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품제 최고등급 성골은 무엇인가

2023. 10. 17. 20:04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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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654) 봄 3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시호(諡號)를 진덕(眞德)이라 하고 사량부(沙粱部)에 장사를 지냈다. 당(唐)나라의 고종(高宗)이 〔소식을〕 듣고 영광문(永光門)에서 애도를 표하고 태상승(太常丞) 장문수(張文收)를 사신으로 보내서 부절(符節)을 가지고 조문하게 하였으며,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추증하고 비단 300단(段)을 내려 주었다. 나라 사람들[國人]은 시조(始祖) 혁거세(赫居世)부터 진덕왕(眞德王)까지의 28명의 왕을 일컬어 성골(聖骨)이라 하고, 무열왕(武烈王)부터 마지막 왕까지를 진골(眞骨)이라고 하였다. 당나라 영호징(令狐澄)의 『신라기(新羅記)』에는 “그 나라의 왕족은 제1골(第一骨)이라 하고, 나머지 귀족은 제2골(第二骨)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진덕여왕의 성골신분의 마지막 신라의 왕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성골은 신라의 골품 중 최고 신분입니다. 그리고 이 신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크게 법흥왕 대와 진평왕대로 갈라지고 있으나 진덕여왕 이후로 왕통이 성골에서 진골로 바뀐 것에는 대부분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럼 신라는 처음부터 성골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초기 신라에서는 아시다시피 박씨, 석씨, 김씨가 돌아가며 왕위에 오른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왕위계승에도 변화가 생깁니다. 그 시점은 내물왕 대인데요. 고구려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가던 시점이었습니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에게서 군사시스템과 여러 가지 전략에 필요한 것을 배워갔습니다. 눌지왕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아버지 내물왕의 즉위에도 고구려가 관여했을 것이고 그 이후로 신라는 고구려로부터 여러 전략적인 것을 얻어갔으니 신라가 친고구려성향을 지닌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가 남진정책을 추진하면서 상황은 바뀌게 됩니다. 신라는 이러한 고구려의 정책에 반기를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눌지왕이 신라의 왕경에 배치한  고구려 군사고문단 100명을 처치한 것은 더 이상 친고구려 노선을 걷지 않을 것이며 향후 대응까지 암시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렇게 내물왕계가 신라왕실을 독점했고 법흥왕 대에는 이를 법적으로 조치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내물왕의 직계 후손들을 많아졌습니다. 그와 함께 신라도 팽창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전리품과 토지가 분배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다보니 진골이라 불리는 이들의 세력이 커졌습니다. 그들은 왕실에서 거대한 건축을 진행할 때에도 진골 귀족 소유의 장인을 투입하였으며 신라의 관청 운영에도 진골 귀족의 영지에서 나온 수입이 들어갔습니다. 그 보답으로 해당 지역에 대한 세금이나 전쟁으로 얻은 노획품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진골귀족들은 저마다의 군대를 가지고 있었고 신라가 다른 나라와 전쟁을 치를 적에 이들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화백회의를 통해 이들의 군사를 얻어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당시 진골의 권한은 상상 이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고귀한 신분자이기도 했지만 신라라는 나라에 대한 일정 지분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진골귀족들이 이권을 두고 다툴 때면 왕은 그 중재자로 나섰으며 설사 진골이 아닌 사람이 장관이나 장군이 되었다손 하더라도 그에 따른 부와 인력이 없으니 일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또한 진골귀족들은 화백회의에서 왕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폐위를 결정할 수도 있었습니다. 마음에 드느냐 들지 않느냐는 왕이 진골귀족들의 이익을 대변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579년에는 진지왕이 폐위 당했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것은 진지왕의 형 동륜태자의 장남 백정이 왕위에 올라 진평왕이 되었습니다. 결국 이 시기 신라왕의 자질은 내치와 외치를 비롯한 국정운영과 대외외교 그리고 여기에 진골귀족들에게 얼마나 잘하느냐도 달린 것입니다. 당시 국제정세는 복잡했습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하였고 전투의 결과는 신라에도 영향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평왕은 고구려의 압박으로부터 백제와 공조하고 수나라와도 친선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에 백제는 고구려의 편에 섰으며 611년 10월에 신라의 가잠성을 100일 동안 포위하였습니다. 