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평양을 차지했을까.
2024. 5. 10. 07:31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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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0년에서 676년까지 이 땅에서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바로나당 전쟁입니다. 나당전쟁은 한국사에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학자들은 한민족 공동체가 만들어진다고 보고 있으며 김, 이, 박, 최 등 성씨 이들 모두는 신라시대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라고 합니다.
하지만 신라는 5세기만 하더라고 경북 지역의 약소국에 불과했습니다. 진흥왕을 중심으로 6세기 팽창하기 시작했고 한강 유역을 장악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곧 위기에 봉착합니다. 600년대 초반부터 백제는 줄기차게 신라를 공격해 대야성을 함락하고 전선을 지리산에서 낙동강 동쪽으로 이동시켰습니다. 고구려 역시 북쪽에서 밀고 내려왔습니다. 급기야 백제-고구려 연합군의 당항 공격으로 신라는 국가의 존망마저 위협받았습니다. 631년 칠숙과 석품이 반란을 일으켰고 647년에는 최고 귀족인 비담과 염종의 반란으로 열흘 동안 수도 경주에서 내전이 일어날 정도이니 안으로도 신라는 불안했습니다.
이러한 때에 신라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외세의 도움을 받고자 했고 김춘추가 나섰습니다.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했다가 억류되어 겨우 풀려나온 김춘추는 647년 일본, 648년 당나라를 연달아 방문하였고 당태종에게 ‘백제, 고구려 양국을 평정하면 평양 이남과 백제 토지는 다 그대 신라에 주어서 길이 편안하게 하려 한다’는 약속을 받아냅니다. 당이 신라를 돕는 건 단순히 백제를 벌하기 위함이 아니라 수당을 괴롭힌 고구려를 멸하기 위해 (오히려) 신라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670년 3월 오골성 전투를 시작으로 나당전쟁이 발발했습니다. 고구려 부흥운동을 벌이는 고연무의 1만 군대가 북쪽으로 진격하고 설오유가 이끄는 신라군 1만 명도 전장에서 합류합니다. 다만 신라군 상당수 역시 668년 고구려에서 포로로 데려온 7000명으로 이뤄져 있었습니다. 오골성을 공격한 것은 대부분 고구려인이었는데 이것으로 신라는 당나라로부터 비난을 피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은 670년 4월 고간-이근행을 중심으로 한 행군(기동부대)을 편성해 671년 7월 안시성, 9월 평양에 도착합니다. 신라는 당군이 내려오는 동안 백제 전역을 정복하는 전격전을 펼친 후 671년 6월 신라의 행정기구인 소부리주를 설치하였고 신라군은 671년 10월 당의 조운선 70여척을 공격하는 등 시간을 끌며 버팁니다.
신라는 672년 8월 석문전투에서 7명의 장수를 잃는 등 대참패하였으나 675년 매소성 전투에서 신라군이 대승하며 분위기가 바꾸었습니다. 결국 당은 676년 2월 전선과 너무 가까웠던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후퇴시킵니다. 나라는 676년 3월 신라군과 대치하던 병력 중 일부를 빼내 토번(티베트) 정벌군을 편성합니다. 당이 신라에 한눈을 판 사이 토번이 세력을 급속도로 키웠기 때문입니다. 신라는 676년 11월 기벌포 전투에서 기세가 꺾인 당군을 이기고 대당전쟁을 승리로 이끕니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7세기 중엽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고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나당전쟁을 통해 당세력을 몰아내어 삼국통일을 완성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외세의 힘을 빌렸다는 부정적 평가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논쟁은 오래도록 계속되었습니다. 1980년대 들어 신라가 당나라군과 연합한 건 백제를 무너뜨리기 위해서였을 뿐 애초에 고구려는 신라의 정벌 및 통합 대상이 아니었다는 주장된 것입니다.
