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장고형 무덤은 무엇을 말하는가.

2022. 11. 27. 07:56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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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덕고분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라고도 하는 장고형 고분은  사다리꼴의 네모형, 뒷부분은 원형으로 열쇠 구멍 모양을 하고 있는 무덤으로 고대 일본 지배자들의 무덤 모양입니다. 이는 일본역사의 자존심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이러한 형태의 무덤은 일본에서만 보이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일단 일본에서 행해진 전방후원고분은 서기 3세기 중엽에서 6세기 후반에 걸쳐 일본 고대국가형성기에 조성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 시기를 아예 고분시대라고 일컫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이러한 무덤과 야마토 정권 형성에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았는데 이러한 무덤을 조성하려면 대규모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일본 최고 권력자나 지역의 유력자의 무덤으로 알려진 전방후원분은 일본 전역에 2000여기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본 역대 왕들도 이러한 형태의 묻혔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전방후원분와 비슷한 무덤이 한반도에서도 발견되었습니다. 때는 1938년, 전남 나주 반남면 신촌리 6호분·덕산리 2호분이 전방후원분과 비슷하다고 보고되었으나 그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고 광복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이후에도 우리나라 학계는 유사한 무덤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1983년에는 한 교수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전방후원분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이 지역의 무덤형태가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우리 나라 학계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이것에 관심을 보인 것은 일본역사학계였습니다. 하지만 일본역사학계가 전라남도에 있다는 전방후원분에 관심을 보인 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전방후원분에 대하여 맞다 아니다로 일본 학계에서도 그 논쟁이 꽤나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90년대에는 그 논쟁이 한반도로 퍼졌습니다. 일본은 전라도에 있는 전방후원분을 근거로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할 수 있었기에 전방후원분을 지지했고 한국학계는 이를 부정합니다.
그러던 90년 전남 함편 신덕고분이 도굴사건이 일어났고 이 때문에 조사를 벌이던 국립광주박물관은 이 무덤에 대해 장고형무덤이라는 결론을 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도 전남 영암 자라봉 고분, 함평 장고산 고분, 영광 월산리 고분, 광주 월계동·명화동 고분 등 속속 장고형 무덤이 발견되었지만 학계는 이에 대해 꺼려했는데 일본식 묘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충남 부여의 고분에 대해서도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자연구릉으로 밝혀졌으며 결과적으로 이러한 장고형 고분은 영산강 일대에서 주로 발견된 것들입니다.  

전남 함평 예덕리에 있는 신덕 고분의 1990년대 조사 당시 모습

전라도에서 장고형 고분이 발견되었고 그 개수가 10여기가 넘어가고 일본에서도 관심을 보이는 이상 우리나라학계도 이에 대해 연구해야 했습니다. 아무래도 가장 큰 핵심은 이 무덤의 기원은 어디이고 무덤의 주인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알아야 할 역사적 사실은 장고형 무덤이 일본에서는 3세기 중반에서 6세기 후반까지 조성된 반면 한반도의 것은 5세기 전반~6세기 전반에 잠깐 등장한 묘의 양식이었으며 개수도 일본의 것에 비해 터무니 없이 적은 13기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사실만 보면 장고형 고분이 일본에서 건너온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합니다. 
실제로 전라남도 일대의 장고형 고분에서 발견된 것은 봉분 주위를 놓인 원통형 토기였는데 이 유물은 장례의식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며 몸체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특히 유물의 발견이 일본학계를 흥분시켰는데 일본전방후원분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1994년 일본 아사히신문은 ‘고대 일본 문화가 한반도에 전해졌다는 것을 입증하는 결과’라는 1면의 기사로 냈습니다. 이 일로 당시 발굴을 담당한 박물관 측이 우리 정부 측으로부터 해명을 요구하는 전화를 받았다고 하니 이 문제가 생각보다 민감한 사안이었습니다.

