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때에는 어떤 모습으로 전쟁했을까.
2022. 7. 27. 21:20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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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먼 옛날 초기 국가시대에는 어떤 식으로 전쟁을 치루었으며 그 모습을 어떠했을까요. 일단 그 시절에도 무기가 있어야 전쟁을 치를 수 있습니다. 당시 강력한 무기는 철제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초기 고대국가시대에서는 부유한 계층에서만 철제 농기구를 보유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무기도 마찬가지였 것입니다. 부여라는 나라를 보면 왕 밑에 권세를 누리는 마가, 우가, 저가 등이 있었고 그 아래로 하호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나면 지배계층이 가들이 전쟁에 참여하면 하호들은 군인들에게 먹을 것을 나르는 역할에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일단 하호들에게는 무기가 없었기 때문이고 국가에서 이들에게 무기를 지급해주는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좋은 밭이 없어 농사를 지어도 식량이 부족하며, 성질이 사납고 약탈과 침략을 좋아한다."-진수의 [삼국지]
"고구려 사람들은 흉폭하고 성질이 급하고 노략질을 좋아하며 그 풍속은 음란하여 형이 죽으면 형수를 취한다." [남사]
당시 고구려를 설명하는 상황을 보면 고구려의 식량 사정은 그다지 좋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고구려의 존립방법은 전쟁을 통해 식량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3세기 무렵에는 고구려에서도 농사 짓지 않고 앉아서 먹는 사람이 1만 명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고구려 내에서 전쟁을 전문적으로 치르는 전사집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무장하고 전쟁을 치르면서 얻은 전리품들을 자신들이 가졌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빈부의 격차가 커졌습니다. 왜냐하면 무기를 갖추지 못하여 전쟁에 참여하지 못한 백성들은 전쟁을 통해 돌아오는 이득을 바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국가가 커지면서 왕의 통치력도 커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전처럼 일부 사람들만 데리고 전쟁하기에는 사이즈가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백성들을 군대에 동원해야 했습니다. 고대 국가의 왕은 백성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그들에게 국방의 의무를 부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전쟁에 동원된 이들은 활을 이용하여 먼 거리에 있는 적에게 쏘기도 하고 근거리에서는 칼과 창으로 적을 상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당시 병사들을 이끌던 무사들은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갑옷을 입었습니다. 가슴을 가리는 갑옷은 '흉갑', 등을 가리는 것을 '배갑'이라 하며, 굽은 형태의 긴 철판을 세로로 연결해 만든 투구는 '종장판주'라 하였고 '목가리개'와 어깨를 보호하는 '견갑', 팔을 보호하는 '비갑'등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입게 되면 그 갑옷을 화살을 뚫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벽화에서도 활과 화살로 사냥을 하지만 전투하는 장면에서는 칼과 창이 등장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보병이었지만 더불어 말을 탄 기병도 활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에도 갑옷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등자가 등장하면서 말과 사람은 하나가 되어 더욱 위력을 발휘하였습니다. 특히 고구려는 동천왕 때인 246년 위나라 장군 관구검(毌丘儉)의 군사와 대적하면서 ‘철기 5000명’을 동원했다고 합니다. 이미 3세기 중반에 이미 말과 기사 모두에게 ‘철제’ 갑옷 입힌 기병부대를 갖추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말에 갑옷을 입혔다고 하여 개마무사라고 하였습니다. 중국에서는 이를 말을 타고 있는 동쪽의 도둑이란 의미의 ‘동방기구(東方騎寇)’라 부르며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갑옷으로 무장을 한 말을 탄 무사들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몽골의 칭키스칸도 말을 적극 활용하였으며 윤관이 만든 별무반에 신기군을 포함하여 기마병을 만든 것은 기마부대가 일반 보병 부대에 비해 전투력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몇 백 년 전까지, 그러니까 화약이 발명되고 나서도 한참 후까지도 그 위력을 발휘하였습니다. 필마단기(匹馬單騎)로 조조군 1만명을 뚫고 유비의 아들 유선을 구해 온 일화를 보면 고구려가 개마무사를 통해 주변에서 강국으로 이름을 떨쳤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승기를 잡은 진영에서는 말의 기동력을 이용해 도주하는 적을 추격해 궤멸시켰을 것입니다.
