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삼한은 철기생산과 유통의 중심

2022. 11. 24. 07:54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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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칠금동 고대 제련소 16호

우리나라에 언제 철기시대가 시작되었는지는 아직 논쟁거리이지만 대체적으로 두 가지 시기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는 중국 전국시대(기원전 475~221년)에 ‘명도전(明刀錢)’과 함께 유민들이 한반도로 유입되면서 철기문화가 들어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원전 108년 한무제가 고조선을 침략할 때 한나라의 금속문화가 도입되었다는 것입니다. 이후 철기 사용은 보편화되고 무기와 농기구가 철기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철로 만든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높은 온도로 광석을 녹여서 금속을 만드는 가마인 제련로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삼한시대에 이미 제련로를 만들어 철을 만들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비교적 이른 시기의 철기가 발견된 유적지로는 다호리 무덤이 있으며 이 무덤의 축조 시기는 기원전 1세기~ 기원전 2세기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청동검과 토기 그리고 칼이나 도끼같은 철기유물이 나온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발굴된 유물들은 북한 지역에서 보이는 것도 있었지만 삼각형 철촉이나 따비처럼 다른 지역에서 확인할 수 없는 유물이 발견되어 다호리 사람들은 스스로 모양을 생각하고 철기제품을 제작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옛 가야땅 곳곳에서 발굴된 덩이쇠, 망치, 도끼 등 각종 철기

이런한 철기유물은 예부터 그 가치가 화폐를 대신하는 수단이었습니다. 다호리 무덤에서는 납작한 쇠도끼모양이라고 해서 판상철부라는 것이 발견되었는데 이름 그대로 그저 편평한 장방형의 쇳덩이로 한쪽에는 날이 세워져 있으며 일반 도끼보다는 그 두께가 얇았습니다. 그리고 뭉툭하고 사용한 흔적이 없었는데 이러한 판상철부는 자루에 끼워 도끼로 사용하거나 끈으로 묶어 자귀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유물이 다른 무덤에서도 발견됨에 따라 도끼 뿐 아니라 교환을 매개로 하는 재화였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김해시 양동리 유적에서 발견된 판상철부는 납작도끼와는 달리 길쭉하여 곧바로 녹여 다양한 철기를 제작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2019년에는 충주 칠금동 제철유적지에서는 새로운 제철유적지가 발견되었는데 충주지역은 삼국시대 뿐만 아니라 고려와 조선시대까지도 국내 제철 생산지 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특히 충주 칠금동 제철유적지에서는 총 25기의 제철유적지를 발견하여 단위면적당 국내 최대 철 생산유적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4세기 무렵 백제의 핵심 제철단지였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뿐만이 아니라 한반도 남부지방에서 제철기술이 일찍 발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신라도 역시 직접 철광을 개발하고 철을 직접 생산했습니다. 철의 안정적인 확보는 나라의 운명을 좌우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라는 이러한 것들은 국가주도로 관리했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일부는 주변 지역에 수출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신라는 철의 공급을 통해 지방지역을 통제하기도 했습니다. 신라는 언제부터 철제품을 스스로 만들었을까. 1989년 8월 경주 황성동 주공 아파트 신축 부지에서 흙으로 만든 거푸집 조각을 대량 발견했는데 이것이 현대가 발견한 신라 제철 유적의 위치였습니다. 그리고 이곳의 유물을 채취하여 시료검사했는데 자철광이 원료이고 철에 비소가 다량 함유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학계는 황성동 주공 아파트 신축 부지의 신라 제철 유적지에 공급된 철광석 산지로 울산달철광산을 꼽았습니다. 비소의 함량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형산상변에서는 제철에 종사한 장인들의 마을과 무덤이 발굴되었습니다. 아마 이곳은 신라의 철제품을 담당하는 산업단지였을 것이며 철기가 중요시되던 고대국가시기에 이곳이 신라 삼국통일의 산업적인 원동력이 된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로도 옛 신라 땅으로 추정되는 지역에서 제철유적지가 확인되었으며 이러한 곳에서 제철공정과 관련된 모습이 확인되었습니다. 사실 옛 백제 땅 지역에서는 충주와 진천지역에서 대규모 제철단지를 운영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 외에는 이렇다할 유적지를 발견하지 못했는데 신라는 끊임없이 철이 자체생산에 몰입한 것입니다. 

