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당전쟁과 신라-왜의 관계
2023. 10. 18. 20:08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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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 것은 문무왕 시기로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661년 7월이었습니다. 문무왕은 진덕여왕 4년인 650년 아버지 김춘추의 뒤를 이어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며, 654년 아버지 김춘추가 임금으로 즉위하자 파진찬 벼슬에 올랐습니다. 이후 그의 나이 35세 때인 660년 나당연합군의 백제 정벌에 직접 참전했습니다. 당시 태자 법민이었으며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에서 소정방을 맞이하였으며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의 합류하여 사비성공격에 합류하였습니다.
‘법민이 융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었다. "예전에 너의 아비가 나의 여동생을 억울하게 죽여 옥중에 묻은 적이 있다. (그 일은)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마음이 아프고 골치를 앓게 하였는데, 오늘날 너의 목숨이 내 손 안에 있구나!" 융은 땅에 엎드려 말이 없었다.’ 『삼국사기』
여기서 말하는 여동생은 대야성에서 죽은 대야성주 김품석의 아내인 김고타소입니다. 한편 백제가 김품석이 성주로 있던 대야성을 칠적에 백제의 침공으로 대야성 전투가 벌어지는데 신라군이 방어에 실패해 대야성이 함락될 위기에 놓이자 대야성주 김품석은 아내 김고타소를 죽이고 본인도 자살했다고 합니다. 660년 의자왕의 항복으로 일단 멸망하기는 했으나, 귀실복신과 승려 도침을 중심으로 한 백제부흥군이 남아있는 백제 땅 대부분을 장악하고 여전히 세력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백제부흥군의 결집에는 당나라군의 수탈도 한 몫했습니다. 당나라군은 백제 영토에 5개의 도독부를 설치하고 직접 영토로 삼으려 하였으며, 백제 영토에 주둔한 당나라 군사들은 잔혹한 살육과 약탈을 일삼았았던 것입니다. 문무왕은 당나라군을 이용하여 백제 부흥운동군을 제압해 나갔습니다. 그러면서 당나라에 휘둘리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당연합군은 백강하구에서 백제,왜 연합군을 격파시킵니다.
이어서 고구려 정벌에 나섰습니다. 662년에는 당나라군은 공격하고 신라는 보급을 맡았으나 실패하고 , 668년에도 남쪽에서 수 만명의 군세를 북진시켜 사천 전투에서 승리하고 이어 평양성을 포위하여 함락함으로써 고구려를 멸망시켰습니다. 이 때는 백제의 정벌 때만큼 신라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이후 신라는 당나라의 일전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663년 당나라는 일방적으로 신라에 계림대도독부 설치를 통보하고 문무왕을 계림주 대도독으로 임명합니다. 당시 당나라는 신라를 자신의 행정구역의 하나쯤으로 여기며 인 백제의 왕자 부여융을 웅진 도독으로 삼아 취리산에서 문무왕과 회맹을 맺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전부터 이미 문무왕은 나당전쟁을 준비하였고 구진천으로 하여금 군사 훈련과 무기 개발에 집중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면서 고구려계 주민도 포섭해 나갔습니다. 문무왕은 670년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봉했으며 나당전쟁의 시작인 요동 선제공격도 신라 장수 설오유와 고구려 유민 장수 고연무의 연합으로 이루어졌습니다. 670년 7월에 품일 등을 시켜 백제 지역을 공격해 63개성을 차지하고 그곳 백성들을 신라 땅으로 옮겨 살게 했습니다. 그리고 천존, 죽지 등의 장수도 일곱 성을 장악하고 도독부 병력 2천여 명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군관과 문영도 열두 성을 뺏고 적병 7천여 명을 죽엿습니다. 671년에는 당나라 장수 고간 등이 번병 4만을 거느리고 평양에 도착하여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놓이 쌓은 다음 공격을 했습니다. 이에 신라는 당의 수송선 70여 척을 궤멸시켰습니다. 그리고 672년 8월에는 평양근처에서 당군을 크게 격파하였습니다. 그러나 달아난 당군을 쫓다가 석문에서 패배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당고종은 문무왕의 관작을 삭탁하고 김인문을 신라왕을 앉히려고 하였습니다. 이 때 문무왕이 당에 사신을 보내 사과했습니다. 그리고 문무왕의 관작은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675년 가을 9월에 설인귀(薛仁貴)가 숙위학생(宿衛學生) 풍훈(風訓)의 아버지 김진주(金眞珠)가 본국에서 목 베여 죽임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당나라는 풍훈을 길을 이끄는 사람으로 삼아 천성(泉城)을 공격해 왔습니다. 