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사람들의 의식주는 어떠했을까

2022. 7. 25. 21:12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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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사람들의 의식주는 어떠했을까요.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간단하게 살펴볼까요. 그에 앞선 청동기 시대에는 위 아래로 옷을 나누어 입기는 했지만 구체적인 모습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고조선과 부여 등 고대국가를 거쳤고 삼국시대에 들어섰는데 이 시기에는 저고리와 그 밑에 바지 혹은 치마를 입는 옷이 입었고. 머리에는 모자를 썼고 허리에는 띠를 맸습니다. 날씨가 추워지면 두루마기를 입었으니 그러한 모습은 각종 벽화나 토우를 통해 전해집니다. 이러한 옷의 재료인 베를 짜는 일은 여성이 맡았고 백제의 직조장인으로 서소라는 사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청동기 시대 이후로 계급이 생겨났습니다. 따라서 삼국시대에는 계층 간에 의상이 차이 났는데 비단옷은 높은 신분이 입는 것이었고 겨울이 되면 두루마기를 걸치거나 동물의 가죽을 입었는데 일반 백성들은 베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겨울에는 추위를 피하기 위해 일반 백성들을 여러 겹 걸쳐 입었다고 합니다. 

고구려 고분 쌍영총 벽화-주름치마와 저고리를 입은 고구려 여인

 고구려 벽화를 보면 이때 이미 한복이 등장하였습니다. 중국의 한푸나 일본의 기모노는 남방계 복식문화를 띠고 있지만 우리 조상의 복식은 말을 타기에 유리한 북방계 복식문화의 영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고조선부터 이어진 왼쪽 여밈문화가 고구려의 한복에서도 나타나는데요. 남녀 모두 저고리 오른쪽 옷자락을 왼쪽 위로 여민 것입니다. 초원에서 말을 타고 다니는 유목민족들이 이러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데 왼손에는 말고리를 쥐고 오른손으로 움직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삼국마다 그 지역의 사투리처럼 복장에도 다소 차이가 있었습니다. 고구려의 한복은 점무늬가 많으며 외국과의 교류가 많았던 백제는 오른쪽 여밈이 발달했습니다. 그리고 백제의 옷은 삼국의 한복 중 가장 화려했고 여성적인 특징이 많이 나타나며 겉옷을 입는 복식문화도 백제의 한복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고 합니다. 남북국 시기 신라 후기로 가면 사람들의 옷이 사치스러워져 신분의 지위를 알 수 없게 되자 흥덕왕은 신분에 따라 옷차림을 달리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보고 백의 민족이라고 하잖아요. 부여 사람들은 흰 옷을 좋아하여 흰 베로 만든 두루마기와 바지를 입었으며 장례를 치를 때도 남녀 모두 흰 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중국 측의 기록을 보면 백제나 신라 사람들도 흰 옷을 즐겨 입었으며 삼베로 만든 옷은 빨래를 하면 할수록 하얘지기 때문에 백제 사람들의 옷은 청결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흰색옷 착용은 고집은 아니었습니다. 고대 국가들은 염색기술도 발달해 있어서 당시의 실상을 알려주는 그림이나 벽화를 보면 신분이 낮은 사람을 제외하면 색과 무늬가 있었습니다. 벽화에 기록은 그러하지만 화려한 색깔을 피하고 흰 옷을 즐겨 입는 우리 민족의 풍속은 고려시대에도 이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송나라 사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을 보면 고려에서는 여자 옷에 색깔을 들이지 않는 풍습이 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럼 집은 어땠을까요. 청동기 시대에도 움집에 살았다면 철기시대에 들어서면서 집이 완전히 땅위로 올라오게 되는데 땅 밑에서 올라오는 습기로부터 곡식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삼국시대에는 신분제 사회가 완전히 정착된 시기였기 때문에 신분에 따라 살 수 있는 집은 달랐습니다. 신라의 경우는 이러한 것을 골품제를 통해 철저하게 규정해 놓았는데 살 수 있는 집은 물론, 신분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가재도구에 대해서도 정해놓은 것입니다. 
그러던 남북국 시대의 신라 헌강왕은 신하에게 백성들이 모두 기와를 쓰고 짚을 사용하지 않으며 숯으로 밥을 짓는 것이 사실이냐고 물었습니다. 신하는 그렇다고 대답하며 이 모든 것이 대왕의 은덕이라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을 것입니다. 서라벌이 한 눈에 바라다 보이는 월상루에서만 그렇게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숯의 사용에도 다양한 해석이 달립니다. 민간에서도 사치를 부렸다는 설, 지나친 숯의 사용으로 산림이 파괴되어 신라의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되는 것은  아마 궁궐 근처라 귀족들이 모여 살았고 왕이 보기에는 그렇게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변방으로 가면 서민들은 짚을 이용한 집에 살았을 것이며 부엌에서 장작을 넣어서 밥을 해먹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추운 겨울을 어떡했을까요. 이미 삼국시대에도 겨울을 나기 위해 온돌을 이용했습니다. 온돌은 삼국시대 이전에는 한반도 북부지역에서 쓰이다 삼국시대 때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전파된 것으로 알려집니다. 고구려 고분(옛 무덤)인 안악 3호분의 벽화에 그려진 고구려 주방을 보면 아궁이가 있는 것이 보입니다. 중국 당나라의 역사책인 『구당서』는 ‘겨울에 모두 긴 구덩이를 만들고 그 아래에 불을 때서 따뜻하게 하였다.’라고 고구려의 온돌 문화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방 전체를 덥히는 방식은 아니었고 고구려에서는 바닥에 깔개나 판자를 깔아 찬 기운을 막았고 한쪽만 난방이 되므로 입식생활을 했다고 생각됩니다. 