한편 신라가 삼국통일전쟁을 벌였던 7세기 이전에는 일통삼한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일통삼한 의식 7세기 성립설’의 중요 근거 중 하나가 충북 ‘청주 운천동 사적비’입니다. 1982년 공동우물터에서 발굴된 이 사적비에는 ‘合三韓(합삼한·삼한을 합쳤다)’이라는 문구와 686년을 뜻하는 당나라 연호 ‘수공 2년(壽拱二年)’이 새겨져 있습니다. 운천동 사적비는 '합삼한이광지'(合三韓而廣地)와 '수공이년병술'(壽拱二年丙戌)이라는 구절을 근거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인 686년 수도 경주와 먼 청주 지역에도 삼한일통(三韓一統·신라, 고구려, 백제는 하나) 의식이 퍼졌음을 알려주는 사료로 활용되었습니다. '수공'은 당나라 측천무후 연호인 수공(垂拱)과 발음이 같고, 이 연호에 따르면 수공 2년은 686년입니다. 하지만 비석에 남은 문자 가운데 '천인아간'(天仁阿干)과 '사해'(四海)라는 표현이 있는데 천인아간은 신라 말기에 사용한 표현이고, 사해라는 말은 중국 황제가 천하를 거론할 때 쓰는 용어로 7세기 후반 당에 사대를 취한 신라가 쓸 수 없었다는 점에서 비석 제작 시기는 신라 중기(7세기 말)가 아닌 이보다 200여년 늦은 나말여초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신라 말이 되면서 옛 백제의 도읍이었던 웅천주에서 벌어진 반란은 백제의 복구를 뜻하는 위협으로, 신라가 내부 분열을 막을 이념적 근거로 삼국통일 관념을 만들어냈으니 그것이 바로 일통삼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실제 정치이념으로서 삼국통일을 완성한 건 태조 왕건의 고려라고 하는 학자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운천동 사적비 서체가 남북조(420∼589) 해서(楷書·정자체)라는 점에서 나말여초 유물이 될 수 없다는 견해가 제시되면서 반박되었습니다.
그럼 당시 신라의 왕실의 힘이 평양까지 그 힘을 뻗쳤는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됩니다. 신문왕 대에 10정을 설치합니다. 신라의 서북 최일선 지방에 설치된 한주의 중심지는 현재의 경기도 광주지역이라고 합니다. 또한 한주 내에 설치된 두 개의 정 중 하나인 남천전은 현재의 이천 지역에, 또 하나인 골내근정은 현재의 여주 지역에 각각 위치했습니다. 둘 다 한강 이남 지역에 설치된 것으로 신라가 한강 이북 지역에 대해서는 거의 방치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신라 사신 김법민이 나[당 태종]에게 말하기를, ’고구려와 백제는 입술과 이 모양으로 서로 결탁하고 있으면서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번갈아 침략을 하매 우리의 큰 성과 중요한 진들을 모두 백제에게 빼앗겨 명령하여 빼앗아간 성들을 돌려주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백제본기」
이후 백제 의자왕 15년 (655년)에 고구려, 말갈과 함께 신라의 30여 성을 점령했습니다. 신라를 이를 당나라에 알려 군사를 보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즉, 신라는 백제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고구려에 도움을 청했다가 거절당하자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여 동맹을 맺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라 입장에서는 나당연합의 목적이 삼국통일보다는 백제의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김의충을 당나라에 보내 신년을 축하하였다. (…) 의충이 돌아올 때에 황제는 조칙으로 패강 이남의 땅을 주었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성덕왕 34년(735년)
신라가 당나라로부터 패강 이남의 땅에 대해 그 영유권을 인정받은 것은 당시 국제상황과 관련 있습니다. 바로 발해가 새롭게 신흥강국으로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삼국통일 직후에는 패강 이남 땅에 대해 확실하게 신라땅이라 하지 못하고 성덕왕 34년 (735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국경선을 설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신라는 평양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어떤 문헌에도 신라가 평양을 경영했다는 기록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또한 평양지역에서 통일신라 때의 유적‧유물이 출토되지 않은 것은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평양을 영유하지 않았다는 것은 신라가 과연 고구려에 대한 통합의지가 있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고, 그러한 생각이 있었다 한들, 평양을 제대로 경영하지 않았다는 것은 신라가 그 지역을 다스릴 수 있는 행정적 능력이 없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오히려 평양을 수복한 것은 고구려계 유민들에게 지지를 얻고 국호를 고려라 한 궁예였으며 고구려유민들을 포섭하기 해야 했던 궁예가 평양의 자신의 땅을 만들 이유가 있었던 반면, 신라는 그러한 명분이 부족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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