신라 장군인 문훈(文訓) 등이 맞서 싸워 이겼는데, 1,400명을 목 베고 병선(兵船) 40척을 빼앗았습니다. 설인귀가 포위를 풀고 달아나자 전마(戰馬) 1,000필을 얻었습니다. 675년 9월 29일에 이근행(李謹行)이 군사 200,000명을 이끌고 매소성(買肖城)에 머물렀습니다. 신라 군사가 공격하여 달아나게 하고 전마(戰馬) 30,380필을 얻었는데, 남겨놓은 병장기도 그 정도 되었습니다. 한편 군사 20만에 대해서는 과장이라고 하며 4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보고 있는데요. 하지만 나당전쟁에 참가하였던 확인가능한 당나라의 행군총관(行軍摠管)은 고간, 이근행, 설인귀 등 3명이며, 복수의 행군(行軍)을 거느린 유인궤(劉仁軌)는 행군대총관(行軍大摠管)이었습니다. 당의 표준 행군 병력은 20,000명이며, 행군대총관이 거느린 병력은 최소 40,000명 이상이었습니다. 행군총관 3명이 거느린 병력이 60,000명, 대총관이 거느린 병력이 40,000명 이상이므로 100,000명을 상회하게 됩니다. 여기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산하의 병력과 지원부대 등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매소성전투에 투입된 당군 200,000명을 문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나당전쟁 수년간 투입된 당군의 전체 규모는 200,000명에 달할 수 있다고도 하는데요. 그만큼 나당전쟁에서 가장 핵심적인 전장(戰場)이 매소성이었기 때문에, 상징적인 의미에서 당군 200,000명이라고 기록을 남겼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전투로 백제의 옛 영토와 고구려의 남쪽 영토는 신라에 귀속되었습니다. 675년 9월에는 당나라 군사가 거란(契丹)과 말갈(靺鞨) 군사와 함께 와서 칠중성(七重城)을 에워쌌지만 이기지 못하였고 소수(小守) 유동(儒冬)이 죽임을 당하였으며 당나라 군사가 또한 석현성(石峴城)을 에워싸서 빼앗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676년 7월에는 당나라 군사가 와서 도림성(道臨城)을 공격하여 빼앗았습니다. 676년 11월, 기벌포 해전이 벌어졌습니다. 신라 수군은 당시 최강대국의 선진 함대를 맞이해 22회에 걸친 집요한 공격으로 4,00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벌포전투 이후 서해상에서 당군의 어떠한 군사활동도 감지되지 않는 점으로 보아 신라 수군이 서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675년 9월 매소성전투의 패배로 당군은 이미 철수를 시작한 시점이었습니다. 676년 11월에 왜 기벌포 전투가 벌어졌는지 그 이유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한편 문무왕대를 포함한 668년에서 700년까지 신라가 일본에 25회에 걸쳐 사신을 파견합니다. 사절단의 대표도 아찬 이상의 진골 왕족이나 고위인사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횟수에 김유신이 사절단에 포함된 것은 쉽게 믿을 수 없는 것인데요. 더욱이 사신파견에 대한 기록은 일본 측에는 남아있으나 한국 측에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한 교수는 8세기를 전후하여 신라가 일본에 조공하였으며 이것으로 신라와 일본의 관계가 안정되었다고 하는데요. 그러한 데에는 나당전쟁이 끝나고 당나라와 일본의 연합을 우려했다는 의견도 제시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나당전쟁에서 신라는 일정 수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는지도 몰라도 당시 신라 백성들이 다시 당나라와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부담을 넘어서 공포였을 것입니다. 678년 9월 당고종은 신라를 공격하려 했지만 시중 장문관이 토번 정벌이 시급하다하여 계획이 무산되었던 만큼 신라로서는 긴장되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국제관계를 고려하여 신라는 상당한 물품을 일본에 제공했으며 천황, 황후, 태자에게도 귀금속과 칼을 증여했습니다. 그리고 688년 2월 지토 천황이 즉위하자 신라는 사신을 보내 이를 축하하였습니다. 하지만 734년 당나라 현종은 대동강 이남의 땅을 신라의 영토로 인정했습니다. 이후에 신라는 일본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736년 신라에 파견되었던 일본 사신은 “신라가 상례를 지키지 않고 사신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보고하여 일본은 신라 정벌을 논의하기도 했습니다. 더 나아가 742년에는 경덕왕은 아예 일본의 사신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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