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륜성왕을 꿈꾸던 진흥왕

2023. 10. 10. 17:55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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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륜성왕이란 인도신화에서 통치의 수레바퀴를 굴려, 세계를 통일·지배하는 이상적인 제왕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신라 진흥왕도 이러한 전륜성왕의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전륜성왕에는 금륜·은륜·동륜·철륜왕의 네 왕이 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인간의 수명이 2만 세에 도달할 때에, 먼저 철륜왕이 출현하여 일(一)천하의 왕이 되고, 2만 년마다 동륜왕·은륜왕·금륜왕의 차례로 나타나므로, 8만 세에 달할 때에는 금륜왕이 나와 사방 천하를 다스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진흥왕의 태자의 이름이 동륜이었습니다. 동륜은 진흥왕이 신라의 영토를 확장해 포석을 닦아두고 장남으로서 태자에 책봉되어 탄탄대로를 걷는가 싶었지만 572년, 아버지보다 먼저 요절해버렸습니다. 사망 당시 많아봐야 20대 초반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때 진흥왕은 아직 겨우 38세였는데, 말년에 불교에 심취해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은 것이나 진흥왕 본인도 몇년 못 가 요절한 것도 태자를 너무 빨리 보낸 충격을 원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태자 동륜은 사망 당시 이미 세 명의 아들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의 부인은 사부지 갈문왕의 딸이며 진흥왕의 누이이며 자신의 고모인 만호부인과 근친하여 낳은 자식이었습니다. 그랬다면 아마 동륜이 태자가 되었던 시점에는 이미 15세가 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시기는 진흥왕 10년 정도 되었을 것이며 동륜이란 이름도 진흥왕도 직접 지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전륜성왕이라는 것은 진흥왕에게는 큰 동기부여가 되었을 것입니다. 가장 큰 것은 신라의 왕권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신라는 6부를 통합해야 했고 이전 왕부터 있었던 정복사업을 인해 해당 지역에 대해 통치를 정당화하는 이념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왕에게도 필요했고 지역민을 통합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고구려, 백제와 싸워야 했으니 그에 대한 명분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릅니다.   

전륜성왕의 대표적 예시인 아소카 대왕

사실 그러고 보면 진흥왕의 내세운 정복사업으로 전륜성왕을 내세웠다면 이는 잘못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전륜성왕은 정법(正法)으로 국토와 인민을 통치하는 이상적인 통치자입니다. 전륜성왕은 수미사주(須彌四洲)의 세계를 통솔하는 왕이며, 윤보(輪寶)를 굴리면서 사방(四方)을 위엄으로 굴복시킨다고 하였습니다. 이 전륜성왕이 세상에 출현하면 찬란한 금륜(金輪)을 비롯한 칠보(七寶)가 저절로 갖추어져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천하가 정법(正法)으로 통일된다는 것으로 전륜성왕은 무력이 아닌 정법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가장 이상적인 군주상입니다. 하지만 백제와 고구려를 상대하는 데에 있어서 불법을 사용한다는 것은 무리가 따르는 것입니다. 다만 당시에는 불교가 왕권의 강화에 기여하였고 전륜성왕은 그 이상적 군주의 모습으로 제시되었습니다. 따라서 진흥왕이 전륜성왕이 이념을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에 사용하는데는 효과적이지만 삼국전쟁 당시 이것이 전쟁의 명분으로 활용되었는지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데요. 하지만 비슷한 시기의 백제의 성왕 역시 자신을 전륜성왕이라 일컬으며 불교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국론을 모아 사비천도와 한강유역 수복을 성사시켰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았을 때 전륜성왕이라는 것은 본래 가지고 있던 뜻과는 관계없이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고 주변과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무엇이든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진흥왕이 죽기 직전까지 신라에는 공식 후계자 즉 태자가 없었습니다. 『삼국사기』 권4 '진흥왕 본기'에는 진흥왕 27년(566)에 진흥왕의 장남인 동륜이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33년(572)에 동륜이 사망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인데요. 그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새로운 태자가 임명되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이 점을 볼 때, 『삼국사기』 기록상으로는 동륜이 사망한 33년으로부터 진흥왕이 사망한 37년(576)까지의 4년 동안 신라에는 공식 후계자가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진흥왕 입장에서는 태자 동륜이 죽었으므로 다음 후계자를 정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태자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말년의 진흥왕이 사망 이전에 이미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다는 점입니다. “(왕이) 말년에 이르러는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고 스스로 법운이라 자칭하며 마쳤다(죽었다)”라고 「진흥왕 본기」는 말하고 있습니다. 말년의 진흥왕은 남에게 그런 권유를 한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직접 불가에 귀의해 있었던 것이며 그것은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 것입니다. 
‘진지왕(眞智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사륜(舍輪) 혹은 금륜(金輪)이라고도 하였다.이고, 진흥왕(眞興王)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사도부인(思道夫人)이고 왕비는 지도부인(知道夫人)이다. 태자(太子)가 일찍 죽었으므로 진지(眞智)가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진흥왕이 말년에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면 그 누군가가 그 역할을 대행했을 것입니다. 왕이 죽은 비상시국 하에서 이미 죽은 태자를 대신해서 차남이 즉위했다는 이 기록은 진지왕의 왕위계승이 당연했다는 것이며 그가 진흥왕이 살아 있을 적에도 정치적으로 권한을 행사하다가 그 대권을 이어받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574년 진흥왕이 왕위에 오른 지 35년이었습니다. 그는 태자를 잃고 불교 신앙에 더욱 진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심을 모아 대불을 만들고자 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장륙존상이엇습니다. 신라 삼보로 불렸으며 크기는 1장 6척으로 약 5m에 달했습니다. 
‘35년(574) 봄 3월에 황룡사(皇龍寺) 장륙상(丈六像)을 주조하여 완성하였는데, 구리의 무게가 35,007근(斤)이고, 도금한 금의 무게가 10,198푼(分)이었다.’ 『삼국사기』

