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오랑과 세오녀설화
2023. 10. 28. 07:32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
728x90
신라의 8대 임금 아달라왕 시기에 동해바닷가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연오가 바다에 나가 해초를 따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떤 바위[혹은 물고기라고도 한다.]가 나타나 연오를 싣고 일본으로 갔다고 합니다. 그를 본 사람들은 그를 특별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연오를 왕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세오는 남편을 찾아 나섰다가 남편이 벗어놓은 신발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바위에 올라갔는데 바위가 남편에게 그랬던 것처럼 세오를 태우고 남편이 있는 나라로 태워 보냈습니다. 부부는 다시 만나게 되었지만 신라는 해와 달이 빛을 잃는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 내려와 있었는데, 지금 일본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괴이한 변고가 생긴 것입니다.’
이에 왕은 사신을 보내어 그들을 귀환시키려 했지만 연오는 하늘의 뜻으로 이곳에 왔다고 하며 왕비가 짠 고운 비단을 내주어 사신을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말대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자 해와 달이 예전처럼 빛이 났다고 하니 그 비단을 임금의 창고에 보관하고 국보로 삼았으며 그 창고의 이름을 귀비고(貴妃庫)라고 하였습니다.
동해면사무소 뒤에는 일월사당이 있어 이곳에서는 해마다 연오랑세오녀를 기리는 제를 올리고 있습니다. 일월지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못이라 해 '천제지'라고 하기도 했고 해와 달의 빛이 다시 돌아왔다고 '광복지'라 부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럼 이러한 설화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한 학자는 설화의 주인공인 연오랑세오녀는 근기국(斤烏支, 勤耆國)의 제사장 또는 왕이었다는 가정아래 이들 집단이 기원후 2세기경 고대 신라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조상신(시조묘, 신궁)을 중시하는 사로국 세력들로부터 압박을 받게 됐고, 전통적인 천제(天祭)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신라의 복속에 불응하고 도지들(都祈野) 앞바다에서 배를 타고 동해를 건너가, 오늘날 일본 시마네현 이즈모 지역을 개척한 역사적 사실을 은유한 설화로 보았습니다. 또한 다른 학자는 ‘연오랑세오녀가 건넌 동아시아 지중해를 중심으로 보면 한국의 동해안과 일본 혼슈 북부지역은 사람들의 이동·물류·정보의 최전선’으로 보고는 ‘고대로부터 수많은 교류를 해 온 바닷길을 재확인해 다시 바다를 향해 길을 열어가는 것이 장기적으로 발전을 가져오는 것임에 틀림없다’는 의견을 말했습니다. 여러 의견이 나오긴 하지만 연오랑과 세오녀가 실존인물이라는 점에서는 공감하고 있습니다.
해의 상징은 삼족오(三足烏)입니다. 농경시대에 해와 달은 곧 하늘입니다. 해와 달을 연결시켜주는 사제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해속에 사는 삼족오입니다. 오(烏)는 일(日)과 같습니다. 따라서 연오(延烏)은 곧 연일(延日)입니다. 연오(延烏)의 주인이 연오랑(延烏郞)입니다. 연오랑(延烏郞)은 영일 땅의 주인·제사장·근기국의 왕입니다. 즉 제사장이 살던 곳입니다.
『삼국유사』에 “세오녀의 비단으로 제사지낸 곳을 도기야(都祈野) 또는 영일(迎日)이라 하였습니다. 도기야(都祈野)는 도지들 곧 영일(迎日)입니다. 태양과 관련된 마을 이름이 지답(只沓)·영일(迎日)·도기야(都祈野)·희날재(白日峴)·누리(累乙伊)·광명(光明)·옥명(玉明)·등명(燈明)·토지하(吐只河)·일광(日光)·일월(日月) 등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입니다. 영일지역이 공간적 무대가 된 이유는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영일지역은 고대 근기국의 영역으로 영일만 해상세력, 신흥국가로 신라 건국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근기국의 왕 연오랑은 일본으로 건너가 왕이 되었습니다. 일본으로 이주한 이유는 근기국은 예맥족의 후손으로 근기국은 태양을 숭배했기 때문입니다. 해와 달이 없어졌다는 의미는 태양숭배의 제의와 관련된 기록, 철기, 직조기술 등 핵심기술이 신라 땅에서 사라졌다는 의미입니다. 세오녀가 길쌈한 베를 보내었다는 것과 이후에 길쌈의 신이 된다는 것에서 일본에 길쌈기술이 전해진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연오랑은 이에 대응하여 제련기술이 전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연오랑과 세오녀가 지방 호족일 가능성이 높고, 직모기술 등 신라 선진기술을 일본에 전하고 일본에 정착한 뒤 신라와 대응한 인물이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그런데 연오랑과 세오녀는 어부부부인데요. 그런데 일본에서 왕과 왕비가 되었다고 하니 이는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 둘이 원래 한반도에서 귀족 혹은 방계 왕족과 같이 비교적 지체가 높은 사람들이었고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의 일본 중앙 귀족 혹은 지역 지배 계층으로 편입된 신분 높은 사람들일 것이라는 추측이 지배적입니다.
