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서로 말은 통했을까.
2022. 7. 28. 11:33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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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를 생각하면 궁금해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말입니다. 그러니까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가야까지 이들간에 과연 말이 통했을까하는 것입니다. 일단 이런 것은 벽화로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당연히 기록으로 의존해야 합니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같은 고대 문헌에 담겨진 이야기로 유추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삼국사기에서 이런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김춘추가 고구려의 연개소문과 만나서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김춘추가 왕이 되기 전 신라는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이에 신라는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백제를 칠 구원병을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당시 보장왕이 고구려의 왕이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연개소문이 쥐고 있었습니다. 연개소문은 죽령 이북의 땅을 되돌려 달라고 하니 이에 김춘추가 왕이 결정할 일이라 대답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에 분노한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옥에 가두게 됩니다. 김춘추는 이 난감한 상황을 탈출하기 위해 보장왕이 아끼던 신하 선도해를 만나고자 베를 선물합니다. 이에 선도해가 전해준 이야기가 바로 '토끼가 용왕한테 뭍에 돌아가 간을 가져오겠다고 속여 무사히 돌아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이에 김춘추는 깨닫고 "신이 귀국하면 우리 신라 임금에게 청하여 고구려 땅을 돌려보내도록 하겠다."고 보장왕에게 이야기합니다.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럼 이 이야기에서 김춘추와 선도해, 보장왕, 연개소문은 서로 어떻게 이야기를 주고받았을까요. 통역관이 없었던 것일까요. 삼국유사에는 통역관이 있었다고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삼국유사는 왕조 차원에서 기록한 문헌이 아니므로 통역관을 통해 말을 전하였다라고 통역관이 있고 없고를 적어 넣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한편 『삼국사기』 열전 거칠부(居柒夫)편에 보면 고구려 승려 혜량법사가 신라로 망명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거칠부가 승려로 위장하고 고구려를 염탐했을 때 고구려 혜량법사는 거칠부가 신라 사람인 것을 알면서도 숨겨주었습니다. 이후 거칠부가 백제와 협공하여 고구려를 쳐서 영토를 확장할 때에 거칠부는 다시 한 번 혜량법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거칠부가 자신을 보살펴준 혜량법사에게 은혜를 갚을 방법을 묻자 혜량법사는 자신을 신라에서 받아주도록 해달라고 이야기합니다. 혜량법사와 거칠부가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아마도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말이 통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거칠부가 고구려로 넘어가 고구려를 살피고 오거나 헤량 법사가 신라로 귀순하는 장면을 생각하면 어쩌면 거칠부가 고구려 말에 능한 신라인일 수도 있습니다. 달리 생각하면 고구려말과 신라말에는 다소 차이가 있었고 둘이 대화할 때는 어색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대신 고구려말과 신라말에는 유사성도 많아서 신라인이 염탐을 목적을 위해 고구려말을 배우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고구려말과 신라말의 차이는 이북 사투리와 한반도 남부 사투리의 차이보다는 크겠지만 한국어와 일본어 정도의 차이를 보이는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것입니다.
한편 고구려 장수왕도 승려 도림을 간첩으로 활용한 적이 있었습니다. 고구려 간첩 도림은 백제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하는 것을 이용하여 개로왕에게 접근하였고 결국 장수왕의 보낸 승려 도림에게 속아 넘어간 개로왕은 무리하게 성을 짓다가 고구려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아차산성에서 참수되고 말았습니다. 간첩 도림은 백제 개로왕에게 통역관을 두고 대답했을까요. 솔직히 그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당시 백제는 바다를 통한 중국과의 교류가 많았고 따라서 통역관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물며 고구려와 백제 간의 말이 달랐다면 궁중에서 고구려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을 부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구려 조정에 반감을 갖고 넘어온 귀순자였기 때문에 백제는 정권 차원에서 후하게 대했을 것입니다. 다만 고구려말과 백제말이 비슷하여 개로왕과 도림 사이에 통역 없이 대화가 이루어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실 중국의 양나라의 기록을 보면 신라사신을 보며 절하는 방법과 걷는 모습이 고구려인과 비슷하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당시 중국에서는 고구려와 신라를 비슷한 사람들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당시 중국 측에서는 백제의 통역을 거쳐 신라사신에게 의사를 전달할 정도로 신라에는 중국어에 능통한 사신이 없었다고 합니다. 바꿔 이야기하면 신라의 말과 백제의 말이 비슷하기 때문에 이들 간에는 통역이 필요가 없었고 따라서 백제의 사신이 신라사신에게 중국어를 통역하여 신라에게 들려주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과의 교역이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적었던 신라 입장에서는 그나마 백제 말에 능통한 사신을 대동하여 보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한편 백제에서 마를 팔아 생계를 이어가던 서동이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를 얻기 위해 서라벌(경주) 아이들을 동원하여 퍼뜨린 노래 ‘서동요’가 있습니다. 이 노래에 발끈한 진평왕이 선화공주를 멀리 귀양 보내고 그 길에 나타나 말동무를 한 이가 바로 서동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에서 가난한 백제 사람인 서동이 신라말을 잘해서 신라 아이들에게 동요를 가리치고 퍼뜨리게 했다던가 귀양보낸 공주에게 혹시 백제인을 만날지 모르니 선화공주에게 백제말을 할 줄 아는 시종을 딸려 보낸다면 이것이 더 억지스러운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백제말과 신라말이 통했다고 밖에 생각될 수 없는 일화입니다. 『삼국유사』에 전해오는 이야기에 대해 단지 이야기일 뿐이지 않느냐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삼국유사』란 책은 스님 일연이 특정 계층을 위해 만든 소설이 아닙니다. 역사책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문헌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여러 이야기를 통해 고구려, 백제, 신라 간에 어느 정도 말이 통했다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 합니다.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 겨레였고 따라서 문화적 공통점이 강했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는 지금의 남한과 북한처럼 왕래가 불가능했던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초기 철기국가시대에는 여러 갈래로 갈라져 사는 만큼 방언이 심하긴 했지만 잦은 왕래로 통해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정도로 고구려 말과 백제 말, 그리고 신라 말이 달랐다고 보지는 않는 것입니다. 이유는 고구려나 백제, 신라의 말은 다 고조선에 뿌리를 두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다만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말이 그 뿌리가 같더라도 고조선 시기와 초기 철기 국가시대는 다소 시간의 차이가 난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고조선의 멸망은 기원전 108년 이후 삼국이 세워진 것은 이후의 일로써 신라의 건국이 기원전 57년이니 짧게는 50년 넘게 잡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 사이에 언어의 변화 그리고 그 뒤에도 있었을 변화도 무시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조선의 주민이 한반도로 이주해와 살았다면 그 이전에 살던 원주민 즉 마한 변한 진한에 살던 주민들과 융합되면서 말도 변화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고구려말은 북방계 언어로서 백제말과 신라말은 남방계 언어로서 분화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그에 따라 백제와 신라는 어느 정도 말은 통했지만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는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삼국시대 사람들 간에 말을 통했을까라는 말에 확실히 정의내리기 어렵습니다. 아마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 지대에 살던 사람들, 혹은 고구려와 백제, 백제와 신라 접경 지대에 살던 백성들은 이 둘의 언어를 교묘하게 섞어놓은 듯한 말을 구사하지는 않았을까요. 고구려, 백제, 신라 간에 말이 통했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 당시 존재했던 나라의 수보다 더 많은 비슷한 듯하면서도 제각기 다른 말들, 그러니까 아예 다른 언어라기보다는 수많은 방언들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래도 제각기 다른 듯한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말이 통했다면 이유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고조선의 후예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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