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3대 왕 유리 이사금

2023. 9. 27. 07:52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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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3대 왕은 유리 이사금입니다.  남해차차웅의 태자이며, 어머니는 운제부인(雲帝夫人)으로 비(妃)의 이름은 알 수 없고, 일지갈문왕(日知葛文王)의 딸 박씨, 허루갈문왕(許婁葛文王)의 딸 또는 사요왕(辭要王)의 딸이라는 세 가지 설이 있으나, 일지갈문왕의 딸일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유리 이사금은 이사금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첫 번째 왕으로 이사금이라는 명칭은 3대 유리 이사금 때부터 16대까지지 사용하였습니다. 이사금은 ‘치리(齒理)’, 즉 ‘이의 자국’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전 임금인 남해 차차웅이 사망할 때에 탈해와 유리 둘 중 나이가 많은 사람이 왕 위를 이으라는 유언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연장자가 왕위를 이으라는 것인데요. 연장자가 지배자로 정하는 것은 상고시대에 흔한 일이었습니다. 상고시대에는 지배자의 덕목으로 종교적인 능력이라든가 지혜, 혹은 싸움이나 사냥을 잘하는 능력을 꼽을 수 있는데요. 연장자에 대해서는 그만큼 경험이 풍부하기 때문에 지혜도 더 많이 가졌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탈해는 왕위를 사양했다고 하는데요. 탈해는 지혜가 있어 떡을 깨물어 유리와 자기의 이의 수를 헤아려 유리의 이의 수가 더 많자 탈해는 자신의 측근들과 함께 유리를 왕으로 받들었다고 합니다. 그 후로 ‘잇자국’이라는 뜻의 ‘이사금’을 왕호로 정하였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등장하는 김대문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사금은 '잇금'의 신라 방언으로 '이질금(尼叱今)'이나 '치질금(齒叱今)'이라고도 불리었다고 하는데요. 8세기 통일신라 사람인 김대문이 굳이 이 용어의 유래를 따로 설명해야 했다는 것은, 초기 신라의 호칭이던 이사금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수백 년 지난 통일신라 시점에선 이미 의미를 불명확하게 여기고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사금은 군주를 뜻하는 순우리말인 중세 국어 어휘 '님금(오늘날의 임금)'의 기원이며,  사금의 '금(今)'은 신라어에서 통치자, 즉 왕을 가리킨 단어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국사학계에서는 오늘날의 임금이란 어원을 이사금에서 찾고 있습니다. 치리(齒理)라는 뜻의 이사금이 니슨금-닛금-니은금으로 순차적 변화를 거치면서 임금으로 고착됐다는 것입니다. 부족사회에서 족장을 추대할 때 이의 수로 용맹을 가리던 풍습이 계승자를 뜻하는 의미로 변천된 것입니다. 그리고 신라의 이사금 시대는 종래의 거서간이나 차차웅 때보다 문물·제도 면에서 훨씬 향상된 통치시기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유리 이사금 9년에는 9년, 6부(六部)의 이름을 고치고 이에 6성(六姓)을 하사하였습니다. 6성은 이(李)·최(崔)·정(鄭) ·손(孫)·배(裵)·설(薛)로서 육부촌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6부의 ‘이름을 바꾸었다’는 것은 혁거세 등장 이전에 경주 지역에 선주해 있던 6촌이 그대로 6부로 이어졌다는 인식이 반영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6촌과 6부는 ‘6’이라는 숫자의 공통성이 있을 뿐 실체와 성격은 다르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인식이 있습니다. 
한편 이 시기에 [유리이사금 9년(32)] 왕이 이미 6부를 정하고 나서 이를 반씩 둘로 나누어 왕의 딸 2명으로 하여금 각각 부(部) 내의 여자들을 거느리고 무리를 나누어 편을 짜서 가을 7월 16일부터 매일 아침 일찍 대부(大部)의 뜰에 모여서 길쌈을 하도록 하여 밤 10시 무렵에 마쳤는데, 8월 15일에 이르러 그 공이 많고 적음을 따져 진 쪽은 술과 음식을 차려 이긴 쪽에게 사례하였습니다.