삼국시대사람들은 자연스레 주변의 산과 바다, 농지에서 나는 것들을 가지고 음식으로 해먹었을 것입니다. 고구려는 옥저를 정복하면서 그 주민들로 하여금 생선과 소금을 바치게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순무나 가지, 부추 등을 소금으로 절인 음식이 등장했으니 바로 김치입니다. 삼국시대의 김치는 지금의 붉은 색은 아니었고 장아찌형태였습니다. 남북국시대와 고려 시대에 장아찌류와 더불어 동치미, 나박김치 등으로 진화했고 임진왜란 이후에 일본을 통해 고추가 들어와 김치의 대표적인 양념이 되었습니다. 한편 중국의 '위지동이전'에 고구려에서 장양(藏釀)을 잘한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 이전부터 이미 된장·간장이 한데 섞인 걸쭉한 것을 담가 먹다가 삼국시대에 와서 간장·된장을 분리하는 기술이 발달됐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상에 올라오는 김 역시 삼국시대 때부터 먹었고 『삼국유사』에서는 ‘신라 시대 왕의 폐백 품목’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외에도 삼국시대의 무덤에서는 달걀, 오리알 그리고 노루사슴 등의 짐승의 뼈와 각종 생선 뼈, 조개껍데기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울산 부근에서 세 발 달린 청동솥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을 근거로 학자들은 이 일대에 유력정치세력이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이 일대는 과거에 우시산국이 존재했던 곳으로 우시산국은 신라탈해이사금 시기인 서기 후 100년도 안된 시기에 멸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후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의상법사의 제자인 진정법사가 스님이 되기 전에 무척 가난했는데 자신이 가지고 있던 다리가 하나 부러진 솥을 시주하고 질그릇에 밥을 해먹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따라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시기에는 일반 백성들도 솥 하나쯤은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한편 백제인은 주로 채식을 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2004년 발굴된 왕궁리 공동화장실 인분을 조사한 결과인데요. 채소를 섭취할 경우 주로 감염되는 회충과 편충알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육식성 기생충인 조충알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왕궁리 유적은 백제 무왕(제위기간 600-641년)대에 조성된 궁성유적으로 궁중의 사람들도 채식을 주로 했다면 평민들은 두말할 필요 없을 것입니다. 아마 고구려와 신라의 지배층은 육류를 얼마나 섭취했는지 알 수 없으나 삼국의 백성들의 채식위주의 식단으로 꾸렸음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편 최근 신라의 무덤에서는 180cm에 달하는 삼국시대 피장자 인골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 전까지 발견된 삼국시대 인골은 165cm가 최장신이었다고 합니다. 사람의 신장과 식단은 크게 연관이 있잖아요. 시대가 오래전이니 만큼 지금보다는 영양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을 텐데요. 그래서 180cm에 달하는 유골의 발견은 뜻밖에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 유골이 척추 변형을 가지고 있는데 과도한 노동에서 온 것인지 매장과정에서 온 것인지 알 수 없으므로 잘 먹어서 키가 큰 건지 속단할 수는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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