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전쟁 시기 대당외교관 김인문

2023. 10. 19. 20:10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

728x90

김인문은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둘째아들로 어머니는 문명왕후, 김유신의 누이입니다. 그러니까 외가는 가야의 왕족입니다. 그는 629년에 태어났으며 어렸을 적부터 유가 서적을 읽으며 관심을 키워나갔습니다. 그는 신라대의 외교관으로 알려져 있으나 궁술과 말타기에 능해 당대의 팔방미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덕여왕 재위기 당시 친당정책에 의해 651년, 23세 때 처음 당나라에 입조하여 653년까지 2년간 당에서 머물렀습니다. 당고종은 그가 멀리서 왕의 명령을 받들어 와있었으므로 충성이 지극하다하여 좌령군위장을 시켰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유일한 친필 글씨가 중국 당나라황제 별장인 구성궁(九成宮)에 남은 당나라 때 비석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수·당 시대 황제의 여름 별장 중 하나인 구성궁 터에 남은 당나라 때 비석 중 하나로 영휘 5년(654) 당 고종이 만년궁(萬年宮), 곧 구성궁에 행차했을 때 지은 '만년궁명비'(萬年宮銘碑)라는 비석 뒷면에 새긴 글인 음기(陰記)에서 김인문이 직접 쓴 글씨가 확인되었다는 것인데요.  비석 음기에서 김인문은 '좌령군장군 신 김인문'(左領軍將軍臣金仁問)이라는관직과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이 중에서 '김인문'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가운데 글자인 '仁'만이 확연해 종래 중국 학자들은 '薛仁貴'(설인귀)나 '劉仁軌'(유인궤), 혹은 '劉仁願'(유인원)으로 판독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 중국 학계 일부에서 이를 '김인문'으로 판독하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으며 우리나라 학자에 의해서 첫 글자가 ‘김(金)’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설인귀나 유인궤 혹은 유인원일 수 없는 결정적인 근거로 "당시 그들의 지위가 3품에 이르지 못했다고 하니 김인문이 확실했습니다. 반면 김인문은 이미 영휘 2년(651)에 고종한테서 종3품 좌령군위장군(左領軍衛將軍)이라는 관직을 제수 받고, 660년 신라와 함께 백제를 공격할 때는 관직이 부대총관 좌령군장군((副大摠管左領軍將軍)이었습니다. 나아가 관직과 이름을 직접 썼으니, 이 비석에서 확인되는 '좌령군장군 신 김인문'(左領軍將軍臣金仁問)은 현재까지 알려진 유일한 김인문의 친필 필적이라고 합니다.


김인문은 백제의 정벌을 논하기 위해 신라에 일시 귀국합니다. 656년의 일로 신라에 돌아온 인문은 압독주 군주가 되어 장산성 축조를 감독했다고 합니다.
‘6년(659) 여름 4월에 백제가 자주 변경을 침범하므로 왕이 장차 〔백제를〕 치려고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였다.’ 『삼국사기』
그는 당대 외교관으로 이름을 높였지만 무관으로서도 활약하였습니다.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의 공략을 받아 위험에 빠지게 되자 나당연합을 결성하게 되었는데요. 이 때 당나라군의 원조를 얻어낸 것이 김인문이었습니다.  당고종은 김인문을 불러서 도로의 험하고 평탄한 곳과 진퇴의 편의를 묻자, 인문이 매우 자세히 대답하였습니다. 황제가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이 일로 나당연합군은 백제를 치게 되었고 밲제는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백제 멸망 5년 후 신라왕과 망국의 왕자 융(隆)은 취리산(就利山)에서 만나 영원히 전쟁을 종식 시킬 것을 맹세합니다. 이 사건을 역사는 '취리산회맹'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라 측의 김인문(金仁問) 등이 웅진에서 부여 융을 만났습니다. 이 시기는 회맹이 이뤄지기 1년 6개월 전인 664년 2월이었습니다. 가운데는 당장 유인원이 입회했습니다. 이 모임을 일종의 종전선언을 하기 위한 것인데요. 664년에 있던 것은 일종의 예비회담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뒤 665년 8월 취리산에서 유인원이 입회한 가운데 신라측의 문무왕 및 여러 대신과 백제 측의 웅진도독 부여 융 사이에 회맹이 이루어졌습니다. 회맹은 중국 고대의 방식을 따라 이곳에 단(壇)을 쌓고 백마를 죽여 하늘과 땅의 신 및 산천의 신에게 제사한 후 그 피를 회맹인들의 입에 발라 맹세하게 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맹세하는 글(盟文)은 유인궤가 지었는데, 내용은 신라와 백제가 영원한 우방으로서 형제처럼 화친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일 이후 나당 연합군이 함께 이룬 성과는 당나라가 차지했습니다. 당나라는 의자왕을 비롯한 포로 1만2000명을 압송하는 한편 전리를 모조리 챙긴 뒤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떠난 것입니다. 그런 뒤 취리산 회맹에서 전쟁의 승리자인 신라에게 패배자인 백제와 형제의 화친 맺으라고 한 것입니다. 
고구려의 정벌에도 김인문은 참여하였습니다. 당고종은 소정방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임명하고 대군을 거느리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대동강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평양을 포위하였습니다. 하지만 고구려 사람들이 굳게 지켰기 때문에 이길 수 없었습니다. 군사와 말이 죽고 부상을 당한 것이 많았으며 식량을 조달하는 길도 끊겼습니다. 김인문이 웅진에 주둔하고 있던 유인원(劉仁願)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쌀 4,000석과 조(租) 2만여 석을 싣고 그곳에 다다랐습니다. 당나라 사람들은 식량을 얻었으나, 큰 눈이 내려 포위를 풀고 돌아갔습니다. 신라군이 돌아가려 하자, 고구려가 도중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공격하려고 도모하였습니다. 인문과 유신이 속이는 꾀를 내어 밤중에 도망하였습니다. 고구려인이 이튿날에야 깨닫고 인문 등을 쫓았으나 김인문 등이 돌아서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물리쳤습니다. 1만여 명의 머리를 베고 5천여 명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습니다. 이후 고구려 정벌에 다시 참여하여 힘을 보탰고 보장왕이 드디어 항복했습니다. 당시 김유신은 풍병으로 출전하지 못했고 김인문은 신라군 사령관이 되어 나선 것입니다. 이 때 당고종이 김인문더러 문무를 겸비한 인재라며 작위를 올리고 식읍을 상으로 주었다고 합니다.

