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했던 선덕여왕의 신라

2023. 10. 16. 20:01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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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대에는 그의 영특함을 전하는 몇가지 설화가 전해오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옥문곡 설화입니다.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서 한겨울에 수많은 개구리가 모여 사나흘 동안 울어대는 일이 있습니다. 나라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왕에게 물었는데 왕은 급히 각간 알천(閼川)과 필탄(弼呑) 등에게 정예 병사 2000명을 이끌고 서둘러 서쪽 교외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을 물어보면 그곳에 틀림없이 적병이 있을 것이니, 습격하여 죽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두 각간이 명을 받고 각기 1000명씩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 교외로 가서 물었더니, 부산(富山) 아래 과연 여근곡이 있었습니다. 백제 군사 500명이 그곳에 숨어 있었으므로 그들을 에워싸서 죽였습니다. 백제 장군 우소(亏召)는 남산 고개 바위 위에 숨어 있었는데, 포위하여 활을 쏘아 죽인 것입니다. 또 후원병 1200여 명이 왔지만 역시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 죽였습니다. 『삼국유사』에는 여근곡이라고 되어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옥문곡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백제 장수 우소(于召)가 갑병(甲兵) 500명을 이끌고 신라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려다 옥문곡에서 패전한 기록이 있습니다. 『삼국유사』에서는 여근곡에 백제 군사가 있던 것을 안 것에 대해 선덕여왕은 ‘개구리의 성난 모습은 군사의 형상이고, 옥문(玉門)이란 여인의 음부(陰部)로서 여인은 음이 되며 그 색깔이 희다. 흰색은 서쪽을 나타내기 때문에 군사가 서쪽에 있음을 알았다. 남근(男根)이 여근(女根)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게 된다. 따라서 쉽게 잡을 수 있음을 안 것이다.’라고 답했습니다. 백제가 신라에 침입한 것은 사실이나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선덕여왕의 지헤로움을 부각시키기 위해 각색한 설화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덕여왕의 지혜로움을 예시로 들은 옥문곡 설화 이후에도 신라에의 침입은 계속 있었습니다. 백제가 이 싸움 이후 한동안 소강기미를 보이자 고구려가 침략한 것입니다.  고구려는 638년 10월 신라 서북부 변경인 칠중성을 공격했으나 선덕여왕은 알천를 출전시켜 고구려를 격퇴했습니다. 하지만 신라 내에서 이후로 이상한 일이 기록되었습니다. 7년(638) 봄 3월에 칠중성(七重城) 남쪽의 큰 돌이 저절로 35보(步) 옮겨가는 일이 있었고 같은 해 9월에는 누런 꽃이 비처럼 내리기도 했으며 8년(639) 가을 7월에 동쪽의 바닷물이 붉어지고 또 따뜻해져 물고기와 자라가 죽는 일이 발생합니다. 639년 7월의 일은  여름 철 고온으로 인한 동해의 적조(赤潮) 현상인데 『후한서(後漢書)』 오행지(五行志)에 따르면, 물이 본성을 잃으면 홍수, 혹한, 물의 변색 등이 나타나는데, 이는 군주(君主)가 총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일에 대한 진실을 따지기는 어렵지만 분명 당시 정국이 혼란스러웠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던 642년 백제 의자왕의 지시로 신라 40여성의 함락시켰고 이후에 백제와 고구려의 협공으로 당항성을 공략하여 신라의 해상교류를 단절시키려 했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 신라는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당나라는 신라의 왕이 여왕이라는 이유로 거절했습니다. 신라 선덕여왕은 고구려와 백제의 수차례 공격 속에서도 당나라에 조공을 바쳤지만 당나라는 신라가 여왕을 섬기고 있다는 이유로 업신여기고 돕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백제에 40여 성이 빼앗겼고 그 중 신라의 대야성도 있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신라는 많은 장수들을 잃게 되었습니다. 백제의 공격에 선덕여왕은 당에 이어 고구려 보장왕에 김춘추를 보내 도움을 청했습니다. 고구려 보장왕은 선덕여왕을 도와주지 않고 오히려 김춘추를 감금시켰습니다. 이에 선덕여왕은 김유신을 파견시켜 한강 북부까지 진격하게 하자 그제서야 보장왕은 김춘추를 풀어주었습니다. 이에 선덕여왕은 다시 당에 사신을 보내 군대를 요청하였습니다. 이 때 이세민은 세 가지 계책을 내놓았습니다. 첫째는 당이 거란과 말갈을 시켜 여동을 치면 고구려가 함부로 신라를 공격하지 못할 것이요, 둘째는 신라가 당나라의 옷과 깃발을 사용하면 고구려와 백제가 겁을 먹고 도주할 것이고, 셋째는 여왕을 폐위시키고 자기의 친족을 신라의 왕으로 앉히라는 것입니다. 이에 사신은 아무 답도 하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습니다. 644년에 다시 신라는 당에 군대를 요청하는 사신을 보냈고 신라에 대한 이용가치를 느낀 당나라는 이를 수락하였습니다. 
