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왕은 어떻게 왕이 되었나

2023. 10. 7. 17:50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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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5년(법흥왕 12)에 입종갈문왕은 지소부인(천전리서석에는 只須尸兮妃)과 혼인하였으니 이 지소이 낳은 아들이 삼맥종입니다. 입종갈문왕은 울진봉평비에는 사부지 갈문왕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는 법흥왕의 동생으로 그의 부인 지소부인은 친조카딸이었습니다. 사부지(입종)갈문왕과 어사추어랑왕이 세상을 떠난 뒤 이들을 그리워하며 기리는 마음으로 찾아온 지몰시혜비(지소부인, 只沒尸兮妃), 부걸지비(보도부인), 심맥부지(삼맥종) 일행이 남긴 명문이 천전리 계곡에 있습니다. 지몰시혜비는 사부지갈문왕의 왕비인 지소부인이고, 부걸지비는 법흥왕의 왕비이자 지몰시혜비의 어머니인 보도부인입니다. 왕자 심맥부지(삼맥종)은 사부지갈문왕과 지몰시혜비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 이듬해(540년) 7세의 나이에 즉위한 진흥왕입니다. 보도부인이 그의 딸인 지소부인과 지소부인의 아들인 심맥부지(深麥夫智)와 함께 천전리계곡에 놀러 와서 이전에 온 이들을 추모한 내용을 바위에 새기고 심맥부지는 후에 진흥왕으로 즉위하는데, 울주천전리각석의 명문으로 보아 보도부인이 진흥왕의 즉위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올 때에 맞이한 것은 지례부였습니다. 지례부는 식사와 간식조리를 관리하는 아혜모호부인에게 철저한 식사준비를 당부했습니다. 아혜모호부인은 국보 제147호인 울주천전리각석(蔚州川前里刻石)의 원명(原銘)에 나오는 인명으로  525년과 539년 사훼부의 갈문왕이 누이와 어사추안랑과 셋이서 서석곡에 놀러 갔을 때 영지지 일길간지의 아내 거지시해부인과 작식인으로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남편은 진육지로 법흥왕 11년에 세운 봉평비에 나오는 화백회의의 구성원이었습니다. 그는 봉평비가 세워지고 나서 천전리 서석 원명이 새겨진 525년에 사간지가 되었고 539년에는 이미 파진찬이 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아혜모호부인의 남편은 진골이라고 할 수 있으며 아혜모호부인 또한 진골출신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럼 왜 법흥왕비는 딸 지소부인과 외손자 삼맥종을 데리고 서석곡에 행차했을까. 당시 신라의 상황은 좋지 않았습니다. 3년 전 법흥왕비의 시동생이자 사위인 입종갈문왕이 죽고 법흥왕도 건강이 좋지 않았던 것입니다. 기록에서는 이 행차가 있은 1년 뒤에 법흥왕이 죽게 되니 법흥왕이 건강이 좋지 않을 때에 이 행차가 있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법흥왕비에게는 자식이 있었으나 아들을 낳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는 커다란 콤플렉스였을 것입니다. 또한 법흥왕은 27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적지 않은 후궁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아들도 낳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라에서는 후궁의 아들은 왕위 계승자격이 없었습니다. 법흥왕에게는 적자가 없었으므로 그 뒤는 입종갈문왕이어야 하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입종갈문왕이 사망했고 아들은 다섯 살에 불과한 삼맥종이었습니다. 