하지만 갑옷으로 중무장하려면 제철기술과 원료가 필요했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위치상 중국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수도 없이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그럼에도 고구려는 중국왕조의 침략을 견뎌내고 왕조를 유지해냈습니다. 학계에서는 중국의 철기문화가 고조선으로 들어왔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그러면 중국의 기술이 고조선과 이후에 형성된 부여나 고구려보다 선진적인 갑옷기술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고구려는 풍부한 철광 산지와 제철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고구려는 중국과 대등하게 맞설 수 있었고 어느 순간에는 중국의 군사력을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됩니다.
삼국간의 전쟁에는 철과 말로만 승부를 보았던 것은 아닙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창 패권을 다투던 시기에는 활을 사람의 힘으로 당기지 않고 고정 틀에 물리고 화살을 올려 발사장치를 통해 쏘는 기계식 활인 ‘쇠뇌’가 활용되었으며 신라에서 제작된 천보노는 쇠뇌를 개량한 것으로 1천 보나 화살을 날릴 수 있을 만큼 성능이 뛰어나 당의 황제도 탐을 냈다고 합니다. 한편 수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거대한 통나무를 뾰족하게 깎아 철갑을 씌워서 성문을 부수게 고안된 마차인 ‘충차’와 성벽 위에까지 닿는 높은 사다리인 ‘운제’를 운영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높은 성과 같은 높이로 만든 누각인 ‘비루’를 세웠고 성벽 밑을 파서 그 굴을 이용하여 성 안으로 침투하도록 만드는 통로인 ‘지도’를 만들습니다. 고구려는 이러한 수나라를 상대하기 위해 들판에 곡식을 거두어들이고 성에 들어가 ‘청야수성전’을 펼칩니다. 고구려는 이러한 수나라의 침략에 대비해 여러 성을 효율적으로 배치하는가 한편 반달 모양 혹은 네모 모양으로 성문을 감싸 적들이 성문으로 들어올 때 사방에서 공격했으며 성벽 바깥에는 참호나 해자와 같은 긴 도랑을 파놓았습니다. 그리고 성벽 위에 낮은 담을 쌓은 ‘성가퀴’를 두었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치’를 만들어 수나라 군사들을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견고한 고구려성을 함락하기 위해 수나라는 포차로 돌을 날렸을 것입니다.
후에 당태종이 고구려의 요동성을 함락시켰을 때 빼앗은 곡식이 50만 석에 군사 1만 명과 4만명의 포로를 잡았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많은 곡식과 포로가 중국에 넘어갔을까. 그것은 성을 지키는 것에 모든 사활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잡힌 포로들은 노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 성을 지켜내야 했고 그만큼 성을 견고하게 쌓는 것은 중요했습니다.
"591년 2월 26일 남산신성을 만들었다. 이 때 법에 따라 만든 지 3년 이내에 무너지면 죄로 다스릴 것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려 맹서케 하였다."
이것은 경주에서 발견된 남산신성비에 적힌 내용으로 고대에서 이루어진 일종의 건축실명제입니다. 삼국시대는 전쟁을 통해 성을 뺏고 빼앗기는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성을 차지한다는 것은 군사적 거점을 선점하는 것을 넘어서 그 지역의 백성과 일대의 땅이 승리한 국가에 귀속됨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성을 허투루 지을 수 없었고 그리하여 그 비석에 이름을 적은 것으로 보입니다.
삼국 각국간의 전투와 중국과의 전쟁은 정말 치열했고 그 과정에서 백성들은 고통을 떠안았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화랑제도를 두고 인재를 양성하며 가야의 세력을 규합한 신라가 수,당과의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킵니다. 그 과정에서 외세의 힘을 빌렸다는 현대의 비판도 존재하지만 나당전쟁을 통해 다시 당나라의 지배권을 대동강 이북으로 몰아내고 이러한 일련의 전쟁들이 우리 민족 형성의 계기가 되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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