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를 왜 낙랑이라 했을까.
2023. 10. 20. 20:16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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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은 한나라의 옛 군현으로 기원전 108년 전한의 제7대 세종 무황제 유철이 보낸 한군이 고조선(위만조선)을 상대로 1년간의 치열한 전쟁 끝에 멸망시키고, 설치한 한사군 중 하나이다. 위치는 지금의 대동강 일대로 보는 것이 통설로, 특히 평양 일대에서 많은 유물과 고분이 발굴되었습니다. 한편, 한나라가 설치한 한사군을 요서 지방으로 비정하였는데 이는 한사군 요서설이라고 합니다. 그에 따르면 낙랑군의 위치가 달라질 수 있다는 면에서 한국고대사 뿐만 아니라 한국사 역사 통틀어 가장 논란거리 중의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낙랑군은 한군현 중에서 가장 오래 존속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낙랑의 위치를 시사하는 사료기사가 많은데요.
‘전한(前漢) 때에 처음으로 낙랑군을 설치하였으니 응소(應邵)註 305는 말하기를 “옛 조선국(朝鮮國)”이라 하였다. 『신당서(新唐書)』 주(注)석에 이르기를 “평양성은 옛날 한나라의 낙랑군이다.”라고 하였다.
『국사(國史)』에 이르기를 “혁거세(赫居世) 30년에 낙랑인(樂浪人)들이 항복해 왔다.”라고 하였다. 또 제3대 노례왕(弩禮王) 4년(27년)에 고[구]려(高麗)의 제3대 무휼왕(無恤王)이 낙랑을 쳐서 이를 멸망시키니 그 나라 사람들이 대방(帶方)과 함께 [신]라(羅)에 귀순하였다. 또 무휼왕 27년(44년)에 광호제(光虎帝-光武帝)가 사람을 보내어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郡縣)으로 삼았으니 살수(薩水) 남쪽이 한나라에 속하였다. (이상의 여러 글에 의하면 낙랑은 곧 평양성이란 말이 옳을 듯하다.) 백제온조의 말에 ‘동에 낙랑이 있고 북에 말갈이 있다.’ 하였으니 아마 한시의 낙랑군속현의 땅일 것이다. 신라인이 또한 스스로 낙랑이라 일컬었으므로 오늘날 본조[고려]도 이로 인하여 낙랑군부인이라고 일컫고, 또 태조가 딸을 김부에게 주고 낙랑공주라 하였다.’ 『삼국유사』 1권 〈기이〉 제1 낙랑국조
그런데 이 글에서는 낙랑을 평양과 연관 있다고 설명하면서도 신라와의 관련성을 짓고 있습니다. 즉, 신라를 낙랑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는 후대사람들에게 착오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습니다.
‘16년(594)에 수(隋)나라 황제가 조서(詔書)를 내려, 왕을 상개부(上開府)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삼국사기』에 중국에서 백제의 왕을 봉할 때 ‘대방군공(帶方郡公) 백제왕’, 신라는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 고구려는 ‘요동군공(遼東郡公) 고구려왕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고구려에게 낙랑군공이라고 중국입장에서 칭할 만도 한데 해당 명칭에 대해서는 신라에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신라에게 낙랑이라는 칭호를 내린 사례는 제법 있습니다. 당고조는 진평왕 46년 3월 (624년)에 진평왕을 ’주국낙랑군공신라왕‘으로 봉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왕은 선덕왕에게는 ’주국낙랑군공신라왕‘이라고 책명합니다. 또한 그 뒤를 이은 진덕왕에게도 ’‘주국낙랑군왕’이라고 책명합니다. 그리고 이후로는 당나라가 신라에 대해 ‘낙랑’이라고 붙인 당조의 책명이 등장하지 않다가 현종 원년 다시 등장합니다. 33대 성덕왕은 당 황제로부터 매우 긴 책명을 받았는데 끝에 ‘주국낙랑군공신라왕’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로는 신라에 대해 낙랑이란 것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낙랑이란 단어가 등장하게 되는데요. 위에서 언급했듯이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 김부에게 태조 왕건이 자신의 맏딸을 시집보내면서 ‘낙랑공주’라고 한 것입니다. 이후 고려에도 신라와 관련한 낙랑 기사가 있습니다. 『고려사』에서 동경유수관(東京留守官) 경주(慶州)는 본래 신라(新羅)의 옛 도읍이라 하면서 별호(別號)는 낙랑(樂浪)이라고 성종[成廟] 때 정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록을 보면 공통적으로 신라는 자칭 낙랑이라 한 적은 안보입니다. 다 외부에서 신라를 낙랑이라 한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왕조에서 신라에 대해 낙랑명 책봉을 한 것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성덕왕 시기가 마지막입니다. 그리고 고려 때에 이르러 경주와 구 주변을 낙랑이라는 별칭합니다.