그리고 함락하여 백제에 내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에 벌어진 수나라의 대대적인 고구려정벌은 실패로 끝났으니 그것이 바로 고구려가 수나라를 상대로 펼친 살수대첩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이어진 3차원정도 수나라 후방에서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제대로 진행될 수 없었습니다. 수나라의 패배는 신라의 위기감을 가중시켰습니다. 이에 진평왕은 황룡사에서 백고좌회를 열었습니다. 원광에게 경을 강설하게 하였으며 많은 승려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이는 수나라가 패배하고 고구려와 백제의 압박이 예상되는 가운데 벌어진 행사로 이것으로 민심을 달래는가 한편 충성심을 유도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을 보며 진골귀족들도 진평왕에대해 높은 평가를 내렸을 것입니다. 과하게 생각하면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진평왕은 신라를 존속시키기 위해 고구려, 백제와 대결해야 했으며 진평왕의 기적을 본 진골들은 아낌없이 병력과 자원을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진평왕에 반대하는 세력은 이내 진압당했습니다. 그만큼 진평왕을 지지하는 세력이 탄탄했다는 것입니다. 이러는 과정에서 신라의 진평왕의 직계 가족들을 보는 시선이 달라지게되고 그들을 신성시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골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진평왕의 대한 경외심은 그의 가족들에게 확장된 것이며 후에 덕만이 신라의 왕위의 자리에 오른 것은 이런 것에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632년 덕만이 왕위에 오르며 선덕여왕이 되었으니 고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칭호를 올렸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여러 의미가 있는데 ‘성스러운 임금 큰 어머니’라는 뜻으로 보기도 하며 이를 위대한 진평왕의 딸 또는 신성한 조상의 황통을 이은 여인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한편 성골에 대한 다른 의견으로 법흥왕을 예로 들었습니다. 520년 법흥왕이 율령을 반포하면서 성골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전부터 존재했던 귀족계급 진골보다 상위 신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골은 왕과 그의 형제, 그들의 자녀로 이뤄진 혈족집단’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인류학에서 흔히 말하는 종족집단이며 핵가족보다 한 단계 확대된 집단이라고 보면 된다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왕의 혈육이라고 해서 무조건 성골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후궁이 아닌 왕비(황후, 왕후 등으로 불렸다)가 낳은 자식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새 왕이 즉위하면 새로운 성골 집단이 만들어지는데 이 경우 이전 왕의 형제와 자녀들은 진골로 신분이 떨어졌다(족강·族降)고 합니다. 새롭게 편입된 성골 중에서 재위 중인 왕의 다음 대(代), 곧 그의 아들이나 형제의 아들은 모두 왕위 계승자로 선택될 수 있었습니다. 법흥왕에 이어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이 재위했을 때도 각각의 왕을 중심으로 한 성골 집단이 있었습니다. 진흥왕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습니다. 장남 동륜태자가 개에 물려 죽는 바람에 차남이 왕위에 오르니 바로 진지왕입니다. 진지왕 다음 대는 다시 장남 직계로 동륜태자의 장남이 왕위에 오릅니다. 문제는 진평왕 대에 발생합니다. 성골남자가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성골이던 덕만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당시 고구려 백제는 물론이고 중국에서도 여자 왕이 배출된 일이 없었습니다. 그 시대 시각으로 보면 이상해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신라에서 가능했던 것은 결국 계급제도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진평왕에게는 선덕뿐만 아니라 천명이라는 딸이 있었습니다. 진평왕은 당초 맏딸 천명의 남편인 용수를 왕위 계승자로 점찍었으나 선덕의 자질이 점차 빛을 발하자 그런 생각을 버리고 천명공주와 더불어 출궁토록 했다고 합니다. 천명은 출궁 즉시 성골에서 진골로 족강되어 왕위 계승 자격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선덕여왕의 정치력에 대해서는 의문을 달 수 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사망할 때까지 왕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던 것은  그녀를 지지하는 정치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라도 부계사회였습니다. 다만 여자 집안의 신분이 높으면 남자가 여자 거처로 옮겨 여러 사회적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하니 이러한 분위기에서 덕만이 성골여자로 왕이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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