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지왕과 사금갑 설화 그리고 벽화처녀설화

2023. 10. 2. 17:40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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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제 21대 비처왕시기였습니다. 비처왕은 소지마립간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천천정에 행차하게 되었는데 까마귀와 쥐가 와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살피시오.”라고 사람의 말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왕은 사람으로 하여금 왕을 쫓게 하였는데요. 기사는 남쪽으로 가서 피촌에 이르러 두 돼지가 싸우는 것을 한참 보다가 까마귀가 간곳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때 한 노인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글을 올렸는데 겉봉에는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라고 적혀있었습니다. 기사는 돌아와 이것을 왕에게 보였습니다. 이에 왕은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 한 사람이 죽는 것이 그나마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일관이 말했습니다. ‘두 사람은 서민을 가리키는 것이고 한 사람은 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라 고한 것입니다. 왕이 마침내 그것을 열어 보니, 안에 「사금갑(射琴匣, 거문고 갑을 쏘아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왕이 궁에 들어가 거문고 갑을 쏘자, 거문고 갑 안에서 숨어있던 중과 궁주(宮主)가 튀어나왔습니다. 두 사람이 간통하고 있던 것입니다. 두 사람은 사형 당했습니다. 이후 신라에서는 해마다 정월 상해일(上亥日) · 상자일(上子日) · 상오일(上午日)에는 모든 일을 조심하고 감히 움직이지 않으며 특히 15일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약밥)을 지어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것을 신라에서는 ‘모든 일을 특별히 조심하고 꺼린다’는 뜻의 달도(怛忉)라 불렀으며, 오늘날 한국의 정월 대보름 절식(節食)의 하나로서 약밥을 먹는 풍속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또한 노인이 나타나 편지를 전해주었다는 연못을 서출지(書出池)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설화의 신빙성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는데요. 그것은 불교가 공인되기 이전시기라고 하는 이 설화에 승려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구려로부터 전래된 불교는 이미 이 시기에 왕실 내에서 믿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설화 속에서 승려가 등장한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어보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왕의 비빈들이 왕 이외의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진 것으로 왕실 기강이 그만큼 해이해진 것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에 대해 전통적인 토속 신앙과 불교 사이의 갈등으로 보기도 하며 불교 수용을 두고 신라 왕실과 귀족이 대립하고 있던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한편 소지왕을 반대하는 세력을 표현한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데요. 소지왕 9년(487년)에는 신궁을 지었는데 이와 관련한 것으로도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럼 설화 속에서 등장하는 천천이란 무엇일까. 천천이란 신궁은 시조 혁거세왕이 하늘에서 내려와 태어났다는 나정(蘿井)과 관련이 있는 건물이며, 시조의 탄생이 하늘과 관련이 있음을 강조하는 의미를 담은 이름으로서 나정이 「천천」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소지왕은 신궁을 설치하고 난 뒤 이곳으로 제사를 드리기 위해 거동하였으며 제사에서 받은 신탁으로 궁내의 중요한 문제를 처리하였다고 합니다. 신궁이 지어지기 전에는 혁거세왕을 모시는 시조묘가 있었습니다. 이후 사로국은 주변의 세력을 통합하며 커졌습니다. 그러면서 제천행사도 사로국중심으로 진행되었고 그러면서 혁거세왕은 사로국뿐만 아니라 사로국을 포함한 연맹체의 국조로 받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조묘의 제사를 통해 안으로는 단결을 도모하는 한편 시조묘에 대한 제사를 통하여 새로 즉위한 통치자들의 지배가 정당하다는 것을 만방에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는 것인데요. 신궁이 세워지는 과정에는 내물왕 이후 김씨가 왕위를 세습하면서 권력을독점화하는 세태도 한 몫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내물왕대부터 소지왕에 이르기까지 부자에 의한 왕위세습이 이루어지고 갈문왕의 지위 역시 왕의 형제나 가까운 부계 친족이 부자 세습을 하면서 김씨 가문의 권력을 커져갔습니다. 