일본의 오키섬은 포항에서 직선으로 동해를 건너면 곧바로 닿는 땅입니다. 이곳에는 한글이 적혀있는 쓰레기들이 종종 발견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보다 앞선 시기에는 종종 조선인들이 표류하여 이곳에 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오키섬에는 오키섬의 조상에 대한 기록이 전해져 오는데 그것은 목엽인 부부라는 것입니다, 목엽인은 하의는 짐승 옷을 입고, 상의는 나무나 버드나무 껍질로 엮은 것을 입고 다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리고 이 목엽인의 출신에 대해서도 기록해 놓았는데 바로 서방천리 가라사로국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곳을 신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키섬에서 전해져오는 목엽인부부가 연오랑과 세오녀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특히 목엽인 부부의 복장인 차라리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라기보다는 그보다 앞선 시기의 사람들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할 것입니다.
한편 연오랑과 세오녀 이야기는 일본의 이즈모 건국신화의 주인공 카무스사노오노 미코토와 연관짓기도 합니다. 즉 카무스사노오노 미코토는 신라에서 건너온 사람들이고 이들이 거주민들고 힘을 합쳐 이즈모 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입니다.
‘카무스사노오노 미코토는 아들을 데리고 신라국 소시모리에 살다가 배를 타고 동쪽으로 가 이즈모국에 닿았다.’ 『일본서기』
바다를 건너와 이즈모에 도착한 카무스사노오노 미코토는 울고 있는 노부부를 만납니다. 그리고 사연을 들었는데 그것은 머리 여덟 개 달린 뱀에게 딸들을 잡아먹히고 단 한 명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이에 카무스사노오노 미코토는 그 뱀을 물리친 후 노부부의 딸과 결혼하여 뒤 이즈모에 왕국을 건설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본 신화에는 카무스사노오노 미코토와 다른 조상신들이 맨 처음 살았던 하늘 나라의 이름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고천원입니다. 고천원의 의미와 위치는 일본학계에서도 주요 관심사안인데 일본 규슈, 중국 남부설과 함께 한반도 남부설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카무스사노오노 미코토가 처음 내려온 장소가 소시모리이고 이 말은 우리나라 말로 소머리산, 즉 우두산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우두산이 있는 춘천, 우두산과 가까운 고령, 합천 등이 고천원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그럼 일본 신화 속에서 신들의 고향은 과연 한반도 남부일까요. 1984년 시마네 현에서 발굴이 이루어졌는데 이곳에서 온전한 형태의 청동검이 350여점이나 출토되었고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발견이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때까지 발견된 일본의 청동검이 300여점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는 고대 이즈모 지역에 강력한 세력이 존재했음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일본서기』에서는 이즈모에 도착한 카무스사노오노 미코토가 한국에서 가져온 칼을 사용하여 뱀을 물리치는데 그 칼의 이름이 바가라사히노쓰루기로 ‘한국에서 만들어진 칼’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한국에서 제련된 칼을 가져온 카무스사노오노 미코토가 사철 집단인 기존의 지배자를 물리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연오랑 세오녀가 스사노오의 모티브라는 주장은 어디까지나 한국 내 일부의 주장일 뿐, 정황만으로 신화의 원류를 추적하는 것에 대해서 대체로 부정적인 입장을 나오고 있습니다.
728x90
'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 > 신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라는 평양을 차지했을까. (0) | 2024.05.10 |
---|---|
신라를 왜 낙랑이라 했을까. (2) | 2023.10.20 |
통일전쟁 시기 대당외교관 김인문 (1) | 2023.10.19 |
나당전쟁과 신라-왜의 관계 (1) | 2023.10.18 |
골품제 최고등급 성골은 무엇인가 (1) | 2023.10.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