일본 나라 지역 최대의 전방후원분인 마루야마 고분. 6세기 중후반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방후원에 대한 일본학자들의 반응도 각양각색이었는데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라고 생각하는 학자들부터 오히려 한반도에서 전방후원분이 기원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드러날까 조마조마하는 학자도 있었을 것이며 이를 통해 한일역사학계의 교류를 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고대 일본이 6세기 한반도 영산강 유역에 일종의 무역 사무소를 두고 중국과 교류했을 것이며 그러면서 이 일대에 세력을 구축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사료로 중국 역사서 『송서』의 기록을 들고 있습니다. 
‘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육국제군사((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
이 기록은 왜왕이 송나라에 가서 받은 작호로 왜왕이 이러한 작호를 내려달라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왜왕이 왜, 신라, 임나가라, 진한, 모한을 지배하는 통치자라고 하는 것을 송나라에 요청한 것입니다. 일본학계는 이 모한이라는 세력을 영산강 일대를 보고 있는데 그리고 여기에 있던 사람들이 전방후원분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진한과 모한이라는 세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마한과 신라 이전의 땅 진한을 생각할 수 있으나 마한은 근초고왕 때인 369년에 백제에 병합되었고 일본학자들이 거론한 기록들은 5세기의 것입니다. 그리고 진한도 4세기에 병합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장고형 무덤에 대해 연구한 우리나라 학자들은 한국기원설을 주장했는데 고대 경상도 사람들이 건너가 고향의 집자리 지형 그러니까 전방과 후원으로 생긴 구릉을 골라 나무곽을 배치했다고 하는가 한편 북한의 학자는 고구려에서 건너온 것으로 추정하였습니다. 한편 둥그런 무덤과 네모난 무덤이 결합한 것으로 원분과 제단이 합쳐진 이러한 무덤은 한반도에서 건너온 것이라 했습니다. 한편 일본학계에서는 네모나고 주위에 구덩이 시설을 갖춘 방형주구묘의 돌출부가 환경에 따라 변화하였다고 했으니 일본자생설을 주장했습니다. 

전남해남군에서 발견된 장고봉 무덤방 노출모습

그런데 신덕고분에서는 길이 110.4cm에 달하는 대도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칼은 한반도의 것보다 20cm가 더 길었습니다. 당시 한반도의 주무기는 창이었으므로 무덤의 피장자는 왜계 무중세력이었을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백제계의 장신구가 발견되었는데 이걸 보면 백제인이었을 것으로도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 무덤의 주인이 백제왕실과 관련성을 알려주는 유물이 발견되었으니 바로 금동관조각으로 백제왕의 하사품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무덤의 축조세력은 왜계 무장세력으로 백제와 신속관계에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왜계백제관료로 왜계 백제관료들은 백제의 선진문물을 일본으로 가져갔고 말과 병력, 군수수품을 백제의 필요에 의해 제공한 사람들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장고형무덤의 주인은 왜계백제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영산강 일대에는 옹관을 사용하는 무덤이 있으니 이는 백제와는 다른 양식이고 그 크기도 컸습니다. 또 여기에서 금동관과 금동신발, 큰고리칼 등 유물이 나왔습니다. 또한 영산강  새발무늬토기가 있는데 북규슈에서도 새발 무늬토기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백제가 남하하기 전의 마한세력의 문화로 알려졌습니다. 마한세력은 당시 북규슈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475년 백제가 고구려의 공격으로 남하가 불가피해지자 백제는 대안으로 영산강일대를 노립니다. 하지만 비교적 강했던 영산강 일대를 차지하기 위해 동성왕이 일본의 무장세력을 데려왔고 그 사람들이 장고형 무덤의 주인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리고 나주복암리 고분에서 금동신발이 나오니 백제가 영산강 일대를 장악하고 이 지역을 새로 다스리는 세력에게 내린 하사품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장고형 무덤이 출현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편 일본은 전방후원분에 대해서 자신만의 문화유산이라 생각했으며 그 기원은 방형주구묘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전라도 지역에서 묘 주변에 구덩이 시설을 두른 묘인 주구묘가 우리나라에서 발견되었는데 이것들의 시기는 기원전후로 밝혀졌으니 이는 일본학계의 주장을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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