‘왕은 여섯 부를 정한 후, 이를 두 패로 나누고, 왕녀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부내(部內)의 여자를 거느리어 편을 짜고 패를 나누어 가을 7월 16일부터 날마다 일찍이 큰 부(部)의 마당에 모여 길쌈을 시작하여 을야(乙夜: 밤 10시경)에 끝내게 하고, 8월 15일에 이르러 그 공의 다소를 심사하여 지는 편은 술과 밥[酒食]을 장만하여 이긴 편에게 사례한다. 이어서 가무(歌舞)와 백희(百戱)가 벌어졌으니 이를 가배(嘉俳)라고 한다. 이때 진 편의 한 여자가 일어나 춤추며 탄식하기를 '회소, 회소'(會蘇會蘇)라 하여 그 음조가 슬프고 아름답거늘 후세 사람(後人)이 그 소리로 인하여 노래를 지어 이름을 회소곡(會蘇曲)이라 했다.’ 『삼국사기』
여기에서 노래와 춤과 온갖 놀이(歌舞百戲)가 모두 벌어졌으니, 그것을 일러 가배(嘉俳)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진 쪽에서 한 여자가 일어나 춤추며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회소(會蘇) 회소(會蘇)”라고 하였는데, 그 소리가 슬프고도 아름다워 후대 사람들이 그 소리에서 말미암아 노래를 지으니, 회소곡(會蘇曲)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5년조에서는 도솔가를 짓게 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유리이사금이 백성들을 아끼는 좋은 정치를 하자 백성들의 풍속이 즐겁고 편안해져 도솔가를 짓게 되었습니다. 노례왕의 선정(善政)은 삼국사기에 더욱 자세히 기록되어있습니다. 즉, 유리왕 5년, 하루는 임금이 민정을 살피러 나갔다가 한 할머니가 배가 고파서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곧 할머니를 모시게 하여 옷과 음식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살아갈 능력이 없는 백성은 모두 나라에서 먹여 살리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소문을 듣고 이웃 나라에서 백성들이 몰려왔다고 합니다. 
유리 이사금 9년(32년)에는 정실이나 소청에 의해 임면되던 이제까지의 정부 조직을 과감히 정비해 17등급으로 개편했습니다. 1등급 이벌찬, 2등급 이찬, 3등급 잡찬, 4등급 파진찬, 5등급 대아찬, 6등급 아찬, 7등급 일길찬, 8등급 사찬, 9등급 급벌찬, 10등급 대나마, 11등급 나마, 12등급 대사, 13등급 소사, 14등급 길사, 15등급 대오, 16등급 소오, 17등급 조위 등이다. 각간(角干)이란 관직도 동시 설관됐습니다. 이때 정착된 관등 제도는 신라 말기까지 지속되며 관리 등용의 전거가 됐습니다. 이 등급은 신분에 따라 상승할 수 있는 제한이 있어 유능한 관리들에겐 족쇄로도 작용했지만 신라 사회를 지탱하는 버팀목 역할을 했습니다. 23대 법흥왕(재위 514∼540) 때 이르러 관등 제도는 성골·진골의 골품 제도로 추가 개편되었습니다.

유리이사금에게는 두 명의 친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들 일성과 파사였습니다. 그러나 매제 탈해의 재능이 뛰어나니 탈해에게 왕위를 맡긴다는 유언을 남기고 승하했습니다. 
‘"탈해는 신분이 나라의 친척이고 지위는 날 보좌한 신하이니 여러 번 공이 있다. 짐(朕)의 두 아들은 그 재능이 따라오지 못하니 내가 죽은 뒤, 대위(大位)를 잇게 하라. 내 유훈을 잊지 말라." 
그 중 첫째인 일성이 제 7대 일성 이사금이 되었고 둘째 아들인 파사가 5대 파사 이사금이 되었습니다. 유리 이사금에게는 두 명의 딸이 더 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위에서 말한 설명한 바 있는 ‘가배(嘉排)’라는 것으로 때문인데요. 여기서 두 왕녀가 나오고 유리 이사금이 딸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배에서 민족의 명절, 한가위가 유래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한가위는 원래 '한가운뎃날'이라는 뜻이었다. 보름날은 한 달의 한가운데이고, 팔월의 보름은 '가장 큰 가윗날'이라는 뜻으로 오늘의 '한가위'가 된 것입니다.  
유리이사금이 일지갈문왕 딸과 결혼했습니다. 이것은 왕실은 물론 신라 사회 전반에 근친혼의 효시가 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일지갈문왕은 박혁거세 아들로 남해차차웅과 형제간이니 사촌 여동생을 왕비로 맞은 것입니다. 여기서 갈문왕은 왕위에 못 오른 금상의 생부 또는 왕의 장인이나 유력 왕족에게 추증하던 시호입니다. 고구려의 고추가(古鄒加)나 조선시대 대원군에 해당하는 제도로 갈문왕 후손 중 임금이 여럿 배출되기도 했습니다. 본래는 이사금 시대에는 “갈문”이라고 표현하다가 중국식의 “왕”이라는 호칭이 수용되면서 마립간 시대에는 “갈문왕”이라고 부르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이사금 14년(37년)조에는 "고구려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키자, 그 나라 사람 5000명이 내항하여 6부에 나누어 거주하게 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는데 다만  시기에 6부가 모두 갖추어져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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