김해시 대성동고분군에서 발굴된 투구, 쇠갑옷, 비늘갑옷

 "나라에 철이 생산되는데 한(漢), 예(濊), 왜(倭)가 모두 와서 가져갔다. 여러 시장에서 모든 매매에 철을 사용했는데 마치 중국의 돈과 같이 사용됐다. 또 이군(낙랑군과 대방군)에도 공급되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진조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상식에서는 삼한 지역 중 가장 철의 생산량이 두드러졌던 지역은 변한 땅으로 이후의 가야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기가야 연맹체가 금관가야가 주도했고 후기가야 연맹체는 대가야가 주도했다고 이해되고 있는데 이러한 것은 광개토대왕의 남벌 계획으로 인해 금관가야가 타격받은 것이 이유이기도 하지만 나머지 가야 중에 대가야가 주도권을 잡은 것은 아마 대가야가 가야 연맹왕국 중 철기문화 수준이 가장 높았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대가야에서는 고령 인근에서 철 생산 유적을 살필 수 있으며 채광, 제련 기술과 함께 이것들에 공급해질 철광산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고대국가사회에서의 철을 잘 다루는 기술은 지금의 컴퓨터, 반도체만큼이나 중요한 기술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신라에서의 예처럼 이러한 철의 생산은 국가에서 통제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철 생산에는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했습니다. 일단 철광석 산지가 있어야 했고 녹이는 데 필요한 목탄이 있어야 했습니다. 고대 한반도의 제철기술은 중국의 기술을 수용하여 철문화를 급속히 발전시켰는데 이러한 처음 단계에 제련로를 1,000℃ 이상 될 때까지 충분히 가열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이 때 연료로 쓰이는 것이 바로 목탄이며 철광석이나 사철, 그리고 연료인 목탄을 반복적으로 집어넣은 다음 송풍관을 통해 강하게 바람을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철광석에서 철을 분리해내는 제련기술이 필요했으며 이를 통해 만들어진 철은 무기나 다른 도구로 활용되기 위해 일정하고 납작한 형태로 만들고 굴비마냥 엮어서 보관했는데 이것을 덩이쇠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덩이쇠’는 화폐로도 활용되었으며 외국으로 수출되기도 했습니다. 이 덩이쇠는 신라나 백제 지역에서 발견되지만 특히 가야지역의 고분에서 많이 출토되었습니다. 이러한 철생산은 비단 무기와 철기제품의 생산에만 그치지 않고 이를 이용하여 국가의 부를 크게 증대시킬 수 잇는데 철기의 사용으로 벼농사를 크게 발달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반도에서 출토된 철갑옷이 대부분 가야땅에서 나왔으며 강력한 군사력의 바탕에는 철기문화가 자리한 셈입니다. 

경주 황성동 제철단지에서 조업하던 장인의 무덤에서 출토된 철제 말재갈과 거푸집

가야는 자신들의 철기문화를 전파하기에 이릅니다. 가야는 일본을 동반자로 인식했고 그 중 이키섬은 한반도에 교역이 활발했던 곳입니다. 그리고 가야가 있던 시절 이키국은 가야와 활발히 교역했고 그 흔적이 지금 유물로 출토되고 있습니다. 특히 이키국의 왕도라고 불리는 하루노츠지유적에서 6km 떨어진 곳에 카라의 카라카미(カラカミ)유적지가 있는데 카라는 가야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곳에서 1~3세기경의 철 생산시설로 추정되는 지상식 제철로가 일본열도 최초로 발견되었으며 이는 가야의 제철기술이 전래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럼 이러한 철들은 고대에 어떤 경로로 유통되었을까. 이키섬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철기유물은 한반도 남부에서 들여온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마 이곳에서 판상철부도 발견되었으니 이 역시 한반도에서 건너온 것이며 이것은 후쿠오카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기원 전후 야요이 시대 중기에는 북부 규슈일대에서 판상철부가 많이 나왔습니다. 이것은 창원 다호리나 늑도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형태입니다. 당시 일본은 철을 뽑아내는 기술이 없었으므로 후쿠오카는 철을 수입하는 무역항구였을 것입니다. 이후 4~5세기에는 규슈 동북부, 야마토정권이 들어서면서 오사카 긴키 지역에서도 덩이쇠가 발견되었는데 모두 한반도에서 제작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삼한을 중심으로 해안선을 따라 낙랑과 대방으로 이어졌고 다른 길로는 쓰시마섬과 이키섬을 지나 일본 본토로 가는 아인언 로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삼한이 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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