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스캔들의 주인공 미실은 사실인가

2023. 10. 13. 18:01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

728x90

미실은 한국 역사상 가장 화려한 스캔들을 낳았던 여인이었습니다. 김대문이 ‘백 가지 꽃의 영겁이 뭉쳐 있고 세 가지 아름다움의 정기를 모았다’고 극찬했을 만큼 빼어난 미색의 소유자였던 미실은 3명의 신라왕 (진흥ㆍ진지ㆍ진평)과 태자(동륜),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 4명(사다함ㆍ세종ㆍ설화랑ㆍ미생랑) 등 무려 8명과 애정행각을 벌이며 신라 왕실을 좌지우지했습니다. 그만큼 미모가 뒤따랐는데 미실은 외모뿐 아니라 그의 자태는 가히 따를 자가 없다할 정도로 빼어나 궁중에서나 궁 외에서도 그를 한 번 바라본 남자라면 다시 보고 싶어 할 정도였습니다. 미실은 법흥왕의 후궁이었던 묘도부인의 딸로 묘도부인의 어머니는 옥진궁주로 그녀 또한 법흥왕의 후궁이었습니다. 미실은 그의 외할머니 옥진이 가슴으로 칠색조가 들어오는 꿈을 꾸고 태어났으며 진흥왕의 후궁이 되었습니다. 
고대 신라에서는 왕에게 색을 제공하는 전문여성집단인 대원신통이 있었습니다. 미실은 여기에 속해 있었고 어머니 옥진으로부터 남자를 죽이는 방사술을 배웠다고 합니다. 미실의 첫번째 남자는 6세 풍월주인 세종이었습니다. 어찌나 천부적인 방사술로 세종을 혼내놨는지 화랑세기는 ‘세종이 깊이 빠져들어 기동을 못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왕실 여인들의 세력다툼에 밀린 미실은 궁에서 쫓겨났으나 곧 사다함(5세 풍월주)을 만납니다. 사다함과 사랑을 나누던 중 사다함이 낭도들을 함께 출정할 준비를 합니다. 사다함이 전쟁터로 나간다고 하자 미실은 이를 만류하였으나 사다함을 이를 뿌리쳤습니다. 출정한 사다함은 선봉에서 맹활약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미실에게 사다함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왕비의 아들(이지 왕의 아들은 아닌) 세종이 그녀를 향한 상사병에 걸려 신음하는 상황에서 그의 아내가 되는데, 뒤늦게 돌아온 사다함은 그 광경을 보고 충격으로 죽어버렸다고 합니다. 
당시 미실은 지소태후의 명을 받고 다시 세종의 아내로 돌아간 상태였습니다. 즉 미실은 궁생활을 하며 세종과 연을 맺다가 세종과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태후의 미움을 받아 출궁되었습니다. 세종에게 시집가기 전에는 미실은 이미 사다함과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하며 미실이 쫓겨나자 다시 사다함이 받아주었으나 다시 궁으로 돌아갑니다. 