하지만 신라에 대해 낙랑이라 한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인데 그것 자체가 신라 자체 내에서 원인을 찾기 힘들 것입니다. 외부에서 유독 신라를 낙랑이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국에 『북사』나 『북제서 혹은 『수서』, 『구당서』 이런 여러 책에는 신라의 위치에 대해서 “신라는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고 한나라 때 낙랑 땅에 신라가 있었다.”고 써 있습니다. 구당서에는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있다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옛날 중국 사람들은 신라가 옛날 낙랑 땅에 있던 나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역대 중국왕조의 통치자들이 신라에 대해 낙랑 책명을 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성덕왕 이후에는 신라에 대해 낙랑과 관련지어 책봉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혹여 그 시대에 들어 신라와 낙랑이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아닐까요.
고구려나 백제에 중국이 내린 봉호를 보면 확실해질텐데요. 『송서』 동이 고구려전에서는 고구려 왕 고련 즉 장수왕을 ‘…정동장군고구려왕낙랑공’으로 삼았습니다. 남조 시기의 소제와 그 뒤를 이은 세조(효무제)도 장수왕에 대해 ‘…정동대장군고구려왕낙랑공’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중국 남조에서는 고구려왕을 낙랑공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북조와는 이와 다르다고 합니다. 북위의 세조 태무제는 고구려 왕 연을 ‘도독요해제군사정동장군령호동이중랑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으로 배봉하였으며 그 뒤 북위에서는 긴 봉호를 쓰며 ‘…요동개국공고구려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수서』나 『당서』의 경우 고구려에 대해 맨 끝에 붙어있는 ‘요동왕’을 ‘고려왕’이라 바꿉니다. 반면 백제에 대해서는 『송서』등에서는 ‘…백제제군사진동(대)장군백제왕’, ‘…영동대장군백제왕’, ‘…수동장군백제왕’, ‘상개부대방군공백제왕’, ‘대방군왕백제왕’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경우 북조에서는 ‘요동개국공(요동군왕)고구려왕’ 남조에서는 ‘정동장군고구려왕낙랑공’으로 불렀으며 백제에 대해서는 ‘…동장군백제왕’, 혹은 ‘대방군왕백제왕’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아무래도 중국을 기준으로 하여 지역명을 연관시켜 이름을 지은 것 같습니다. 그럼 신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지만 증국의 사람들은 신라 위치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낙랑이라 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여기서 재미있는 가정을 할 수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중국인들의 기술과정이 틀리지 않았다고 가정하는 것입니다. 즉 신라가 진짜 낙랑의 자리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럼 일단 한사군의 한반도설에 따르면 낙랑은 평양에 있습니다. 그런데 평양에는 신라와 관련한 유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를 근거로 평양에 신라의 유적이 발견되지 않으므로 낙랑이 평양이라는 것을 잘못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한 삼국사기에서는 기원전 28년에 낙랑 사람들이 신라에 잠입했다가 변경 사람들이 밤에도 집의 문빗장을 걸지 않고 노적가리가 들에 뒤덮여 있는 것을 보고 이 지방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신라는 도가 있는 나라라고 하여 몰래 군대를 내어 습격하는 일을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낙랑이 대륙에 있고 신라가 경상도 지역에 있으므로 이것도 맞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를 가지고 우리 학계에서는 대륙신라설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경주에 있는 신라의 유적들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결국 신라가 대륙에서 출발해서 일부는 경상도 쪽으로 이주를 했고 일부는 대륙에 그대로 남았다고까지 이야기합니다. 사실 뒤에서 말한 대륙신라 관련 이야기는 여러 가지로 믿기에는 무리가 따르는데요. 어찌 보면 이와 같은 주장이 나오는 데는 중국 황제가 신라에게 낙랑이란 단어를 넣어서 책봉하게 되었고 이 기록이 여러 군데서 발견되다 보니 후대 사람들에게도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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