이 어마어마한 양의 철과 금은 울산 지방의 한 항구인 사포에 큰 배 한척이 도착하여 마련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편지에는 아소카왕이 석가삼존불을 주조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황금과 황철을 배에 실어 인연 있는 국토에 가서 장륙존상이 되기를 기원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삼국유사』에는 아쇼카왕의 기원을 담은 배는 1,300여 년간 16대국(大國)과 5백중국(中國), 7백소국(小國), 1만 부락을 거쳐 신라에 닿았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아소카왕은 인도 대륙을 최초로 통일 왕국으로 건설한 인물이며, 통일을 이룩한 뒤, 그 과정에서 약소국의 백성들에게 말할 수 없는 살육이 자행되었음을 뒤늦게나마 통감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눈을 뜨게 되고 스스로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과오를 저질렀음에 깊이 참회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스스로 불법에 귀의하였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여 조금이라도 자신의 과오를 속죄하기 위하여 통일 전쟁 중에 무기로 사용하였던 모든 철제품을 녹여 농기구로 만들어 많은 백성들이 활용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그의 일대기를 진흥왕이 알았을까. 정복전쟁을 통하여 위대한 군주가 되려 한 점과 후에 불교에 귀의한 것이 진흥왕과 아소카왕이 비슷한 행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아소카왕이 보낸 배가 거의 8세기가 지나서 신라에 닿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럼 그 많은 금과 철은 누가 보낸 것일까. 이것에 대해서 출처는 중국의 남조 국가들을 거론할 수 있는데 당시 신라는 이들과 교류했기 때문입니다. 그 중 진은 신라에 불경을 전해주고 신라로부터 승려를 받아들여 유학을 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따라서 남조의 진이 금을 보내온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중국 남부에는 아육왕의 불상이라는 인도의 불상양식이 크게 유행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아육왕에 대한 이야기도 딸려온 것입니다. 또한 아소카왕의 배가 정박한 사포항구에는 동축사라는 절이 세워졌는데 이는 ‘동쪽 천축국의 절’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아육왕이 있던 나라이자 불교의 발상지가 서천축이라면 아소카왕의 배가 닿은 신라는 동천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삼국유사』에서는 장륙존상이 만들어진 다음 해에 이 불상이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데 그 이듬해에 진흥왕이 죽으니 진흥왕과 장륙존상을 일체화시켰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전륜성왕을 꿈꾸던 진흥왕은 576년에 승하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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