선덕여왕 시기에 종종 김유신이 활약하였으나 645년 당의 고구려원정길에 신라도 군대 3만을 동원하는 일이 있었으니 이 일로 백제가 신라의 일곱 성을 급습하여 차지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선덕여왕의 재위에 반대하는 세력이 대놓고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이들 세력은 여자가 왕이 되어 나라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는 것을 반정면분으로 삼았습니다. 국내외의 불안한 정세로 인해 백성들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선덕여왕은 황룡사 대탑을 건립합니다. 전쟁 중에 엄청난 인력과 자원이 드는 건축을 지시한 것입니다. 이러한 지시는 오히려 반정세력의 명분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이에 반란을 일으킨 자는 비담이었습니다. 그는 염종과 함께 선덕여왕이 정치를 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반란을 일으킨 것인데요.  선덕왕이 자신의 뒤를 이을 왕으로 성골 출신의 승만(勝曼)공주를 예정해놓고 있었는데, 신라 귀족들이 불만을 품고 반기를 든 것입니다. 반란군은 김유신이 척결하였으나 그 와중에 선덕여왕은 죽고 말았습니다. 아마 자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세력에 의해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김유신은 비담의 난을 진압하면서 심리전을 이용하였습니다. 김유신은 쿠데타 진압을 위해 경주 서쪽 월성에 군영을 차렸는데 비담의 반란군은 4㎞ 맞은편 동쪽 명활산성에서 서로 대치했습니다. 며칠 뒤 한밤중에 월성 하늘에서 유성이 떨어졌습니다. 비담 측은 진덕여왕이 크게 패해 망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김유신 측은 심리적으로 위기에 몰렸습니다. 김유신은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붙이고 커다란 연에 매달아 날려 보냈습니다. 마치 지난 밤 떨어진 큰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떨어졌던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을 전파시켰습니다. 김유신 측은 패배 불안감이 사라졌고 비담 측 사기는 떨어졌습니다. 그는 흰 말을 타고 큰 별이 떨어진 곳에서 제사를 올렸습니다. 신하가 왕을 없애려는 것은 천벌을 받는다고 외치며 반격에 나서 비담의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습니다. 
선덕여왕은 자신의 죽음도 예견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어느 해 어느 달에 죽을 터이니 자신을 도리천 가운데 장사지내라고 하였습니다. 신하들이 그 장소를 물으니 “낭산의 남쪽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왕이 말한 때에 왕은 죽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신하들은  낭산 남쪽에다 장사지냈습니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난 뒤 문무대왕(文武大王)이 왕의 무덤 아래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불경에서는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신하들은 선덕여왕의 신령스러움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선덕여왕은 즉위직후 나라 안의 '환과고독'(홀아비, 과부, 고아, 무의탁 노인) 등 혼자 살아가기 곤란한 자들을 위문하고 구제한 일이 있으며 황사 9층 목탑에서 알 수 있듯이 불교문화의 융성에 공을 들였습니다. 그리고 자장율사를 후원하여 당나라로 유학 보내는 등 불교 후원하였습니다. 김유신과 김춘추는 선덕여왕의 측근으로 나중에는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었으며 비담의 난을 성공적으로 진압함으로서 중앙집권화에 방해요소가 되던 대귀족 세력을 일소함으로 중앙집권화에 기여하였습니다. 그리고 위기를 극복해내기 위해 당나라의 연합을 이끌어낸 것도 이 시기입니다. 하지만 선덕여왕의 시대 전반이 내우외환의 시대로 보고 있는데요. 그의 불교정책에 대해 혼란한 현실을 극복하는 데 실패하고 도피한 것으로 보았으며 무리하게 사찰을 건립하여 국력을 탕진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민중에게 고통이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정치적 실패와 무능에도 불구하고 이후 김춘추를 비롯한 세력들에 의해 현명한 군주로 추앙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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