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지은 건축물이 바로 분황사 석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황사(芬皇寺)는 선덕여왕 3년(634년)에 창건되었으며 한 문헌기록에는 ‘왕분사(王芬寺)’라고도 하였습니다. ‘분(芬)’자가 향기롭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 분황사는 ‘향기로운 임금의 절’이라는 의미로 풀이될 수 있습니다. 이는 이전에 있었던 모란그림 일화에 대해 대응한 것을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선덕여왕에 대한 평가는 우리나라 역사가에게도 박했습니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은 이렇게 평했습니다.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한 것이니 어찌 늙은 할멈이 규방에서 나와 국가의 정사를 처리할 수 있겠는가. 신라는 여인을 세워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진실로 어지러운 세상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렇게 지어진 분황사 모전탑은 우리나라 불교탑 역사에 있어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신라는 전탑에서 모전석탑을 거쳐 석탑으로 이행하게 되는데 목탑은 불에 잘 탔기 때문에 불에 강하고 단단한 재질로 바뀐 것입니다. 이렇게 지어진 분황사 모전석탑은 전탑과 모전탑을 통틀어 백미로 높이가 9.3m에 달합니다. 지금은 3층이 남아 있지만 원래는 7층 또는 9층이었을 것을 짐작됩니다. 

선덕여왕이 왕을 유지하는 데에 있어 조력자가 있었습니다. 일단 진지왕의 아들로 진평왕과 사촌이 되는 선덕여왕의 당숙 용춘입니다. 용춘은 선덕여왕의 당숙이자 선덕여왕과 자매인 천명부인과 부부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용춘은 덕만에게 마음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진평왕은 덕만과 용춘을 이은 것은 정치적으로 보좌하기 위함이었는데 이들에게서 자식이 생기지 않았고 이에 진평왕은 용춘의 형인 용수와 덕만을 연결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도 자식은 생기지 않았고 용수는 일찍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덕만이 왕이 되고 덕만은 용춘을 불러 자신의 남편으로 삼았습니다. 국정책임을 용춘에게 맡긴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신라는 세 남편의 제도라는 것이 있어  용춘 외에 두 명의 '부(副)남편'을 더 두어 총 세 명의 남자가 여왕을 모시도록 하였습니다. 이때 흠반이라는 사람과 함께 '부남편'에 오른 인물이 바로 을제라고 합니다. 아마 이 제도는 용춘이 선덕여왕의 곁을 떠날 것을 대비하여 만들어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용수가 죽고 용춘이 떠난 상황에서 그 자리를 메꾼 것은 을제라는 인물입니다. ‘선덕이 정치를 을제에 맡기면서(善德乃委政于乙祭) 공(용춘)에게 물러나 살 것을 허락했다’라는 『화랑세기』의 기록이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선덕여왕 원년(632) 2월에 대신(大臣) 을제(乙祭)에게 나라의 정치를 총괄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따라서 덕만이 공주였을 때에는 용수, 용춘 형제가 덕만공주의 남자이자 정치참모역할을 했지만 덕만이 왕위에 오르면서 그 역할을 을제가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덕여왕과 을제의 결합은 후사를 염두에 둔 것도 있습니다. 따라서 을제와 선덕여왕의 나이차가 그리 크지 않았을 것으로 보지만 최근에는 을제가 덕만보다 나이가 한참 많았을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여왕으로서 선덕왕은 그 재위가 불안했습니다. 하지만 유지한 데에는 조력자가 있었을 것이며 그 중에 김춘추가 있습니다. 덕만 공주이던 시절 김유신의 동생 문희가 김춘추와 연애를 하여 아이를 갖게 되자 유신이 불을 피워 죽이고자 했습니다. 이에 덕만공주가 그 집에 이를 이유를 물어 사정을 알고 김춘추로 하여금 여인이 죽지 않게 혼인의사를 밝히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김춘추와 문희를 연결해 준 것은 덕만 공주로 이후에 김춘추는 선덕여왕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에 따라 김유신의 지원도 받게 되는 것은 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덕여왕의 재위에 불교 승려들도 보탰습니다. 그 중에 자장이 있었습니다. 자장은 당나라에 건너가 불법을 닦은 인물로 유학중에는 직접 문수보살을 만났다고 합니다. 한편 자장은 신령스러운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게 되니 ‘지금 너희 나라는 여자를 왕으로 삼아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으므로 이웃 나라에서 침략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러니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거라. 황룡사 안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들이 항복하고 동방의 아홉나라가 와서 조공을 바치며 왕 없이도 영원히 편안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장은 귀국하여 선덕여왕에게 탑을 세울 것을 권하였고 그리하여 백제에 부탁해 최고의 장인 아비지와 목수들을 데려와 황룡사 9층 목탑을 만듭니다. 
한편 『삼국유사』 권제1 기이(紀異)제2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조에는 이밖에 백제의 침공을 미리 안 일, 자신의 장지(葬地)가 나중에 도리천(忉利天)으로 인식될 것을 미리 알았음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여왕의 즉위를 합리화하고 권위를 높이기 위한 왕권 수식(修飾) 설화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재위기간은 평탄치 않았는데 그의 곁에서 그를 도와주는 측근들이 있어 나라를 운영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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