사실 신라에서 후궁의 아들이 왕위에 오른 적 없을까 하는 부분에서는 꼭 그렇지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소지왕과 함께 전해지는 것이 벽화처녀설화인데 이 설화를 근거로 지증왕이 후궁과의 관계에서 아들을 두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벽화의 아들은 왕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왕위에 오른 이는 지증왕이었으니  소지왕과 재종제(육촌아우) 관계였습니다. 이러한 기록을 볼 때 벽화처녀의 아들이 왕이 되지 못했던 이유는 소지왕과 사통으로 낳은 자식으로 왕의 아들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왕권국가에서 왕이 되는 것은 원리원칙대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소지왕은 자비왕의 맏아들로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제1에는 자비왕의 제3자라고 되어 있지만, 본서에 따라 자비왕의 장자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만약 『삼국유사』의 기록을 따른다면 소지왕은 자비왕의 셋째 아들이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장자와 둘째 아들이 먼저 사망하고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습니다. 소지왕이 461년에 출생했고 479년에 재위했다면 그의 두 형은 사망했더라도 결혼을 해서 아들을 남겼을 수도 있고 혹은 두 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지가 왕이 되었을 수 있습니다. 물론 두 형이 있는 가운데 소지가 왕이 될 확률은 극히 낮습니다. 그럼 이래저래 따진다면 지증왕은 소지왕의 부계쪽 친척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추정일 뿐이고 과연 소지왕이 죽고 나서 왕위를 이을만한 가장 가까운 인물이 지증왕이었을까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지증왕은 고령의 나이에 올랐으니 거기에는 왕실의 이익과 관련 있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 나이가 있더라도 문제가 될 것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는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법흥왕이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외손인 삼맥종의 나이가 불과 여섯 살이었습니다. 아마 이 어린 아이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한다면 분명 이를 신라귀족들이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법흥왕이 후계자로 삼맥종을 지목하면 일은 간단히 끝낼 문제일지 모릅니다. 문제는 신라는 왕을 결정할 적에 공식적인 결정권이 화백회의가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사실 이러한 것은 백성들의 우려를 사기에도 충분했습니다. 왜냐하면 왕위는 정치뿐만 아니라 제사도 주관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러한 임무를 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가에 대해 물음표를 달았습니다. 
또한 다른 후보자도 있었습니다. 그는 김아진종으로 습보 갈문왕의 차남이자 지증왕의 아우입니다. 어쩌면 그도 내심 다음 왕에 대해 욕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흠연이라는 나이가 찬 아들과 마차라는 손자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흠연도 왕위 계승후보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법흥왕비를 더욱 염려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법흥왕비가 향한 곳은 입종갈문왕을 추모한다는 명분으로 서석곡으로 행차합니다. 따라서 당시 이곳에서 화려한 의식이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의식에는 삼맥종이 참여했을 것이고 이 화려한 의식을 많은 백성들이 보았을 것입니다. 바로 그가 다음 왕위 계승자라는 사실을 알리는 자리인 것입니다. 화려하게 자신들의 존재를 부각시키려 한 반면에 진종은 다른생각을 가졌을 것입니다. 이러한 의식을 보고 조정의 다른 대신들은 복종하게 되고 이는 화백회의에서 있을 신하들에게 적극적으로 삼맥종을 어필하는 자리이기도 한 것입니다. 

진흥왕은 540년에 왕위에 올라 36년간 재위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어린 나이에 올랐으니 누군가가 섭정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흥왕이 7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을 때 섭정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다르게 나오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지소태후라고 집어서 말한 게 아니라 그저 왕태후가 섭정했다고만 되어 있어서 이 태후가 전 왕비인 보도부인인지 어머니 지소부인인지 불확실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에서는 섭정하는 태후를 가리켜 법흥왕의 딸이자 입종 갈문왕의 비(妃)라고 하여 명확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지소태후가 섭정을 했다면 부여태후를 제외하면 한국사에서 최초로 나타나는 여성의 섭정 기록인데, 단순히 진흥왕의 어머니일뿐 아니라 법흥왕의 딸이기도 하다는 점이 그녀가 직접적으로 정사에 참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진흥왕의 행적 중 초기 몇 년에 관한 것은 섭정을 진행한 지소부인 혹은 보도부인에 의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진흥왕이 즉위한 직후 섭정을 시작한 태후는 대사령을 내려 민심을 안정시켰고, 문•무관의 관작을 한 등급씩 올려주었습니다. 또한 541년 태후는 법흥왕 후기부터 공석이었던 병부령(국방부 장관)에 명장 이사부를 임명하여 국방 안정화를 시도하였으며 544년 권력이 이사부 1인에게 지나치게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병부령을 2인으로 늘렸는데 이후 신라는 모든 관부의 장관을 2인으로 하는 관습이 정착되었으며, 법흥왕의 명으로 건설이 시작된 흥륜사가 완공되었습니다. 한편 545년에 『국사』를 편찬한 것은 『삼국사기』에서 태후를 언급하지 않고, 진흥왕이 직접 내린 명령으로 확실히 기록되어 있으며 이 때 진흥왕의 친정이 시작되었다는 의견도 있으나 진흥왕이 18세가 되던 551년 '나라를 연다'는 의미인 '개국'(開國)으로 연호를 바꾸게 되므로 551년 정월부터 진흥왕이 친정을 시작했다고 일반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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