미실은 진흥왕의 후궁으로 있으면서 많은 남자들을 홀릴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태자 동륜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륜은 태자라는 신분인 만큼 이미 만호라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만호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낭도들과 어울려 색을 즐겼습니다. 그 중에는 미실도 있었고 그에게 푹 빠졌습니다. 더 의아한 것은 이 둘은 이어준 것은 동륜의 어머니 사도왕비였습니다. 미실은 동륜이 자신에게 빠져드는 것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던 듯싶습니다. 그리하여 유화들 중에 미모가 출중한 이들을 뽑아 동륜과 관계하도록 했습니다. 이에 동륜은 여러 여자와 관계를 갖게 되었는데 그 중에 색공녀인 보명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터졌습니다. 보명을 보러가기 위해 담을 넘다가 개에게 물려 죽은 것입니다. 이에 동륜을 잃게 되자 태자는 금륜에게 돌아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진지왕이 되다보니 실권은 사도태후와 미실에게 있었다고 합니다. 동륜이 사망하자 진흥왕은 미실에게 제동을 걸려 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미실의 힘도 커져 있던 것입니다. 
미실의 힘이 커져 있던 것은 동륜의 모후이자 미실의 이모인 사도왕후의 탓도 있지만 그는 자신의 미모로 여러 남자와 관계를 가졌습니다. 그 중에는 남편 세종이 있는데도 그는 세종의 보좌인 설원랑은 물론 자신의 동생 미생랑과도 정을 통하며 권력의 중심으로 이동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진흥왕은 이러한 사실을 몰랐다고 합니다. 그렇게 미실을 총애한 나머지 원화제도를 29년 만에 부활시키고 미실을 원화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미실은 낭도를 거느리면서 병권을 쥘 수 있었습니다. 사실 태자 동륜도 개에게 물려 죽은 것이 아니라  미실이 동원한 군사에게 희생당한 것이며 이를 개에게 물려죽은 것으로 포장했다고 합니다. 이 일로 미실은 쫓겨났으나 이후에 사도왕후가 진흥왕에게 미실을 용서하기를 청했고, 미실 또한 눈물로 용서를 구하니 진흥왕이 이를 받아들이고 미실을 다시 궁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이후 미실이 옥종공을 출산할 때가 되자 진흥왕은 그를 마복자로 삼습니다. 
그러면서 미실은 거칠부와 손을 써서 금륜을 왕위에 오르게 합니다. 하지만 왕후의 자리는 지도부인에게 돌아가고 거칠부의 권한이 강화되면서 미실은 자신의 힘이 약해짐을 느낍니다. 이에 미실은 외삼촌이자 태후의 오빠인 노리부와 논의해 진지왕을 폐위했으며 동륜의 아들 백정과 정을 통하면서 왕후의 자리를 노렸고 동륜의 아들 백정을 왕에 추대해 제26대 진평왕이 되었습니다. 노리부는 스스로 상대등의 지위에 오르며 권력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한편 진평왕이 되는 과정에서는 사도태후가 관여했다고 합니다. 사도태후는 진흥왕의 아내이지 진지왕의 어머니라고 합니다. 사도태후는 자신의 말을 들을 것을 조건으로 내걸며 진지왕을 내세웠지만 실상과 달리 말을 듣지 않자 사도태후는 자신의 오빠 노리부와 미실의 남편 세종으로 하여금 반정을 도모하도록 하여 진지왕을 제거하고 진평왕을 등극시켰다는 것입니다. 미실은 진평왕과의 사이에서도 딸 보화공주를 낳았지만 왕비로 간택되지 않았으며 말년에는 영흥사로 들어가 승복을 입고 세상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미실의 측근이자 내연인 설원랑은 7세 풍월주였는데요. 그는 끝까지 미실을 아꼈다고 합니다.  미실이 병에 걸려 여러 달 동안 일어나지 못하자, 설원랑은 밤낮으로 옆에서 모시며 미실의 병을 대신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설원랑은 미실의 병을 대신하여 죽었으니, 나이 58세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이 미실이 『화랑세기』에 나오고 이 『화랑세기』가 학계에서 위서로 판단된다는 것입니다.  필사본 화랑세기 이외에 삼국사기 등 기존 사서를 비롯해 유물과 금석문 어디에도 미실의 존재가 입증되지 않기 때문이며 그렇기 때문에 미실이란 인물에 대해 전적으로 믿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화랑세기』가 위서라는 여러 이유야 있지만 문제는 미실이라는 인물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없다고 미실이란 인물이 없다고 단정할 수 있느냐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미실이 살던 시대에 여존남비 풍조가 존재했을까 하는 점인데요. 『화랑세기』에서 사용되는 신(臣)이란 글자는 '측근 부하'나 '아랫사람' 정도의 뉘앙스를 갖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이 당시 부부간의 대화에서 남편이 부인 앞에서 자신을 지칭할 때 신(臣)이란 표현을 썼을 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라사회에서는 부부 간의 신분이 다른 경우에는 신분이 높은 쪽이 가정을 주도하고, 신분이 같은 경우에는 남편이 가정을 주도하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세종과 미실의 관계에서는 세종이 주도권을 갖고, 미실과 설원의 관계에서는 미실이 주도권을 잡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진평왕 시기에 미실의 권력이 어느 정도였을까하는 점인데 , 학계의 기존 연구에서는 진평왕 시대를 왕권강화가 추진된 시기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도, 그 시기에 왕권이 강력하지 않았다면 그토록 수많은 전쟁을 치르기도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진평왕의 딸인 덕만공주가 여성의 신분으로 대권을 계승하기도 힘들었다고 보고 있으며 진평왕 대에는 미실이 막강한 힘을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럼 미실이 그렇게 많은 남자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던 것은 무엇일까. 상호 혈연관계에 있는 여러 명의 왕족이 왕비족인 미실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진흥왕 시대에는 대원신통 소속인 사도태후가 진흥왕의 왕비라는 점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왕비족 입장에서도 딸을 낳아야 유리할 것이니 미실도 이러한 환경에서 여러 왕족들과 관계한 것입니다. 즉 신라왕족이 왕이 되기 위해서는 왕비족과 결혼해야 했고 왕비족은 왕비혈통을 유지하기 해야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