이어 674년 나당 전쟁 기간 중 신라는 고구려의 반란군을 받아들이고 백제의 옛 땅을 차지했습니다. 당고종이 크게 노했습니다. 유인궤를 계림대총관으로 임명하고 신라를 공격하려 했으며 문무왕의 관작을 삭탈한다는 내용의 조서를 작성했습니다. 그런 뒤 당나라에 머물며 대당외교를 펼치던 사람을 왕으로 지목하여 신라로 보내려 한 인물이  있으니 그는 바로 김인문이었습니다. 김인문은  우요위원회대장군임해군공으로 당나라에 있었는데 다급해진 문무왕은 사절을 보내 사죄했고 당고종이 용서했습니다. 그의 형을 대신하여 계림주대도독개부의동삼사로 책봉한 것입니다. 하지만 김인문에게 이러한 관직책봉은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는 사퇴하겠다고 하였으나 고종은 들어주지 않았고 신라가 사신을 보내와 사죄를 하니 용서하고 왕의 관작을 회복시켰다고 합니다. 이후 신라는 신라는 당의 설인귀가 이끄는 군대를 대파해 1400명을 죽이고 이근행이 이끈 20만 대군을 맞아 매소성에서 크게 이겼습니다. 다음 해인 676년 당의 수군을 금강 하류 기벌포에서 섬멸했습니다. 그리고 당은 웅진도독부를 건안성으로 옮기고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요동성으로 이전함으로써 삼국통일을 완성하였습니다. 
 진덕여왕 때 김춘추가 신라와 당나라 사이 동맹 결성을 위해서 둘째 아들 김인문을 인질로 당나라에 남겼습니다. 훗날 문무왕이 동생 김인문을 멀리 두고 볼 수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하자 강수로 하여금 김인문을 돌려보내달라는 ‘청방인문서’라는 글을 짓게 하였습니다. 당나라 고종은 강수의 글을 읽고 눈물을 글썽이며 “김인문을 풀어주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김인문은 당나라를 오가며 중간자역할을 했으니 나당전쟁이었던 상황을 생각하면 난처한 입장이었을 것 같습니다, 결국 그는 당나라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694년 향년 66세였습니다. 당중종은 그의 죽음에 슬퍼하며 수의를 주고 관등을 높여주었다고 합니다. 
신라의 백제, 고구려정벌에는 김인문이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반면 당나라는 토번과 상대해야 했으므로 나당전잰을 마무리하는데요. 그렇다고 한반도에 대한 지배야욕이 꺽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678년 당 고종은 신라를 재침하려 했지만 토번정벌이라는 숙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나당전쟁에 대한 우려는 후에 왕권강화에 힘을 실어주게 되었습니다. 신라의 국내외적으로 급박한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게 한 것은 바로 김인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