그러면서 김씨 가문은 국조인 박혁거세에 대한 제사도 독점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제사에 대한 것도 생각하면서 신궁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조묘 제사는 왕실뿐만 아니라 여러 세력의 집단의 장들이 참여하였는데 신궁은 오직 김씨 왕실만 참여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에 반대하는 세력들도 있었을 것이고 신궁설치를 놓고 소지왕과 대립한 결과 위와 같은 사금갑설화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편 이러한 의견에 대해 반대의견도 제시되기도 했습니다. 설화에 나오는 노인은 반불교 토착세력으로 보고 있는데요. 그러나 노인에게서 전혀 반임금, 반왕실 그리고 반불적 요소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중과 비빈이 간통한 것과 소지 마립간이 죽을 것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당시 신라의 주적이었던 고구려 장수왕 측의 간첩을 통한 소지 마립간 암살 시도였을 개연성을 보고 있습니다. 당시 고구려 왕 장수왕은 백제에도 승려스파이 도림을 보내 바둑외교를 펼쳐 백제를 큰 위기에 빠뜨렸으니 이 이야기도 그와 비슷한 맥락이라는 것으로 당시 소지왕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10대 후반에 즉위했는데 30대 중반에 이르도록 아들이 없었으며 이는 정치적으로 소지마리간의 입지를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정을 흔들기 위해 고구려가 선혜부인을 통해 접근시켰다는 것입니다. 이 일은 불교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던 신라의 귀족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되었습니다. 소지마립간이 이 일을 겪은 계기로 고구려 승려들은 곤란에 처하게 되었으며. 이후 간첩이 아닌, 포교를 위해 고구려에서 온 승려들이 흥분한 신라 군인들에게 맞아죽는 일이 두 번이나 기록되었습니다. 이후 법흥왕시기가 오기 전까진 신라는 불교를 배척했고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는 과정에서도 고구려의 기여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한편 소지왕은 500년에 날이군으로 행차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파로라는 사람이 있었고 그에게 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벽화로 열여섯 살이었습니다. 그는 신라에서 이름난 미인이었다고 합니다. 그 아비가 그 아이를 비단과 자수로 입혀 수레에 넣고 색깔 있는 명주로 덮어 왕에게 바쳤으니 이를 음식으로 알고 열어본 왕은 여인이 있자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괴이하게 여겨 받지 않았으나 궁으로 돌아오니 그 여인이  생각났습니다. 그리하여 보통 사람의 옷을 입고 그 여인을 찾아가 관계를 맺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여자와 관계를 맺고 고타군을 지나게 되었는데 어느 할미의 집에 묵게 되었습니다. 할미에게 ‘사람들이 왕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으니 이에 할미는 ‘사람들은 왕을 성인으로 생각하지만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왕이 날이군의 여자를 사랑해서 미복으로 왔으니 무릇 용이 고기의 탈을 쓰고 고기잡이에 매어 지내는 격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왕이 부끄러움을 느껴 여자를 데려다가 별실에 두고 아들을 낳기에 이르렀고 왕은 11월에 죽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미 어느 정도 민심을 떠난 소지 마립간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가 보고 있는데요. 변복한 왕 앞에서 거침없이 왕을 비판하는 모습에서 그 노인의 용기가 대담하다고 여길 수도 있으나 후대 역사가들에게 소지 마립간은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도 소지마립간의 재위 마지막연도에 있던 일이라 왕의 권위에 대한 훼손이 더욱 의심 가는 상황입니다.  한편 소지마립간이 죽었을 당시 나이는 30대 후반으로 보고 있습니다. 소지 마립간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즉위했기에 재위기가 이미 20년은 넘어가던 시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 바쳐진 여인 벽화의 출신지는 고구려 고지라고 불리던 영주 – 봉화 지역입니다. 당시는 신라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고구려의 실질적 지배를 50년 이상 씩이나 받아왔던 지역이었기에 중앙 조정으로부터 그 충성심을 의심받았습니다. 따라서 해당지역의 호족들은 신라에 대한 충성심을 표시할 수밖에 없었고 그 방법으로 여인을 바쳤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라의 중앙 귀족들은 충성심이 의심스러운 지역으로부터 여인을 얻었으니 소지마립간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소지마립간이 승하하게 되었다는 추정과 함께 소지마립간이 자식을 낳을 것을 우려하여 미리 지증왕 쪽에서 손을 썼다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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